[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2) 여근곡과 옥문지
신록만큼 경건한 영원한 생명의 모태
# 봄향기 가슴을 울리고 봄이다. 노오란 산수유,개나리,하얀 산벚꽃,앵두,배꽃 피고 지다 지금은 진달래,복사꽃,산천을 붉게 적시고 있다. 경주의 벚꽃은 하얀 절정을 이루다 지금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볼그레한 여인의 얼굴 모양 연분홍 수줍은 잔영을 머금고 있다. 1천 400여 년 전 서라벌,"한겨울 영묘사 옥문지에서 수많은 개구리들이 3,4일 동안 밤낮으로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정예 군사 2천으로 서쪽 교외의 여근곡에 가서 숨어 있는 적병을 죽이라고 하였다."
오늘 찾는 영묘사지와 여근곡 무대는 궁성(반월성)에서 전부 서쪽에 있는 곳이다. 동쪽이 순간적으로 불쑥 솟구치는 태양 같이 팽팽한 힘의 남성이라면,저녁 노을 붉게 물드는 석양의 서쪽은 부드럽고 잔잔한 아름다운 여인 같다. 불교에서도 서쪽을 극락의 서방정토라 하지 않던가.
여성을 빼닮아 여근곡이라 했지만 우리나라 산은 노령기의 완만한 곡선에 물 흐르는 계곡이 많아 여성을 닮은 곳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닮은 '미스 여근곡'이 지금 가고 있는 경북 건천의 여근곡이다.
# 유혹하는 미스 여근곡
여근곡에 수줍게 불타는 복사꽃,진달래꽃은 산천을 적시고 있었다. 여근곡은 멀리서도 선명하게 확 들어와 유혹하지 않아도 빨려 들어간다. 영남학파의 종장인 김종직은 이 여근곡을 보고 "옥문이라 천년을 두고 희롱하는 이름이여"라고 읊었지만 여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건너편 남성산도 제 물건을 믿고 빳빳하게 세우고 돌진하다 지나는 소금 장수가 휘두른 막대기에 처참하게 잘린 채 들판에 야트막한 구릉으로 누워 있다. 엉큼엉큼 기어가던 지석묘도 서로 다투다 논가에 주저 앉아 가지 못하는데 하늘같이 맑은 마음만 수용하는지 흰 구름만이 여근곡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복사꽃 춘정을 안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근곡을 향해 들어가는데 여근곡은 더 넓은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는 사랑을 보내주고 있었다.
연못가의 매력적인 소나무 사이에 물오른 수양버들은 연노란 고운색을 차려입고 춘정을 이기지 못해 바람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몸을 맡기고 있었다.
멀리서 볼수록 더욱 뚜렷한 여근곡은 유독 그곳만 짙푸른 숲을 이루었고 주위에는 진달래 마음껏 청춘을 불태우고 마을의 연분홍 복사꽃은 수줍은 여인이 되어 붉은 봄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여근곡은 참 묘했다. 몇 년 전 산불이 이 산을 태웠는데 이상하리만치 볼록 솟은 부분만 타지 않아 아직까지 소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유학사는 선홍빛 연등이 정갈한 그리움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절마당을 지나 여근곡 옥문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돌쇠같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천천히 여근곡 심장부에 올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꿈틀거리는 숨소리에 나풀거리는 나비가 반기면서 길 안내까지 하였다.
온갖 야생화가 저마다의 사연을 흘리고 깊게 팬 골짜기에 오르자 뜨거운 물이 흐르는 여근곡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갔다.
# 연분홍 설렘에 물은 흐르고
여기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군을 죽이고 돌아간 장수와 신하들이 어떻게 이 장소를 알았느냐고 선덕여왕에게 물었다.
여왕은 거침없이 "개구리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은 흰데,흰색은 서쪽이기 때문이고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대꾸했다. 어리석은 남성 모두에게 일갈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몰랐소,라고. 예전에 이웃 동네 총각들이 이 동네 처녀 바람 나라고 막대기로 이 옥문을 마구 쑤시고 휘저을 때 얼마나 아픈 상처를 받았을까. 그래도 옥문은 어머님 같은 큰 마음으로 용서하고 수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동네 상수도 때문에 옥문샘을 메웠지만 메운 자리는 이끼 푸른 돌과 개고사리의 작은 숲을 이루었다. 썩어 넘어진 산벚나무에는 딱따구리가 수없이 구멍을 내어 놓았고,제일 크고 미끈한 두충나무 밑 부분에는 꼭 여근곡을 축소해 놓은 모양새가 도드라져 있는데 새와 나무들도 여근곡의 의미를 알기는 아는 것일까.
나는 반듯한 돌 위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나니 같이 왔던 친구 안재호 동국대 고고미술과 교수는 모성의 모태에 와서 어찌 그냥 가겠냐며 '산 아~,사랑하는 내 고향의~ 산 아'로 시작하는 길고 긴 가곡 '산 아'를 힘껏 불렀다.
이 골짜기에 들어왔던 2천의 신라 군사들과 전멸한 500의 백제 군사가 관중이었다. 모두 다 나라 위해 몸을 바쳤는데 1천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슬픈 영혼을 달래었을 것이다.
옥문 옆 나무에는 산악회의 붉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온갖 새들은 삐-욱,삐-욱,찌찌-배배 노래하고 있었다. 비로소 신록은 생기가 돌았고 두 사나이 붉은 마음에 옥문은 불타고 영원한 생명의 모태 여근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근곡은 멀리 떨어질수록 뚜렷하게 보이고 가까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사랑의 이치와도 같았다.
# 옥문지는 자취 없고
내려와 개구리가 성나게 울었던 옥문지(玉門池)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경주 시내의 영묘사지에 갔다. 서산에 해지고 날씨마저 쌀쌀하여 성난 개구리가 울었던 한 겨울을 체험하라는 듯했다. 지금의 흥륜사가 옛 영묘사인데 선덕여왕이 세웠기에 많이도 행차했을 것이다. 여왕을 사모한 지귀는 어디쯤에서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여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묘사이기에 여기서 나온 '신라의 미소' 수막새 여인도 선덕여왕이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옥문지까지….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어디쯤 옥문지였는지 알 수가 없어 어느 맑은 비구니 스님에게 옥문지를 찾으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어둠이 깔리는 영묘사를 빠져 나왔다.
신록만큼 경건한 영원한 생명의 모태
# 봄향기 가슴을 울리고 봄이다. 노오란 산수유,개나리,하얀 산벚꽃,앵두,배꽃 피고 지다 지금은 진달래,복사꽃,산천을 붉게 적시고 있다. 경주의 벚꽃은 하얀 절정을 이루다 지금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볼그레한 여인의 얼굴 모양 연분홍 수줍은 잔영을 머금고 있다. 1천 400여 년 전 서라벌,"한겨울 영묘사 옥문지에서 수많은 개구리들이 3,4일 동안 밤낮으로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정예 군사 2천으로 서쪽 교외의 여근곡에 가서 숨어 있는 적병을 죽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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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빼닮아 여근곡이라 했지만 우리나라 산은 노령기의 완만한 곡선에 물 흐르는 계곡이 많아 여성을 닮은 곳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닮은 '미스 여근곡'이 지금 가고 있는 경북 건천의 여근곡이다.
# 유혹하는 미스 여근곡
여근곡에 수줍게 불타는 복사꽃,진달래꽃은 산천을 적시고 있었다. 여근곡은 멀리서도 선명하게 확 들어와 유혹하지 않아도 빨려 들어간다. 영남학파의 종장인 김종직은 이 여근곡을 보고 "옥문이라 천년을 두고 희롱하는 이름이여"라고 읊었지만 여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건너편 남성산도 제 물건을 믿고 빳빳하게 세우고 돌진하다 지나는 소금 장수가 휘두른 막대기에 처참하게 잘린 채 들판에 야트막한 구릉으로 누워 있다. 엉큼엉큼 기어가던 지석묘도 서로 다투다 논가에 주저 앉아 가지 못하는데 하늘같이 맑은 마음만 수용하는지 흰 구름만이 여근곡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복사꽃 춘정을 안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근곡을 향해 들어가는데 여근곡은 더 넓은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는 사랑을 보내주고 있었다.
연못가의 매력적인 소나무 사이에 물오른 수양버들은 연노란 고운색을 차려입고 춘정을 이기지 못해 바람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몸을 맡기고 있었다.
멀리서 볼수록 더욱 뚜렷한 여근곡은 유독 그곳만 짙푸른 숲을 이루었고 주위에는 진달래 마음껏 청춘을 불태우고 마을의 연분홍 복사꽃은 수줍은 여인이 되어 붉은 봄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여근곡은 참 묘했다. 몇 년 전 산불이 이 산을 태웠는데 이상하리만치 볼록 솟은 부분만 타지 않아 아직까지 소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유학사는 선홍빛 연등이 정갈한 그리움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절마당을 지나 여근곡 옥문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돌쇠같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천천히 여근곡 심장부에 올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꿈틀거리는 숨소리에 나풀거리는 나비가 반기면서 길 안내까지 하였다.
온갖 야생화가 저마다의 사연을 흘리고 깊게 팬 골짜기에 오르자 뜨거운 물이 흐르는 여근곡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갔다.
# 연분홍 설렘에 물은 흐르고
여기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군을 죽이고 돌아간 장수와 신하들이 어떻게 이 장소를 알았느냐고 선덕여왕에게 물었다.
여왕은 거침없이 "개구리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은 흰데,흰색은 서쪽이기 때문이고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대꾸했다. 어리석은 남성 모두에게 일갈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몰랐소,라고. 예전에 이웃 동네 총각들이 이 동네 처녀 바람 나라고 막대기로 이 옥문을 마구 쑤시고 휘저을 때 얼마나 아픈 상처를 받았을까. 그래도 옥문은 어머님 같은 큰 마음으로 용서하고 수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동네 상수도 때문에 옥문샘을 메웠지만 메운 자리는 이끼 푸른 돌과 개고사리의 작은 숲을 이루었다. 썩어 넘어진 산벚나무에는 딱따구리가 수없이 구멍을 내어 놓았고,제일 크고 미끈한 두충나무 밑 부분에는 꼭 여근곡을 축소해 놓은 모양새가 도드라져 있는데 새와 나무들도 여근곡의 의미를 알기는 아는 것일까.
나는 반듯한 돌 위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나니 같이 왔던 친구 안재호 동국대 고고미술과 교수는 모성의 모태에 와서 어찌 그냥 가겠냐며 '산 아~,사랑하는 내 고향의~ 산 아'로 시작하는 길고 긴 가곡 '산 아'를 힘껏 불렀다.
이 골짜기에 들어왔던 2천의 신라 군사들과 전멸한 500의 백제 군사가 관중이었다. 모두 다 나라 위해 몸을 바쳤는데 1천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슬픈 영혼을 달래었을 것이다.
옥문 옆 나무에는 산악회의 붉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온갖 새들은 삐-욱,삐-욱,찌찌-배배 노래하고 있었다. 비로소 신록은 생기가 돌았고 두 사나이 붉은 마음에 옥문은 불타고 영원한 생명의 모태 여근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근곡은 멀리 떨어질수록 뚜렷하게 보이고 가까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사랑의 이치와도 같았다.
# 옥문지는 자취 없고
내려와 개구리가 성나게 울었던 옥문지(玉門池)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경주 시내의 영묘사지에 갔다. 서산에 해지고 날씨마저 쌀쌀하여 성난 개구리가 울었던 한 겨울을 체험하라는 듯했다. 지금의 흥륜사가 옛 영묘사인데 선덕여왕이 세웠기에 많이도 행차했을 것이다. 여왕을 사모한 지귀는 어디쯤에서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여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영묘사이기에 여기서 나온 '신라의 미소' 수막새 여인도 선덕여왕이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옥문지까지….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어디쯤 옥문지였는지 알 수가 없어 어느 맑은 비구니 스님에게 옥문지를 찾으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어둠이 깔리는 영묘사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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