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 수로부인과 '헌화가'
수로부인은 저 파도를 따라갔을까 ?
# 꽃과 여인
꽃은 향기가 짙을수록 사람과 벌을 유혹한다. 향기 짙은 여인이 움직이면 수 많은 남성들은 가슴 태우며 설렌다. 이상하게도 신라에는 미인들이 많다. 문희,천관녀,남모,옥진,포정,정원,처용의 아내,색공의 화신 미실,향기 나는 여인 김정란 등등에다 오늘의 주인공 수로부인까지. 나는 매혹적인 미시족 수로부인 흔적을 찾아 동해안으로 길을 나섰다.
포항을 지나 흥해까지는 우회도로를 타고 흥해부터서는 바닷가 길을 들어섰다. 1천300여 년 전 신라 33대 성덕왕 때 순정공은 강릉태수(오늘날 강릉시장)로 부임하기 위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로 갔을 것이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은 보통 미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도 용도 귀신도 천지만물이 다 탐을 내었으니까.
오늘 따라 바다는 영혼의 맑음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바다 색으로는 가장 매혹적인 에메랄드빛을 시샘하는지 바람은 하얀 물거품 일으키며 앙탈을 부려보지만 이내 바다에 흡수되어 버린다. 탐미주의자 수로부인도 이런 바다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요동쳤을까. 칠포해안을 지나자 산들은 신록으로 무성한데 처참하게 불탄 민둥산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을 이름들인 이가리,용두리,벙어리,장사리,조사리,고래불,월송정 들은 참 아름다웠다.
# 신라 최고의 사랑시
신라 향가가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균여전'에 11수와 삼국유사에 14수뿐인데 가장 빼어난 서정가요가 '삶과 죽음의 길 여기 있음에 두려워'로 시작하는 '제망매가'라 하지만 이 '헌화가'는 절제와 예의가 어우러진 최고의 사랑가요다. 오늘 무대는 너무 넓어서 바다같은 넓은 생각을 해야 수로부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
수로부인 일행은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옆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고,천 길이나 되는 높은 절벽 위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던 수로부인이 "누가 저 꽃을 꺽어 바치겠소"라고 하자 일행들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 마침 암소를 몰고 지나가는 노인이 부인의 말을 듣고,
붉은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노인은 이윽고 절벽에 올라가서 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부인에게 주었다. 삼국유사에는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라고 했는데 감히 태수부인과 사랑의 대화를 할 정도의 매력이 넘치는 노인은 누구였을까. 농사용 소가 아닌 자가용 소를 타고 산천을 유람하는 나그네였을까. 아니면 선덕여왕에게 반한 지귀처럼 수로부인을 사모하던 나이 많은 사나이였을까. 사랑은 꼭 살을 섞는 '몸짓 의사 소통'만이 아니라 맑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 의사 소통'도 있는 것이다.
# 기암절벽에 꽃은 피어
수로부인이 꺾어달라 졸랐던 철쭉,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기암절벽은 대체 어디일까. 수로부인을 납치했던 임해정 바닷가는 어디이고 납치해 간 바다 용은 누구인가. 신라 당시 경주에서 강릉까지 20일 전후는 걸렸을 것이다.
하얀 백사장은 그리움을 안고 속삭였지만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높은 절벽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송림을 헤치고 신라 화랑들이 놀았다는 월송정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계속 북상하다가 마침내 머릿속에 그리던 거대한 기암절벽 두 곳이 나왔다. '수로부인 바위'라 이름 붙일 만한 두 곳은 모두 월송정과 망양정 사이에 있는데 국도 7호선을 내면서 바위를 자르기는 했지만 수로부인도 이 바위를 보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을 것만 같다. 더구나 거대한 절벽의 검은 바위에서 춘심을 자극하는 연분홍 진달래,철쭉이 사연을 흘릴 때 짜릿짜릿한 가슴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로부인은 절벽의 진달래 한 아름에다가 연정이 듬뿍 담긴 '헌화가'까지 사나이로부터 받았으니 마음의 오르가슴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틀을 더 가다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을 때 바다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로부인을 낚아챈 용은 누구일까. 나는 바닷가 절벽에서 온갖 생각에 잠겼다.
# 수로부인은 누가 채갔나
감성이 풍부한 수로부인은 임해정 바닷가의 절경에 도취되어 있다가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휩쓸려 갔거나 백사장 저쪽에서 거북이가 엉금엉금 바다로 기어가자 맨발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따라들어가다 파도에 휩쓸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덕왕 즉위년에 축하사신 207명을 보낸 일본은 성덕왕 20년 이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동해안에는 왜구가 출몰하여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생각컨대 왜구가 여기 해안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다 순정공 일행을 만나 순식간에 수로부인을 납치했고 하루나 이틀간 볼모로 잡아놓고 흥정하여 몸값을 받고 되돌려 주었을 것이다.
이때 한 노인이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하니 바다 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과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순정공이 그 말을 따르자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거북아,거북아! 수로 부인을 내 놓아라/ 남의 아내를 약탈해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먹으리라.'
이 노래를 부르자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모시고 나와 바쳤다. 순정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의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고 말했다. 부인의 옷에서도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다에 빠졌다면 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매 수로부인을 구했을 것이고,위의 말은 그때 수로부인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했을 것이다. 왜구에 납치당했다면 협상 때문에 특급대우를 받았을 것이고 향기 나는 일본의 온갖 음식들을 맛보았을 것이다. 나는 또 날이 저물어 강릉까지 못가고 경주로 되돌아 와야했다
수로부인은 저 파도를 따라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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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치는 파도가 용이 되어 수로부인을 낚아채어 갔는가(망양해수욕장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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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향기가 짙을수록 사람과 벌을 유혹한다. 향기 짙은 여인이 움직이면 수 많은 남성들은 가슴 태우며 설렌다. 이상하게도 신라에는 미인들이 많다. 문희,천관녀,남모,옥진,포정,정원,처용의 아내,색공의 화신 미실,향기 나는 여인 김정란 등등에다 오늘의 주인공 수로부인까지. 나는 매혹적인 미시족 수로부인 흔적을 찾아 동해안으로 길을 나섰다.
포항을 지나 흥해까지는 우회도로를 타고 흥해부터서는 바닷가 길을 들어섰다. 1천300여 년 전 신라 33대 성덕왕 때 순정공은 강릉태수(오늘날 강릉시장)로 부임하기 위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로 갔을 것이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은 보통 미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도 용도 귀신도 천지만물이 다 탐을 내었으니까.
오늘 따라 바다는 영혼의 맑음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바다 색으로는 가장 매혹적인 에메랄드빛을 시샘하는지 바람은 하얀 물거품 일으키며 앙탈을 부려보지만 이내 바다에 흡수되어 버린다. 탐미주의자 수로부인도 이런 바다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요동쳤을까. 칠포해안을 지나자 산들은 신록으로 무성한데 처참하게 불탄 민둥산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을 이름들인 이가리,용두리,벙어리,장사리,조사리,고래불,월송정 들은 참 아름다웠다.
# 신라 최고의 사랑시
신라 향가가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균여전'에 11수와 삼국유사에 14수뿐인데 가장 빼어난 서정가요가 '삶과 죽음의 길 여기 있음에 두려워'로 시작하는 '제망매가'라 하지만 이 '헌화가'는 절제와 예의가 어우러진 최고의 사랑가요다. 오늘 무대는 너무 넓어서 바다같은 넓은 생각을 해야 수로부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
수로부인 일행은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옆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고,천 길이나 되는 높은 절벽 위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던 수로부인이 "누가 저 꽃을 꺽어 바치겠소"라고 하자 일행들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 마침 암소를 몰고 지나가는 노인이 부인의 말을 듣고,
붉은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노인은 이윽고 절벽에 올라가서 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부인에게 주었다. 삼국유사에는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라고 했는데 감히 태수부인과 사랑의 대화를 할 정도의 매력이 넘치는 노인은 누구였을까. 농사용 소가 아닌 자가용 소를 타고 산천을 유람하는 나그네였을까. 아니면 선덕여왕에게 반한 지귀처럼 수로부인을 사모하던 나이 많은 사나이였을까. 사랑은 꼭 살을 섞는 '몸짓 의사 소통'만이 아니라 맑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 의사 소통'도 있는 것이다.
# 기암절벽에 꽃은 피어
수로부인이 꺾어달라 졸랐던 철쭉,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기암절벽은 대체 어디일까. 수로부인을 납치했던 임해정 바닷가는 어디이고 납치해 간 바다 용은 누구인가. 신라 당시 경주에서 강릉까지 20일 전후는 걸렸을 것이다.
하얀 백사장은 그리움을 안고 속삭였지만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높은 절벽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송림을 헤치고 신라 화랑들이 놀았다는 월송정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계속 북상하다가 마침내 머릿속에 그리던 거대한 기암절벽 두 곳이 나왔다. '수로부인 바위'라 이름 붙일 만한 두 곳은 모두 월송정과 망양정 사이에 있는데 국도 7호선을 내면서 바위를 자르기는 했지만 수로부인도 이 바위를 보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을 것만 같다. 더구나 거대한 절벽의 검은 바위에서 춘심을 자극하는 연분홍 진달래,철쭉이 사연을 흘릴 때 짜릿짜릿한 가슴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로부인은 절벽의 진달래 한 아름에다가 연정이 듬뿍 담긴 '헌화가'까지 사나이로부터 받았으니 마음의 오르가슴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틀을 더 가다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을 때 바다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로부인을 낚아챈 용은 누구일까. 나는 바닷가 절벽에서 온갖 생각에 잠겼다.
# 수로부인은 누가 채갔나
감성이 풍부한 수로부인은 임해정 바닷가의 절경에 도취되어 있다가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휩쓸려 갔거나 백사장 저쪽에서 거북이가 엉금엉금 바다로 기어가자 맨발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따라들어가다 파도에 휩쓸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덕왕 즉위년에 축하사신 207명을 보낸 일본은 성덕왕 20년 이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동해안에는 왜구가 출몰하여 민가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생각컨대 왜구가 여기 해안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다 순정공 일행을 만나 순식간에 수로부인을 납치했고 하루나 이틀간 볼모로 잡아놓고 흥정하여 몸값을 받고 되돌려 주었을 것이다.
이때 한 노인이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하니 바다 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과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순정공이 그 말을 따르자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거북아,거북아! 수로 부인을 내 놓아라/ 남의 아내를 약탈해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먹으리라.'
이 노래를 부르자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모시고 나와 바쳤다. 순정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의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고 말했다. 부인의 옷에서도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다에 빠졌다면 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매 수로부인을 구했을 것이고,위의 말은 그때 수로부인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했을 것이다. 왜구에 납치당했다면 협상 때문에 특급대우를 받았을 것이고 향기 나는 일본의 온갖 음식들을 맛보았을 것이다. 나는 또 날이 저물어 강릉까지 못가고 경주로 되돌아 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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