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모량의 연제왕비와 효자 손순
보리밭에 서니효심의 돌종소리가…
# 음경 긴 왕과 짝할 여인 구하라
경주서 건천 가는 길에 아직도 삼국유사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모량마을에 갔다. 내 머릿속에는 '빨래하던 처녀가 동로수 나무 아래서 똥을 누었던 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으로 차 있다. 지명은 그대로이고 큰 나무만 찾으면 무슨 실마리를 풀 것 같았다. 신라 22대 지철로왕(지증왕)은 음경이 너무 길어(45cm) 합궁 할 여인이 없었다. 3도에 사신을 보내 여인을 구하던 중 모량부 동로수 아래에 이르자 북 만한 큰 똥을 두고 개 두 마리가 으르렁 싸우며 먹고 있었다. 사신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음,음…, 저렇게 큰 똥이라면…. 마을 사람들에게 누가 눈 똥인지 묻자,한 소녀가 말했다.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키 7척5촌(225cm)의 쭉쭉 빵빵 그 처녀는 단지 똥이 크다는 이유 하나로 지철로왕비로 간택되는 연제부인이다.
먼저,같은 마을에 있는 박목월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강나루 건너 밀밭길'과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의 '나그네' 흔적은 아물거리고 다만 초기 작품 '모란 여정'에 나오는 선도산은 저만큼 그대로 보이고,'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의 여인은 상상에 맡겨 버렸다.
마침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는 50대 농부 김범용씨에게 마을에서 제일 큰 당산나무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눈앞에 1천500년 전의 현장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 처녀가 빨래하던 냇물은 더운 사랑을 안고 세차게 흘러갔을 것이고 처녀는 이 회화나무(동로수) 아래서 똥을 누었을 것이다.
당시 있었을 우물은 몇 년 전에 메웠다뿐이지 그 물은 기계로 퍼올려 여전히 동네사람들이 식수로 쓰고 있었다. 역사의 흔적을 안은 나무는 여인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듯한 형상이고 우물가를 살펴보니 신라시대 기와가 보인다.
같이 갔던 안재호 동국대 고고미술과 교수는 연방 담벼락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가 통일신라시대 토기 파편들을 찾아냈다. 고고학자의 습관이리라. 아! 그 동로수를 찾았구나! 순간 1천500년의 시차가 왔다갔다 했다. 웃음을 띤 신라 여인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오는 듯했다. 대낮인데 어디선가 닭 울음 소리가 들린다.
# 종소리는 보리피리 되어 허공을 울리고
나는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모량마을 전체를 조망하고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동로수를 찾은 기쁨 다음으로 모량의 서북쪽에 있다는 취산,홍효사,지량평,김대성 등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모량의 손순은 아버지 학산이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운오)를 봉양하였다. 손순의 어린 아들이 항상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자 손순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 없소.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를 채워드리도록 해야 겠소." 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모량의 서북쪽) 북쪽들로 가서 땅을 파자 돌종이 나왔다. 나무에 걸고 쳐보니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가 좋았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어요." 다시 아이를 업고 종까지 가지고 와 집에 매달아 쳤다. 흥덕왕이 대궐에서 듣고 알아 보도록 했다. 사연을 듣고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섬을 주어 손순의 극진한 효성을 기렸다. 손순은 옛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라 하고 돌종을 걸었다. 진성여왕대에 후백제 도적(군사)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나는 그 절을 찾기 위해 마을 서북쪽 손순의 무덤이라 전하는 평지의 언덕에 올랐다. 신라 효자 손순의 묘는 새로 단장하고 비석까지 크게 세워놓았다. 손순의 묘 앞에는 곱게곱게 고개를 숙인 할미꽃이 바람에 사뿐거리고 이미 성숙을 넘어버린 할미꽃은 붉은 정열을 잃은 대신,하얀 동그라미를 허공에 떠받치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신라기와도 나왔고 전돌도 많이 있었다. 예전에 동국대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하여 전탑지로 판명된 곳인데 아마 여기가 손순의 집자리에 세웠던 홍효사 절터일 것이다. 보리 모(牟) 자의 보리마을 답게 온 벌판에 보리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이미 패어버린 보리에서 홍효사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붉은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어스름 땅거미는 슬픔을 머금고 보리밭을 적시고 있었다.
# 모량마을의 영광과 슬픈 상처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과 왕비 사도부인,지철로왕의 왕비 연제부인,진평왕의 왕비 승만부인 손씨를 배출한 모량은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을 것이다. 그 흔적이 이 근처 금척고분군일 것이다. 금척(金尺),'금자'를 갖다 대면 병든 사람이 건강해지고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50여기에 달했으나 지금은 옛 국도에 의해 두 동강으로 잘리고 30여기의 고분들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오늘날 모량은 어떠한가,마침 마을회관에 들어가는 노인회장 김상택 어른을 만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했던 김대성의 집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마을은 워낙 가난하여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못하였고 스스로 상놈마을,역촌마을이라 했단다. 그래서 여자들이 이 마을에 시집도 오지 않으려 했단다. 문득 번개같이 진성여왕 때 백제 군사들이 들어와 홍효사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떠 올랐다.
아,그랬구나! 이곳은 백제군이 여기 아니면 신라로 침입할 수 없었던 군사적 요충지다. 즉 이곳은 신라 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주둔했던 거친 곳. 영광의 모량은 그 슬픈 피해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보리밭에 서니효심의 돌종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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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처럼 일렁이는 보리밭 뒤쪽에 '삼국유사의 마을' 모량 마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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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 건천 가는 길에 아직도 삼국유사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모량마을에 갔다. 내 머릿속에는 '빨래하던 처녀가 동로수 나무 아래서 똥을 누었던 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으로 차 있다. 지명은 그대로이고 큰 나무만 찾으면 무슨 실마리를 풀 것 같았다. 신라 22대 지철로왕(지증왕)은 음경이 너무 길어(45cm) 합궁 할 여인이 없었다. 3도에 사신을 보내 여인을 구하던 중 모량부 동로수 아래에 이르자 북 만한 큰 똥을 두고 개 두 마리가 으르렁 싸우며 먹고 있었다. 사신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음,음…, 저렇게 큰 똥이라면…. 마을 사람들에게 누가 눈 똥인지 묻자,한 소녀가 말했다.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키 7척5촌(225cm)의 쭉쭉 빵빵 그 처녀는 단지 똥이 크다는 이유 하나로 지철로왕비로 간택되는 연제부인이다.
먼저,같은 마을에 있는 박목월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강나루 건너 밀밭길'과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의 '나그네' 흔적은 아물거리고 다만 초기 작품 '모란 여정'에 나오는 선도산은 저만큼 그대로 보이고,'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의 여인은 상상에 맡겨 버렸다.
마침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는 50대 농부 김범용씨에게 마을에서 제일 큰 당산나무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눈앞에 1천500년 전의 현장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 처녀가 빨래하던 냇물은 더운 사랑을 안고 세차게 흘러갔을 것이고 처녀는 이 회화나무(동로수) 아래서 똥을 누었을 것이다.
당시 있었을 우물은 몇 년 전에 메웠다뿐이지 그 물은 기계로 퍼올려 여전히 동네사람들이 식수로 쓰고 있었다. 역사의 흔적을 안은 나무는 여인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듯한 형상이고 우물가를 살펴보니 신라시대 기와가 보인다.
같이 갔던 안재호 동국대 고고미술과 교수는 연방 담벼락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가 통일신라시대 토기 파편들을 찾아냈다. 고고학자의 습관이리라. 아! 그 동로수를 찾았구나! 순간 1천500년의 시차가 왔다갔다 했다. 웃음을 띤 신라 여인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오는 듯했다. 대낮인데 어디선가 닭 울음 소리가 들린다.
# 종소리는 보리피리 되어 허공을 울리고
나는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모량마을 전체를 조망하고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동로수를 찾은 기쁨 다음으로 모량의 서북쪽에 있다는 취산,홍효사,지량평,김대성 등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모량의 손순은 아버지 학산이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운오)를 봉양하였다. 손순의 어린 아들이 항상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자 손순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 없소.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를 채워드리도록 해야 겠소." 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모량의 서북쪽) 북쪽들로 가서 땅을 파자 돌종이 나왔다. 나무에 걸고 쳐보니 소리가 은은하여 듣기가 좋았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 것 같으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어요." 다시 아이를 업고 종까지 가지고 와 집에 매달아 쳤다. 흥덕왕이 대궐에서 듣고 알아 보도록 했다. 사연을 듣고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섬을 주어 손순의 극진한 효성을 기렸다. 손순은 옛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라 하고 돌종을 걸었다. 진성여왕대에 후백제 도적(군사)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나는 그 절을 찾기 위해 마을 서북쪽 손순의 무덤이라 전하는 평지의 언덕에 올랐다. 신라 효자 손순의 묘는 새로 단장하고 비석까지 크게 세워놓았다. 손순의 묘 앞에는 곱게곱게 고개를 숙인 할미꽃이 바람에 사뿐거리고 이미 성숙을 넘어버린 할미꽃은 붉은 정열을 잃은 대신,하얀 동그라미를 허공에 떠받치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신라기와도 나왔고 전돌도 많이 있었다. 예전에 동국대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하여 전탑지로 판명된 곳인데 아마 여기가 손순의 집자리에 세웠던 홍효사 절터일 것이다. 보리 모(牟) 자의 보리마을 답게 온 벌판에 보리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이미 패어버린 보리에서 홍효사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붉은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어스름 땅거미는 슬픔을 머금고 보리밭을 적시고 있었다.
# 모량마을의 영광과 슬픈 상처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과 왕비 사도부인,지철로왕의 왕비 연제부인,진평왕의 왕비 승만부인 손씨를 배출한 모량은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을 것이다. 그 흔적이 이 근처 금척고분군일 것이다. 금척(金尺),'금자'를 갖다 대면 병든 사람이 건강해지고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50여기에 달했으나 지금은 옛 국도에 의해 두 동강으로 잘리고 30여기의 고분들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오늘날 모량은 어떠한가,마침 마을회관에 들어가는 노인회장 김상택 어른을 만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했던 김대성의 집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마을은 워낙 가난하여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못하였고 스스로 상놈마을,역촌마을이라 했단다. 그래서 여자들이 이 마을에 시집도 오지 않으려 했단다. 문득 번개같이 진성여왕 때 백제 군사들이 들어와 홍효사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떠 올랐다.
아,그랬구나! 이곳은 백제군이 여기 아니면 신라로 침입할 수 없었던 군사적 요충지다. 즉 이곳은 신라 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주둔했던 거친 곳. 영광의 모량은 그 슬픈 피해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