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은
채종(菜種)에 따라 각기 그 향긋함이며 그 씁쌀함이며
이빨의 씹힘새며 아련히 남는 각기 다른 뒷맛이며
쌈을 먹는 도락이 그에 있으며 그것이 된장으로써만 형성된다.
매월당 김시습이 명산을 방랑할 때 꼭 된장떡을 기름종이에 싸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단지밥에 산채쌈에 그 된장떡으로 밥을 먹었다 한다.
그리고 그 산에서 나는 나무 금(琴)통을 만들어
그 산에서 잡은 산짐승의 심줄로 금(琴)을 만들어
탄금(彈琴)함으로써 그 산의 소리를 즐겼다하니
그 또한 된장이 가능케 한 극치의 한국적 도락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격(格)이 높은 마님을 추기는 말로 '서른여섯 가지 김치를 담그고 서른여섯 가지 장(醬)을
담글 줄 아는 며느리'란 말이 있었다.
영국에서 중산층이냐 아니냐는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집 나름의 특유한 소스를 보유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조건이 되고 있듯이,
우리나라도 웬만한 가문에는 그 가문 나름의 특유한
장 담그는 비법이 전승되어 내려온 데다가 철철이 먹는 장이 다르고,
또 2년 후, 5년 후, 10년 후에 먹을 겹장이 다르며,
국거리장, 나물채장, 너비아니장 등 용도에 따라 다르다 보니 그만큼
다양했음직하다.
그래서 간장 담그는 데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장 담그는 날 택일도 신일(辛日)은 기피했다.
신(辛)은 시다는 음과 통하기에 이날 장을 담그면 시어진다는 금기(禁忌)때문이었다.
신씨(申氏)나 신씨(辛氏) 가문에서는 사돈네집이나 딸네집에 가서 장을 담가서 옮겨오기도 했다.
장독도 7~8월 여름 동안에 구운 것을 택하되,
옹기장수의 나이가 홀수일때 미리 사놓은 항아리일수록
부정을 덜 타고 장맛이 좋으며 변질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았다.
장 담글 물의 택수(擇水)도 까다로웠다.
북쪽 응달에 있는 샘물일수록 좋고, 남쪽 양지에 있는 샘물로는 3년장, 5년장 같은
겹장을 담그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다.
납설수(臘雪水)라 하여 섣달에 눈 녹인 물로 장을 담그면 변질이 되지 않는다 하여
겨울부터 물을 마련, 땅 속에 묻어두었다.
소금도 미리 사서 남풍을 피한 응달에 몇 년 쌓아두어 간수가 절로 빠지게 해서 썼다.
그리하여 장 담그는 날을 잡으면, 그 집 마님은 이레전부터 외출을 삼가고,
개를 꾸짖어도 안 되며 물론 밤에 남편과 동침을 해서도 안되었다.
장을 담글때는 장맛을 해치는 음기(陰氣)를 막고자 입을 창호지로 봉하고서 작업을 했다.
이같이 하고 귀신을 쫓는 숯과 고추를 장독에 넣고 또 금줄로 장독을 두르며 장독대에
맨드라미, 봉선화를 심어 이중삼중으로 부정요인의 접근을 주술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물론 비과학적인 요인이 없지 않으나
그만한 초인간적인 정성과 성의로 한국의 간장 문화가
유지되어 내려왔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것이다.
장과 된장을 만드는데 이와같이 신앙에 가까운 정성을 들이는 뜻은
된장이 한국인에게 주는 뜻의
비중을 적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곧 된장이란 일종의 내셔널리즘과 결부된 한국의 심벌인 것이다.
고려취(高麗臭) 곧 한국취(韓國臭)가 '된장냄새'로 그리고 한국적 표현을
'된장살'로 또한 한국적 끈기를 '된장 힘'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모두 이 된장 내셔널리즘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故 이규태 님의 '뽐내고 싶은 韓國人'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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