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6) 헌강왕과 처용가
용서와 사랑은 '천년 안개'속으로
# 남천 둑길을 따라서
오늘은 경주 동남산의 헌강왕릉과 울산의 처용암,그리고 망해사지의 삼각축을 찾아 나섰다. 온 몸이 쑤시는 감기 몸살 증세가 있어도 이 글을 보는 아름다운 분들께 감동을 전해줄 책임 때문에 겨울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헌강왕릉은 우리 집에서 저만큼 보이는 동남산에 있어 효공왕릉,신문왕릉을 지나 남천둑길로 접어들었다. 경주박물관,반월성을 끼고 흐르는 이 남천의 둑길은 경주에서 서정적인 꿈과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서산에 해 넘어간 어스름 저녁에 걸어가면 여울진 강물이 가슴 아련한 그리움을 던져주고 달밤에 걸으면 황홀함이 온몸에 휩싸인다.
'화랑은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의 구호가 적혀있는 화랑교육원을 지나 헌강왕릉에 접어 들었다. 흙길과 소나무 숲에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고요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와 함께 여기에 왔던 아름다웠던 수천 명의 얼굴이 떠오르고 온갖 사연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왕릉 주위를 살펴보다 감기 기운에 잔디에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당시 서라벌 장안은 숯으로 밥을 지었고 초가집은 없고 기와집이 즐비하여 늘어선 처마를 따라 동해 어귀까지 비를 피할 수 있었고 흔히 서라벌 백 만 인구로 회자되는 17만8천936가구의 기록도 헌강왕 때의 것이다. 지난 겨울 만화가 박재동(예술종합학교 교수) 형의 전화가 왔다. "재호 니 글 잘 쓰네. 사진도 잘 찍고 책도 참 재미있네. 그런데 내가 흥미있는 것은 내 그림에 헌강왕 수염을 허옇게 그리려 했는데 니 책보니 20대 중반에 죽었네."
그렇다. 이 왕은 덕이 높고 암기력,춤,풍류의 만능스타였는데 수명은 짧았다. 해외파의 스타 최치원도 이때 귀국하고 신라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 질투의 복수와 용서
동경 달밝은 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랑이 넷이네
둘은 내것이건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 치고 이 '처용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듯한 적나라한 장면의 묘사다. 처용이 미인 아내를 둔 덕분에 자기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체념인지 단념인지 위의 노래를 부르고 외간남자를 용서해주고 그 분을 춤으로 승화시켰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비 발레리아 메살리나(Valria Messalina,? ~48)는 살리우스와 바람을 피우다 함께 죽임을 당했고,영국 헨리 8세 왕비 앤 볼린(1503~1536)도 간통과 배신의 죄목으로 33세 청춘에 처형 당했다.
처용 아내와 반대로 앞선 시대 우리네 남성들은 부인을 두고 얼마나 딴짓을 많이 했던가. 여자의 한을 이해나 했을까.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여자에게는 가혹했다. 아름답다고 그렇게 좋아해 놓고,꽃이라고 극찬해 놓고,꽃이라면 꺾지나 말지,꺾는 것도 모자라 짓밟아 놓고 평생 멍에를 지우거나 죽여 버렸다.
남편이 들어오자 시동생과 헝클어진 모습으로 쥐잡는 시늉을 하는 것은 김동인의 '배따라기'에서 였고,간통했다고 평생을 가슴에 'A'를 달고 다녀야 했던 것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였다. 남편 채털리 경은 성 불구였고,부인은 하반신 마비였지만 성(性)까지 마비된 것은 아니었기에 산지기 로렌스와 혼외정사를 갖는 것은 영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였다.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편지를 읽는다. "당신이 낚시 간 날 밤에는 외간 남자가 새벽까지 있다가 갑니다." 남편은 낚시 간다고 나갔다가 되돌아 가서 처용이 본 장면을 목격하고 처용같이 춤도 추지 않고,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것은 일본영화 '우나기'에서 였다.
"바람도 못 피우면서 아내한테도 못하는 놈"보다는 "아내한테도 애인한테도 잘 하는 것이 백 배 낫다"고 하는 것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하는 말이다.
남편이 대기업 임원을 하다 명퇴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 러브모텔을 임대 운영했던 어느 부인은 2개월 모텔창구에 앉아 있다보니 세상에 용서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60년대였던가,70년대였던가,어느 판사는 강간죄를 무죄로 선고하면서 이런 명판결을 내렸다. "법은 정조를 지키고자 하는 여자를 보호해주는 것이지 지킬 의사가 없는 여자까지 보호해 줄 의무가 없다"고.
# 안개 낀 처용암과 밤비 내리는 망해사지
다시 울산행 직행버스를 타고,택시,그리고 용연행 시내버스에 올랐다. SK 공장을 지나자 예전의 부곡마을은 흔적도 없었고 창문 틈으로도 풍겨오던 예전의 고약한 냄새도 5월의 신록 혹은 인간의 노력이 정화시켰는지 이제는 미세한 냄새로 바뀌었다.
처용암이 보이는 길에서 내려 아래로 내려서자 아직도 철거 안 한 두 집이 옛 마을임을 알려줄 뿐이다. 어떤 배들은 뭍에 올려져 있고 간이 선착장에는 물결에 빈 배만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는 앉아서 온갖 생각에 잠겼다.
용서와 사랑은 '천년 안개'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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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를 남긴 처용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처용암. 헌강왕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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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주 동남산의 헌강왕릉과 울산의 처용암,그리고 망해사지의 삼각축을 찾아 나섰다. 온 몸이 쑤시는 감기 몸살 증세가 있어도 이 글을 보는 아름다운 분들께 감동을 전해줄 책임 때문에 겨울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헌강왕릉은 우리 집에서 저만큼 보이는 동남산에 있어 효공왕릉,신문왕릉을 지나 남천둑길로 접어들었다. 경주박물관,반월성을 끼고 흐르는 이 남천의 둑길은 경주에서 서정적인 꿈과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서산에 해 넘어간 어스름 저녁에 걸어가면 여울진 강물이 가슴 아련한 그리움을 던져주고 달밤에 걸으면 황홀함이 온몸에 휩싸인다.
'화랑은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의 구호가 적혀있는 화랑교육원을 지나 헌강왕릉에 접어 들었다. 흙길과 소나무 숲에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고요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와 함께 여기에 왔던 아름다웠던 수천 명의 얼굴이 떠오르고 온갖 사연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왕릉 주위를 살펴보다 감기 기운에 잔디에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당시 서라벌 장안은 숯으로 밥을 지었고 초가집은 없고 기와집이 즐비하여 늘어선 처마를 따라 동해 어귀까지 비를 피할 수 있었고 흔히 서라벌 백 만 인구로 회자되는 17만8천936가구의 기록도 헌강왕 때의 것이다. 지난 겨울 만화가 박재동(예술종합학교 교수) 형의 전화가 왔다. "재호 니 글 잘 쓰네. 사진도 잘 찍고 책도 참 재미있네. 그런데 내가 흥미있는 것은 내 그림에 헌강왕 수염을 허옇게 그리려 했는데 니 책보니 20대 중반에 죽었네."
그렇다. 이 왕은 덕이 높고 암기력,춤,풍류의 만능스타였는데 수명은 짧았다. 해외파의 스타 최치원도 이때 귀국하고 신라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 질투의 복수와 용서
동경 달밝은 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랑이 넷이네
둘은 내것이건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 치고 이 '처용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듯한 적나라한 장면의 묘사다. 처용이 미인 아내를 둔 덕분에 자기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체념인지 단념인지 위의 노래를 부르고 외간남자를 용서해주고 그 분을 춤으로 승화시켰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비 발레리아 메살리나(Valria Messalina,? ~48)는 살리우스와 바람을 피우다 함께 죽임을 당했고,영국 헨리 8세 왕비 앤 볼린(1503~1536)도 간통과 배신의 죄목으로 33세 청춘에 처형 당했다.
처용 아내와 반대로 앞선 시대 우리네 남성들은 부인을 두고 얼마나 딴짓을 많이 했던가. 여자의 한을 이해나 했을까.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여자에게는 가혹했다. 아름답다고 그렇게 좋아해 놓고,꽃이라고 극찬해 놓고,꽃이라면 꺾지나 말지,꺾는 것도 모자라 짓밟아 놓고 평생 멍에를 지우거나 죽여 버렸다.
남편이 들어오자 시동생과 헝클어진 모습으로 쥐잡는 시늉을 하는 것은 김동인의 '배따라기'에서 였고,간통했다고 평생을 가슴에 'A'를 달고 다녀야 했던 것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였다. 남편 채털리 경은 성 불구였고,부인은 하반신 마비였지만 성(性)까지 마비된 것은 아니었기에 산지기 로렌스와 혼외정사를 갖는 것은 영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였다.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편지를 읽는다. "당신이 낚시 간 날 밤에는 외간 남자가 새벽까지 있다가 갑니다." 남편은 낚시 간다고 나갔다가 되돌아 가서 처용이 본 장면을 목격하고 처용같이 춤도 추지 않고,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것은 일본영화 '우나기'에서 였다.
"바람도 못 피우면서 아내한테도 못하는 놈"보다는 "아내한테도 애인한테도 잘 하는 것이 백 배 낫다"고 하는 것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하는 말이다.
남편이 대기업 임원을 하다 명퇴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 러브모텔을 임대 운영했던 어느 부인은 2개월 모텔창구에 앉아 있다보니 세상에 용서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60년대였던가,70년대였던가,어느 판사는 강간죄를 무죄로 선고하면서 이런 명판결을 내렸다. "법은 정조를 지키고자 하는 여자를 보호해주는 것이지 지킬 의사가 없는 여자까지 보호해 줄 의무가 없다"고.
# 안개 낀 처용암과 밤비 내리는 망해사지
다시 울산행 직행버스를 타고,택시,그리고 용연행 시내버스에 올랐다. SK 공장을 지나자 예전의 부곡마을은 흔적도 없었고 창문 틈으로도 풍겨오던 예전의 고약한 냄새도 5월의 신록 혹은 인간의 노력이 정화시켰는지 이제는 미세한 냄새로 바뀌었다.
처용암이 보이는 길에서 내려 아래로 내려서자 아직도 철거 안 한 두 집이 옛 마을임을 알려줄 뿐이다. 어떤 배들은 뭍에 올려져 있고 간이 선착장에는 물결에 빈 배만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는 앉아서 온갖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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