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7) 원효와 월정교
끊긴 다리 저편, 요석공주가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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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스님이 물에 빠졌다는,끊어진 월정교의 이쪽과 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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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 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
서라벌 거리를 다니면서 이렇게 외치는 스님이 있었다. 이 노래의 깊은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태종무열왕은 알았다. "대사가 아마도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그 이익이 막대할 것이다."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동서고금,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없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딸 요석공주와 원효를 짝지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관리를 시켜 원효를 데려오라 했고 원효도 울고 싶을 때 뺨맞는 심정으로 이 월정교를 건너다 짐짓 물에 빠져 옷을 말리려고 요석궁으로 인도된다.
드라이어,탈수세탁기가 없던 시절,옷 말리는 동안 요석공주와 불같은 사랑을 하였고 그 사랑의 씨앗은 신라 10현에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설총이 되었다. 이때부터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라 일컫고 속인의 옷을 입고 민중 속으로 돌아다녔다. 속좁은 욕정의 애욕이 아니라 성과 속을 뛰어넘는 해탈의 경지였다.
나는 지금 신록이 무성한 5월의 푸름을 안고 남천이 세차게 흘러가는 그 옆의 끊어진 월정교에 섰다. 서산에는 아주 잘익은 엷은 선홍빛 둥근 해가 말 못할 사랑을 안고 넘어가고 있다. 그 옛날 원효도 해 넘어가는 어스름한 저녁에 가슴 일렁이는 사랑의 정토를 안고 이 월정교에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같이 거대한 흔적의 월정교는 8세기 중반 경덕왕 때 쌓은 것이고 원효가 건넜던 7세기 중반 때의 다리는 이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월정교를 복원한다는데 신라시대만큼 해낼지 염려된다. 대충 모아놓은 석재들만 보아도 그 크기에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아무도 없는 월정교에서 나 홀로 이리저리 풀섶을 헤집고 둘러보았다. 향긋한 찔레꽃 향기가 가슴에 안긴다. 바위 위에는 한 남자와 두 여인이 보이기에 방해할까 싶어 가지 않으려다 좋은 사진 찍으려고 미안함을 무릅쓰고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언제 보았는지 자기들도 찍어달라며,발랄하다. 앳돼 보여 대학생인 줄 알았더니만 직장인이란다. 남자 같이 보이던 사람도 여자였다. 신라 여인들이 이랬을까. 신라 고려시대 여인들은 꼭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요즘의 여인 같았을 것이다. 아니 요새 여인들이 신라,고려시대 여인 같다.
열심히 노력해 아름답게 살라하고 언덕길을 올라오니 밤·아카시아 꽃 향기가 얼굴에 스치는데 온 몸을 울린다.
# 요석공주 품은 원효는 누구인가
요새같이 극존칭을 남발하는 시대에 큰 스님 아닌 스님 드물지만 1천600년 한국불교사에 랭킹 1위의 큰 스님은 뭐니 뭐니 해도 원효 스님이다. 앞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엄연히 원효는 요석공주를 품었고 몸짓 의사소통까지 하여 설총을 낳은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최고의 스님이라 할까.
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난 원효는 청춘의 절정인 29살에 스님이 되어 34살 때 새로운 구도처인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지만 고구려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가다 간첩 누명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된다. 이후 660년 신라가 백제를 통일해 신라 사람들은 중국 가기가 한결 쉬워졌다. 661년 다시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이미 인생의 쓴맛 단맛도 다 아는 40대 중반의 완숙기에 접어 들었다. 이미 요석공주와 영과 육을 넘나들었고 아이도 낳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도 온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8년 연하인 영원한 도반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서해안 남양만에서 유명한 해골물을 마시고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만물유심조(萬物唯心造)를 깨닫고 의상은 배에 올랐지만 원효는 신라로 돌아와 버린다.
원효는 계에 대해서도 "계(械)란 그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기에 결코 독자적인 모습이 없는 것이다"고 명쾌하게 말했다.
그는 민중 속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일정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지도 않았다. 또 A급 출신이 못되는 신분의 제약 때문에 국찰 황룡사나 감은사 같은 데는 주석하지 못하고 고선사,분황사,반고사,항사사(오어사),혈사 등등의 외곽에 머물러야 했다. 그것이 오히려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게 했으며,배우지 못해도 부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정토사상과 거리낌 없는 무애사상으로 싹틔워졌을 것이다. 잘난 친구는 의상 정도뿐이고 대개가 사생아,장애인,과부 아들에다 노비출신으로 사복이 혜공 대안 염장 등 별 볼 일 없는,그러나 일가를 이룬 아웃사이더들이 원효와 어울린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왜 원효인가.
원효는 유학도 가지 않았고 출신도 안 좋아 온갖 구설수와 송사,시기와 질투를 받아으면서도 그 모든 걸 묵묵히 수용했다. 그러나 실력이 안 되면서 거지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무애'였다면 원효도 별 볼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당대의 토익,토플을 완벽하게 공부한 유식한 유학승들도 못 풀어낸 금강경을 처음 보고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풀이해 설법을 듣는 모두를 감탄하게 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못난 사람은 큰 스승 밑에서 배우면 어느 정도는 클 수 있지만 큰 사람은 큰 스승 밑에 가면 교조적으로 빠지거나 자기 성장을 하지 못한다. 말로만 청출어람이지 스승이 내버려 두지 않고 다른 제자들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지금도 못난 선생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제자는 절대 키워주지 않는다. 원효는 선생 밑에서 선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득하여 일가를 이루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 요석궁의 흔적과 속세의 삶
청상과부가 된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은 어디일까.
월정교 다리 옆에 요석궁음식점은 이름만 빌려온 것이고 지금 한창 사랑채를 복원하고 있는 최부잣집 자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마 공주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바로 속세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고 궁에서 아기를 낳고 원효가 주석하던 분황사 근처의 민가로 옮겨 살면서 불쑥불쑥 어쩌다 한번씩 들르는 원효를 대신하여 영리한 설총을 숙명으로 삼아 잘 키웠을 것이다.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었다는데 분황사 서쪽 어디메쯤이거나 황룡사 남쪽 미탄사지 근처일 것이다.
꽃 향기 짙어갈수록 밤은 익어가고 수 많은 개구리 입 맞추어 사람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