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역사 바로알기

경덕왕과 표훈대사

고양도깨비 2007. 3. 28. 18:47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8) 경덕왕과 표훈대사
아들 바라던 세속 욕심 찔레꽃향에 덧없이 지다 


찔레꽃 향기 산천을 울리고.

 

 
# 경덕왕 그 화려한 클라이막스

경덕왕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이 떠올라도 그가 누워있는 경덕왕릉을 잘 모르는 것은 우리들이 무엇이든 총체적인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항상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 나면 잘 난 대로 못 나면 못 난 대로 자기 만의 영광과 상처가 있듯이 국가도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신라는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로마 다음으로 두 번째 긴 왕국을 이어온 것이다. 그 천 년 긴 역사에서 가장 절정일 때가 이 경덕왕 때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완성했고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고 있었으며,신라 최대의 석교(石橋)인 월정교와 일정교를 완성했다. 그러나 클라이막스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끝인 것이다. 이때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신라 하대가 시작된다. 그래도 쨍하던 한 번의 영광일지언정 개인은 행복한 것이고 국가는 찬란한 것이다.

뻐꾸기가 맑게 울고 새들이 지저귀는 때 집을 나섰다. 논 썰고 모내기하는 기계음 속에도 하늘은 맑았고,바람은 흔들려 풍경소리 은은하게 울린다.

포석정,삼릉 숲을 지나 내남면 부지마을로 접어들었다. 내남초등학교를 지나 마을 정자나무를 이정표 삼아 오른쪽 야트막한 산 오솔길 올랐다. 5월 막바지의 신록은 무르익을 대로 익었고,드문드문 하얀 찔레꽃은 왜 이다지도 향기롭고 순정을 다 바치는 여인 같은지….

# 경덕왕의 아들 집착의 과욕

야트막한 산길로 오르니 소나무들이 제법 운치있게 분위기를 돋우며 맞이하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휘어진 소나무들이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경덕왕릉을 굳건하게 지켜주고 있는 듯했다. 바르게 쭉 오르는 경사진 숲길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경덕왕 때 신라의 클라이막스를 연상케 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의 옥경 길이가 24㎝에 달했으며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억지 떼를 썼다는 장면을 재미있게 기록해 놓았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첫 왕비 삼모부인을 폐하고 만월부인을 둘째 왕비로 정한다. 또 자식이 없자 표훈대사를 특사로 하늘에 보내 억지 방법을 통해 겨우 딸 하나 점지받았지만 또 떼를 써서 아들 하나를 얻는다.

이 경덕왕이 우리시대 같으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

우리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70년대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박혀 남자 아이를 낳으려고 딸이 몇 명이라도 계속 낳았다. 그래서 구호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는데 80년대에는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 했다. 이처럼 3명 이상을 낳으면 미개인 취급을 당하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지금은 많이 낳으면 국가발전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온갖 혜택을 다 준다. 200여 년 전 다산 정약용이,살기 힘든 데다가 아이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니 견디다 못해 한 남자가 자기 남근을 낫으로 잘라버리는 끔찍한 장면을 '애절양'이라는 시에 써 놓았을 정도로 아이 낳는 것에 대한 생각은 그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 불과 40년 전인 1960년대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식의 무시무시한 구호는 2000년대에 와서 '아빠,엄마! 혼자는 싫어요'로 빠르게 변해버리는 예측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지난 2005년 우리나라에 4만800명이 태어났지만 낙태한 아이도 35만명을 넘었다. 1.08명의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재앙을 막자는 지금,경덕왕을 욕할 수도 없다. 적어도 90년대까지 캠페인은 '아들 바람 부모세대,짝궁없는 우리 세대'였기 때문이다.

하늘의 천제를 만나고 온 표훈대사는 딸 하나는 되겠는데 아들은 안 된다 했다. 경덕왕은 한 번 더 재촉한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나라에 가서 졸라대니 천제는 점잖게 말한다. 천기를 누설했으니 다시는 하늘나라에 오지 말라고.

결국 아들 하나는 얻었으나 그 아들은 8세에 등극하여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혜공왕이 된다. 이때부터 신라는 죽이고 죽이는 신라 하대의 시작이었고 표훈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없었다 했다.

우리시대라고 다를 것이 없다. 아들을 101% 잘 맞힌다는 부산의 어느 도사(?)는 무조건 아들이라 점지하는데,아들 낳은 사람은 온 동네방네 용하다고 소문내고,딸 낳은 사람은 창피해서 주위에 말도 못하니까 100% 맞추는 기막힌 사기를 칠 수 있었단다. 아직도 경주,영천에 ○○한의원,서울의 ○○병원이 아이 못 낳는 사람에게 점쟁이 역할을 하는 나라다.

중국의 성서(性書)에는 '정액이 차갑고 몸이 부실한 남자,음탕하고 방종한 성격의 남자'와 '천성적으로 음탕하고,자궁이 냉한 여자'인 부부는 화목하지 못하고 질투와 증오로 흥분해서 관계를 맺으면 자녀를 갖지 못한다고 했는데….

# 찔레꽃 향기 온몸에 스며들고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자 외롭게,그러나 위엄있게 경덕왕이 턱 버티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왼쪽 모퉁이에 내가 좋아하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왕릉을 잠깐 바라보고는 나도 모르게 발길이 찔레꽃 쪽으로 가고 있었다. 경덕왕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았을 때,내가 지금 그 왕릉의 잔디에 앉아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만큼 행복했을까. 아들이란 무엇인가,또 행복이란 무엇인가….

조용히 뻐꾸기가 운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은 어찌하나. 천천히 왕릉을 둘러 보았다. 난간돌이 줄줄이 서 있고 12지신상은 빈틈없이 왕을 근접 호위하고 있었다.

저 멀리 고속도로에서 차 소리가 새 소리를 압도하여도 말 없는 찔레꽃 향기가 차 소음을 제압해 버린다. 사방 온 천지는 푸른 신록만 꿈틀거리고 하얀 찔레꽃 향기가 외롭게 흐르는 곳에 경덕왕을 남겨둔 채 나는 다시 사랑과 미움이 함께하는 냉정을 넘어 냉혹한 현실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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