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공원에서 말끔한 포장도로를 타고 백골 저수지 쯤에 이르렀다. 백골 저수지는 그 흉한 이름과는 달리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한층 푸르렀다. 잔잔한 수면위에서 유영하는 청둥오리들, 수면을 콕콕 찍으면서 부서지는 햇살, 길게 머리를 풀어헤친 갯버들이 점점 다가오는 봄기운에 젖어들고 있었다. 봄기운은 찼지만 힘이 넘쳐흘렀다, 아직은 햇살에 덜 뎁혀진 땅이 간혹 굳어있는 듯 팍팍한 느낌이 들었으나 소리 없이 톡톡 터지는 꽃망울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산자락의 밭에도 팔을 걷어붙인 농부들이 일을 하느라 한창이다. 더러는 거름을 내고 더러는 땅을 뒤집으며 다시 농사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봄을 즐거워 하는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산새들의 목청도 한껏 들떠있다. 푸른 나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처럼 시끄럽다. 심심하면 걷는 도로가 오늘은 발걸음이 더 가볍다.
포근한 햇살을 받아 늘어진 개나리들이 병아리의 노란 부리처럼 삐죽삐죽 불거져 곧 터질 듯하다. 개나리가 톡톡 터져 앙증맞은 꽃을 벌리면 다른 꽃들도 모두 제 자랑을 한다.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어느 순간 꽃을 터뜨려 내 얼굴에 웃음을 돌게 한다. 그러나 꽃은 요술을 부려 화들짝 피어난 게 아니라 얼마 전부터 그렇게 꽃을 피워 물었던 것이다. 내가 미리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바닥에 착 엎드려 있으니 허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꽃들이다. 눈을 비비고 봐야만 보이는 꽃들도 제 나름대로 삶을 구가하는데 하물며 나 같은 존재는 언제쯤 꽃을 피워야 할지 막막 하다기만하다. 나에게 꽃은 희망일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아직도 다가오지 않았다.원래부터 희망은 없는 것처럼 모든 게 아득하기만 하다. 차라리 민들레처럼 갓털이라도 있다면 머나먼 곳으로 날아가 그 곳에 새 땅을 일구고 싶다. 희망을 피워 올릴 새 땅, 과연 그런 곳이 있을까. 돌아보면 박토뿐인 땅, 하룻밤 자고나면 비리로 썪어 가는 땅, 서럽다고 앙가슴 땅땅치는 땅, 눈물 마를 새 없이 또 다시 추위가 몰아치는 땅, 그러나 눈물 많은 땅위로도 서럽게 날아가는 씨앗들이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쌩쌩 부는 바람을 치받아 산 너머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난 그것이 박주가리 씨앗이란 것을 알았다. 밭둑의 나무에 올망졸망 매달려있는 박주가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농부의 양해를 구해 밭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농부는 속으로 찰 할 일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할지 모른다.
남들은 바빠서 난리인데 할 일 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심통을 부릴 런지 모른다. 그러나 농부의 눈으로는 할 일 없어 보여도 농사짓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 농부는 농사짓는 게 업이고 나는 사진을 찍고 글 나부랭이를 글쩍이는 게 업이니 말이다. 내가 박주가리를 처음 만난 건 식장산의 식장사 앞에 서였다. 봄날이면 꽃을 터뜨려 절의 단청보다 더 짙은 색깔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박주가리, 얼마나 드센지 한해가 다 지난 지금까지 바삭 마른 줄기를 배배 꼰 채 박주가리를 매달고 있었다.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 올망졸망 매달려 있는 모습이 꼭 한 무리 새떼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의 참새 떼처럼 눈물 나도록 정겨웠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새떼들의 모습은간 데 없고 누런 칼조개처럼 아가리를 떡 벌리고 씨앗을 총총 박고 있었다.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들어앉은 씨앗들, 곧 날아갈 준비태세를 취하고 있는 폼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전사들 같았다.
그 씨앗들을 날려 본 게 오늘이었다. 햇살부신 밭에 앉아 사진을 찍고 나서 어린아이처럼 씨앗들을 날려 보았다. 칼조개 같은 껍질을 완전히 벌리고 끄집어 낸 씨앗들은 빗으로 빗어 넘긴 것처럼 찰고 기름졌다. 둥글고 납작한 씨앗에 매달린 솜털이 바람이 불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낙하산이 따로 없었다.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민들레 씨앗처럼 술술 날아갔다. 그러나 몇 발자국 날아가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몸이 무거워 그런지 아니면 제 어미와 멀리 떨어져 살기 싫어 그런지는 몰라도 박주가리는 풀풀 날아가다가 떨어졌다, 나는 박주가리와 잠깐 놀다 고갯마루를 넘어 윗사정골로 넘어갔다. 윗사정골은 시골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겨울을 넘긴 밭은 거름 푸대와 페비닐이 일렁거렸고 무너질 듯한 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동물원이다. 내가 동물원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제 아이들도 성인 되어 찾아갈 기회가 없어 그동안 동물원을 마음 속에만 넣어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왕조의 궁전처럼 말쑥하게 꾸며진 건물, 빽빽이 들어찬 승용차들, 동물원은 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까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건 꽃바람 쐬러 나온게 아니던가. 싱그러운 봄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맛도 일품이지 않던가. 도로 아랫쪽으로 상당마을이 보였다. 작년 도로변 텃밭에서 고구마꽃을 찾아낸 마을이다. 웬만해선 꽃을 터뜨리지 않는다는 고구마꽃, 나팔꽃같은 그 선명한 빛깔로 깊이 내 마음에 각인된 마을, 올해도 고구마 꽃이 피어날까. 고구마꽃이 피면 가정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갓털을 단 박주가리 씨앗처럼 멀리 날아 새 땅에 알찬 희망 터뜨릴 날이 있을까. 터벅터벅 걷는 내 머리위로 하얀 갓털을 단 씨앗 하나가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보나마나 박주가리 씨앗이다. 그 씨앗이 내려앉는 곳에 다시 새순이 트고 줄기가 나뭇가지를 휘감고 올라 꽃을 팡팡 터뜨릴지 모른다. 식장사의 단청처럼 선명한 박주가리꽃이 피어 온 산야를 붉게 물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