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꽃잎을 열어젖힌 동백꽃을 보았다.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지겹게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더니 오늘에야 봉긋하던 꽃잎을 살짝 열어젖혔다. 선홍색 꽃잎 속에 화염처럼 들어앉은 꽃술들, 화르륵 불이 붙을 것만 같다. 어렵사리 꽃을 피운 나무가 동백의 화염에 타올라 모조리 다 타버릴 것만 같다. 간이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에도 막상 동백꽃을 대하고 있으면 왜 그리 애틋한 마음이 남아있는지, 아, 그건 2년 전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주먹 만한 눈송이들이 풀풀 떨어져 봄이 오는 길목을 뒤덮어버렸던 그 날, 어렵사리 피운 봄기운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눈에 묻혀버렸던 그 날, 100년만의 폭설이라며 언론들이 떼지어 한 숨 반, 호기심 반으로 그 소식을 전해주던 그 날, 주변을 밝힐 듯 빨갛게 꽃잎을 터뜨린 동백, 회사의 화단에 달랑 한그루만 서있던 동백나무가 무거운 눈을 얹은 가지에 동백꽃 몇 송이를 물고 있었던 것이다. 볼이 터지도록 빨간 꽃잎, 선혈보다 더 빨간 꽃잎, 눈송이가 녹으면 함께 져버릴 것 같은 꽃잎, 그 꽃잎을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끈질긴 인내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인내다.
동백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 것처럼 한 송이 동백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꽃샘추위가 몰아친 것일까. 꽃샘추위가 몰고 온 폭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싹 타게 만들었다. 꽃샘추위와 폭설 속에 피어난 꽃, 이걸 보면 영락없는 겨울 꽃이다. 그런 동백이 봄에 꽃을 터뜨렸다. 두툼한 꽃받침에 둘러싸여있던 봉긋한 꽃봉오리가 오늘 꽃잎을 툭툭 터뜨린 것이다. 3월도 끝나가고 4월로 접어들 무렵, 쌀쌀한 겨울 한기는 물러나고 봄기운이 햇살을 받아 땅거죽이 물러 터지던 날이었다. 작년과 2년 전엔 겨울 뒤끝에 꽃을 피우더니 올해는 왜 봄에 꽃을 터뜨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동백은 여자처럼 변덕이 심한 꽃이 아니다. 필 듯 말 듯 하다가 계절을 놓쳐 그런 것일까. 아마 누구를 기다리느라 꽃 피울 시기를 놓쳐버린 것일까. 겨울을 애써 피하고 봄에 살짝 꽃잎을 열어젖힌 이유라도 있을까. 갑자기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생각났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 노랫 가사에 5공 독재정권은 금지곡의 딱지를 붙였다. 도대체 그렇게 지쳐가며 무엇을 기다렸단 말인가. 민주화를 기다린 것이 자명하겠지만 노랫가사에도 금지곡의 딱지를 붙여야만 하는 독재정권이고 보면 선홍빛으로 불타는 동백꽃이 과연 무섭기는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독재정권도 무서워하는 동백이지만 시인들은 그런 동백을 향유하며 즐겼다.
금방 지는 동백꽃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최영미, 선운사에 놀러가서 피지않는 동백꽃대신에 막거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노래가락만 들은 서정주, 동백꽃에서 사자의 형상을 본 송찬호가 그렇다. 동백나무를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거울 앞에 앉아있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거울 앞에 선 국화 같은 누님이 아니라 햇볕 쨍쨍 퍼붓는 날, 허리가 부서지도록 일만 하다 호미 같은 손으로 쪽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잠시 거울 앞에 앉아있는 여인, 어머니 같은 여인이 생각나 잠시 슬픔에 젖기도 한다. 그것은 동백나무 열매에서 짠 동백 기름이 연상되어 그런지는 모르겠다. 동백나무 열매는 동박새가 수정을 한다. 벌, 나비가 날지 않는 겨울에 게화하는 관계로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던 동백새가 꽃가루를 옮겨 수정을 시켜준다. 동백꽃에도 다른 이름이 있다.
문일평의<화하만필>에 보면 산다화와 춘, 해홍화로 불려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태백 시집에도 “해홍화는 신라국에 자라는데 꽃이 매우 선명하다”고 했다. 또 《유서찬요>에는 “신라국의 해홍화는 곧 산다를 말한다. 12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이듬해 2월 매화가 필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다매라고도 한다.)”고 했다.
<지봉유설>에는 “꽃이 큰 것을 산다 라 하고 작은 것을 해홍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백은 낙화할 때는 정말 차갑고 모질다. 모가지 뎅강 꺾어 드러눕는 모양을 모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소설가 김훈은 “백제가 무너질 듯 절정에서 추락해 버린다” 고 쓴 것처럼 동백이 떨어지는 그 순간을 한나라가 망하는 것에 비유했을 정도로 동백의 낙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비장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벚꽃처럼 꽃잎을 색종이처럼 흩날려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장미처럼 그 자리에서 지는 것도 아닌 통째로 모가지 툭 꺾어 떨어지는 그 처연함에 눈물이 시큰하기도 한다. 동백의 전설속에 있는 청년과 처녀의 구슬픈 사랑또한 처연하기는 마찬가지다. 남국의 한 청년이 사랑하는 처녀에게 동백나무 열매를 갇다준다고 약속을 했지만 청년은 오지 않고 처녀는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 처녀가 죽은 줄도 모르고 늦게 찾아온 청년이 처녀의 무덤앞에 동백나무 열매를 뿌리고 사라졌는데 그 열매가 자란 나무에서 핀 꽃이 바로 동백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