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를 신호로 매화와 동백이 꽃잎을 터뜨렸다. 잔뜩 꽃망울을 닫아 건 것들이 언제쯤 꽃망울을 피우려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환하게 꽃잎을 열어젖혔다. 병아리 노란 부리처럼 삐죽삐죽 꽃망울이 튀어나온 개나리들은 곧 터질 듯 하고 진달래도 연분홍 마음을 열어젖히려고 애를 태웠다. 그 틈에 민들레도 노란꽃술을 열었고 제비꽃도 자주빛 꽃을 살랑거렸다. 정말 눈 깜짝할 순간이다. 며칠 전만 해도 서글픈 풍경이었는데 하룻밤 새 주변을 알록달록 꽃물을 들이는 걸 보면 변덕스러운 것은 봄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꽃잎이 넓고 탐스러운 꽃만 있는 게 아니다. 눈 씻고 정신을 바싹 차리지 않으면 좀체 찾아낼 수 없는 꽃들도 있다. 큰 것과 작은 것들, 탐스러운 꽃과 볼품없는 꽃들이 함께 어울려 공존하는 계절이 바로 이 봄날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노란 꽃들이 대세다. 눈 속에 확 들어오는 색깔은 뭐니뭐니해도 노란 물결이 주류를 이룬다. 일찍 노란 꽃망울을 뿌린 산수유도 그렇고 낭창낭창 가지를 늘어뜨린 개나리들도 서로 질세라 노란 물을 뿌리고 있다.
개나리는 볼 때마다 정이 느껴지는 꽃이다. 철없던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그 색깔이 너무 강렬하게 내 마음에 입력된 탓이기도 하다. 지겨울 정도로 흔하게 흩어져 있다 보니 개나리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밭둑이나 시골길 주변에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다닥다닥 꽃들을 매달고 있는 개나리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그 개나리들을 꺾어 왕관을 만들기도 했다. 유연한 가지를 동그랗게 오무려 머리에 쓰면 다복이 매달린 꽃들이 얼굴에 일렁거렸다. 그 왕관을 쓰고 개선장군처럼 집에 가던 일은 한 장의 풍경사진처럼 내 마음에 오래 오버랩되었다. 개나리는 몸살 나게 예쁘지도 않고 향기는 없지만 낭창낭창 꺾여질 듯한 유연한 허리가 시골처녀의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개나리 처녀란 노래만 들어도 개나리의 노란 꽃물이 하늘로 퍼져 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개나리 처녀가 아득한 옛날 인도의 공주로 연상되어지는 것은 웬일일까. 지독하게 새를 좋아해 세상의 새들은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령한 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새를 잡는 일에 지쳐 농부들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자 왕이 공주에게 새 잡는 일을 중지시켰던 어느 날, 목소리가 곱고 일곱 빛깔이 감도는 새 한 마리를 가지고 온 노인이 있었다. 공주는 그 새를 애지중지 길렀으나 나중에 색깔이 바래 알고 보니 까마귀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눈을 감고 말았다. 그 공주의 무덤에서 피어난 꽃, 그 꽃이 바로 개나리다. 그러나 개나리는 처음엔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과거를 보러간 개똥이란 선비가 다복하게 핀 개나리 옆에 졸다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노란 옷을 입은 공주가 나타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잠을 깬 선비는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을 했는데 그 순간 어머니가 했던 “개 나들이간다”라는 말이 떠올라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이름이 변해 개나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황당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하찮은 꽃에도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꽃을 사랑한 선비이고 보면 개나리꽃이 귀하게 보여 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흔한 개나리지만 시에도 많이 등장한다. 기형도의 “나리나리 개나리”와 도종환의 “개나리꽃”이 있는가 하면 나태주의 짤막한 시 한편을 들으면 마음이 노란 물을 들인 듯 벅찬 감흥을 일으킨다.
개나리 꽃대에 노랑불이 붙었다. 활활.
개나리 가늘은 꽃때를 타고 올라가면
아슬아슬 하늘 나라까지라도 올라가 볼 듯 …
심청이와 흥부네가 사는 동네 올라가 볼 듯 …
개나리꽃대에/나태주
아무리봐도 열매가 맺혀질 것 같지 않는 개나리도 열매를 맺는다. 특히 열매는 한방에도 쓰이는데 한열, 발열, 화농성 질환, 종기, 신장염, 습진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꽃잎으로 담근 술을 개나리주라고 하고 햇볕에 말린 열매를 술에 담가 잘 저장해 둔 것을 연교주라고 하니 별 쓸모 없는 꽃으로 알았던 개나리도 새삼 다시 보이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나리는 따스한 햇볕을 받아 병아리 부리 같은 노란꽃을 삐죽삐죽 내밀고 있다. 산수유를 선두로 목련, 매화가 자리다툼을 벌이는 와중에도 개나리는 혼자 노란 꽃물을 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