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위가 매서워 집안에만 죽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혹시나 봄이 왔을까 싶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을 나섰다. 무작정 마음이 시키는 데로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꽁꽁 언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나무를 보려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폭설과 꽃샘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겨울 산의 한 가족이 되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저 추위에 견딘 힘이 봄날 싱그러운 잎과 열매를 달아주는 자양분이 되리라. 외딴 집의 뿌연 연기와 올망졸망한 다랑이 밭들이 펼쳐진 백고을의 정경을 보니 아직도 봄이 오려면 한참이나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한 기분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산자락의 그늘이 더욱 더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아, 그러나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살을 깎을 듯한 냉혹한 추위에도 살아남아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었다. 생명이라곤 전부 쓸어버린 것 같은 냉혹한 겨울 추위도 이것만은 손을 댈수 없었다. 묵은 솔잎이 두툼하게 쌓인 산자락을 따스한 불빛처럼 비추고 있는 저 것은 분명 망개 열매였다. 망개 열매, 이름을 불렀더니 마음속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뒷동산에 올라 숨바꼭질을 할 때 망개나무 뒤에 숨곤 했던 기억이 났다. 뻣뻣한 잎들이 얼키설키 손을 뻗은 망개나무도 몸을 숨기기에 더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빨간 열매를 쓰다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만 술래잡이에게 들켰던 일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아득한 시절에 보았던 망개 열매를 오늘 처음으로 만났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런지 망개열매의 붉은 빛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색이 바래지 않는 청순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러나 망개나무가 청미래 덩굴이란 고운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는 사실도 얼마전에야 알았다.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계란을 닮은 잎과 가시와 덩굴손이 달린 줄기는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꽃꽂이 재료로도 인기를 끌었다. 청미래 덩굴 말고도 경상도에서는 명감나무, 황해도에선 매발톱가시, 강원도에서는 참열매덩굴, 전라도 지방에서는 명감나무, 종가시덩굴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 지기도 했다.
다양한 이름 만치 여러 가지 병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 종기, 악창, 피부염, 신장염, 간경화는 물론 매독에도 효과가 좋다. 한약명은 토복령이고, 남편을 산에서 돌아오게 했다고 해서 산귀래, 산 속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구황식물로 대용했다고 해서 경반, 신선이 물려준 음식이라 하여 선유량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요법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망개 열매라도 그 빛깔을 보면 웬지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망개열매 뿐 아니라 빨간 열매는 다 그렇다. 분단이 갈라놓은 50년동안 좌, 우로 등을 맞대고 살아온 지겨운 이념 때문이다. 빨간 색을 상징하는 좌의 이념이 아무리 매정하고 무섭다고 해도 열매에겐 그런 이념의 색깔을 씌우지 말자. 제 홀로 빛깔에 취해 산을 빨갛게 물들이는 열매에 그런 편견을 갖다 붙이지 말자. 열매는 어디까지나 열매로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