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잃어버린 문화재

조선왕조실록의 비극

고양도깨비 2007. 3. 10. 01:42
 
‘떠돌이’ 조선왕조실록의 비극
[뉴스메이커 2006-03-16 16:06]
 
도쿄대에 남아 있는 ‘오대산 사고본’은 한국 근대사 혼란의 현주소

비둘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 타버렸다. 중종 33년인 1538년 실록을 보관하던 성주 사고에 화재가 나 여기에 있던 실록이 모두 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중종실록의 34년 1월 14일 기사에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내용이 나와 있다. “관노(官奴) 종말(從末)과 그의 아들 말이(末伊) 등이 사고(史庫)의 누각 위 중층(中層)에 산비둘기가 모여 잠자는 곳에서 불을 켜들고 그물을 쳐서 비둘기를 잡다가 불이 창 틈으로 떨어졌고 비둘기 둥우리로 인하여 불이 났는데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걷잡을 수 없이 타버린 일로, 세 차례 형신을 받고서 승복하였다.”

비둘기 때문에 그동안 보관돼 오던 실록이 타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실록은 경복궁내 춘추관 사고 외에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에 있는 사고에 보관됐다. 성주 화재로 각 사고에 보관된 4부의 실록 중 한 부가 모조리 없어졌다.

왜란, 일제강점, 6·25 거치며 ‘유랑’

비둘기를 잡으려다 타버린 조선실록의 수난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선 왕조의 역사가 낱낱이 기록된 실록은 나라의 험난한 역사 만큼 수난을 당했다. 왜란과 호란, 내란, 일제강점, 6·25전쟁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실록의 수난사는 지금까지 마무리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넘어간 오대산본 실록이 도쿄대 도서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남은 책이다.

월정사와 봉선사 등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는 3월 3일 도쿄대에 소장중인 오대산 사고본 실록 46책을 반환하라고 일본에 요청했다. 계명문화대학 배현숙 교수는 1984년과 1988년 도쿄대 소장 오대산 사고본을 확인, 조사했다. 도쿄대에는 성종실록 9책, 중종대왕실록 29책, 선조소경대왕실록 8책 등 모두 46책이 남아 있다. 배 교수는 “그 전부터 도쿄대에 오대산 사고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논문 작성을 위해 협조를 얻어 직접 도쿄대에서 실록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도쿄대에 현재 46책만 남아 있는 오대산 사고본의 수난사는 한국 근대사의 수난과 맥락을 같이한다. 임진왜란으로 4곳의 사고 중 전주를 제외한 3곳의 사고가 모두 불타자, 임진왜란 후에는 태백산·정족산(강화도)·오대산·적상산(무주) 등 4곳에서 보관됐다.

한일합병 전까지 그나마 온전하게 보존되던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가 호시탐탐 노리는 약탈대상 문화재가 됐다. 국사편찬위 임천환 사료연구위원은 “일제가 우리나라와 일본이 같은 뿌리라는 내선일체 사상을 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기본적인 사료를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면서 “실록이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일제의 무라우에(村上) 궁내부 사무관의 건의로 한일합병 후 정족산·적상산·태백산 사고본이 서울로 운반돼 조선총독부에서 접수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으로 건너가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1909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오대산 사고에는 철종까지의 실록 761책, 의궤 380책, 기타 서책 2469책 등 모두 3610책이 보관돼 있었다. 동양사학자인 도쿄대 시로도리(白鳥庫吉)교수는 조선 총독에게 실록 이관을 요청, 허락을 얻어냈다. 임 연구위원은 “오대산 사고본이 온전하게 보존돼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대산 사적’에는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께구찌(桶口) 그리고 고용원인 조병선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교로 직행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실무간사인 월정사 법상스님은 “당시 일제가 오대산에 나무를 많이 벌목해 주문항으로 반출했다”면서 “실록 역시 이 경로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1913년 11월 도쿄제국대학으로 실록이 이관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쿄토제국대학에서도 조선 총독에 기증을 희망했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조선에 남아있던 실록조차 침탈될 위기였다. 도쿄대로 넘어간 실록은 ‘타지’에서 또 한 번 수난을 당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실록이 모두 불탄 것. 당시 조선인들이 대학살의 대상자가 됐던 점을 볼 때 실록의 불운이 나라의 운명과 같은 궤적을 밟았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 연구실에 대출된 73책이 화를 피했다. 이중 27책은 1932년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오고 46책이 여전히 도쿄대에 남아 있다. 당시 어떤 이유로 27책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는지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73책만 남아

오대산 사고본은 다른 사고본과는 달리 교정본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임 연구위원은 “임진왜란 후 남은 전주 사고본을 정리하면서 교정한 오대산 사고본은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실록 교정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면서 “붉은 글씨인 주서와 검은 글씨인 묵서를 통해 조선시대의 교정부호, 교정기법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배현숙 교수는 3월 1일 한 방송사와 함께 도쿄대에서 이 실록을 다시 확인했다. 배 교수는 “일본이 식민통치 당시 임의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월정사 법상스님은 “도쿄대 도서관 소장 실록을 반드시 환수해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선실록은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묘왜란 때에도 소실될 위기를 겪었다. 바람 앞의 등불이던 나라의 운명과 함께 했던 것이다. 배 교수는 “실록이 나라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역시 “실록이 국란과 관련이 많다”면서 “임진왜란이 실록에 있어서 최대 참화”라고 설명했다.

임진왜란 당시 실록의 사고는 경복궁내 춘추관 외에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 등 네 곳에 있었다. 4곳의 사고는 모두 외딴 곳이 아닌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다.

경상도 성주 사고는 왜란 초기에 왜군이 몰려와 불에 탔다.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땅에 파묻었으나 결국 발각돼 태워졌던 것. 임천환 연구위원은 “당시 왜군은 건물·문화재·서책 등을 모조리 불태웠다”면서 “실록 역시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서울로 가는 길목에 놓인 충주 사고 역시 왜군에 의해 모두 타버렸다. 특히 충주사고는 고려 때 만들어진 사고였던 만큼 고려 이후의 서책들이 모두 없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경복궁 안에 있던 춘추관 사고는 흥분한 백성들이 불태웠다. 임진왜란 때 실록 뿐만 아니라 승정원 일기까지 대부분 소실됐다. 국왕이 세상을 떠난 다음 정리한 실록이 2차적 자료라면 승정원 일기는 역대 국왕의 하루 일과, 상소문 등이 그대로 씌어 있는 생생한 1차적 자료. 당시까지 기록된 승정원 일기를 잃게 됐다.

“10여 년 동안 무려 2000여 리 여행”

실록의 운명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전주 사고본으로 겨우 유지됐다. 왜군의 한 갈래가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의병장인 고경명이 왜군의 진격을 늦췄다. 시간을 번 전주의 관리들이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검토했다. 배현숙 교수는 “당시 실록은 국왕과 동격으로 신성시하던 것”이라면서 “전란이 터지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대상이었다”고 설명했다.

땅에 묻었다가 발각된 성주 사고본의 예 때문에 당시 관리들은 이 방법도 쓸 수 없었다. 관리들은 깊은 산 속으로 이관하는 방법을 택했다. 전란중이라 관리의 힘 만으로 불가능해지자 태인에 살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자원해 내장산 은봉암으로 실록을 옮겼다. 옮겨진 실록은 모두 805권 614책에 달했다. 고려사까지 포함해 모두 63상자에 이르는 서책을 수십마리의 말에 실어 내장산으로 옮긴 것이다.

실록은 내장산 은봉암에서 내장산 비래암으로 옮겨 1년 동안 보관했다. 하지만 1593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한 후 남원에 이르자, 내장산 역시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육로를 통해 아산, 해로를 통해 해주로 옮겨졌다가 강화도에 안착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실록은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표현에 의하면 전주 사고본 실록은 “10여 년 동안 무려 2000여 리를 여행”했다.

전란이 끝난 후 유일한 판본인 전주 사고본 실록은 재간행돼 춘추관 사고를 비롯해 오대산·태백산·적상산·정족산 사고에 보관됐다. 하지만 춘추관 사고는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전대 실록은 복구하지 못했고 후대 실록 역시 순조 때 화재로 잔본만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은 실록에 또 한번의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제가 모아 놓은 정족산·태백산 사고본을 광복 이후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었고, 적상산 사고본은 이왕직 장서각에서 소장한 상태였다. 서울대 소장 실록은 3차례에 걸쳐 부산으로 옮겨졌지만 이왕직 장서각에서 소장하던 적상산 사고본은 행방불명됐다. 이후에야 이 실록이 북한군에 의해 북한으로 이송된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