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잃어버린 문화재

북관 대첩비

고양도깨비 2007. 3. 10. 01:30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파죽지세로 함경도 연안을 타고 북진하고 있었다.
 
 북으로 피란가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 가 있는데 그곳에서 귀
 
 양살이하던 아전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숙질이 흑심을 품고 반란, 두 왕자를 묶어 가
 
 토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일본의 병사(兵使) 벼슬을 얻어 회령(會寧)과 경성(鏡城) 고을을 다
 
 스리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평사(評事) 벼슬의 정문부(鄭文孚)는 의병의 깃발을 올려 100여
 
 명이 피를 나누어 마시고 이 숙질을 비롯, 일본측에 붙은 육진(六鎭) 반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했다. 이에 민심이 결집되어 의병수가 7000으로 불어났고 게을러진 일본군의 퇴로를 막아
 
 섬멸하며 남하(南下), 가토 군의 정예가 지키고 있는 길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측 기록인 ‘고려진각서(高麗陣覺書)’에 보면 “길주성 이웃에 있는 장덕산에 포진, 공
 
 격해 온 정문부군을 성을 나와 요격하던 일본군은 밤이 되면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바람
 
 에성 안으로 퇴각했고 성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성 안의 일본군은 혹한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시탄(柴炭)과 채소 공급을 차단당하는 바람에 가토의 오른팔이 무력화되었다”고 했다. 패한 것
 
 은 인정했지만 추위 때문으로 돌리고 사상자도 밝히지 않았다. 당시 왜군 정예 1500 병력이 배 
 
 치돼있던 길주성을 시작으로 이룩한 북관대첩에 대한 조선측 기록인 ‘연려실기술’은 이렇다. ‘정
 
 문부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은 의병은 적을 장덕산 밑에서 만나 크게 파했고, 길주 장평에서 만
 
 나 습격해서 파하니 이웃 고을들에서도 수만 군중이 일어나 적을 협공 섬멸했다. 마천령 넘어가
 
 는 적을 추적, 단천 말티에서 세 번 싸워 거의 베어 죽이기도 했다.’

 


 
 난중의 북관 사정과 대첩사실을 적은 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이 굳이 약탈해간 것은 문화재로서
 
 보다 역사적 치욕을 은폐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대첩비를 전쟁 망혼들의 집합
 
 소인 야스쿠니 신사에다 버려둔 저의는 당시 북관에서 죽은 왜 병사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서였
 
 을지도 모른다. 그 버려진 대첩비의 뒤늦은 환국(還國)만도 다행인데 본래 서 있던 대첩의 땅 길
 
 주에 돌아가게 되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北關大捷碑)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파죽지세로 함경도 연안을 타고 북진하고 있었다.
 
 북으로 피란가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 가 있는데 그곳에서 귀
 
 양살이하던 아전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숙질이 흑심을 품고 반란, 두 왕자를 묶어 가
 
 토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일본의 병사(兵使) 벼슬을 얻어 회령(會寧)과 경성(鏡城) 고을을 다
 
 스리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평사(評事) 벼슬의 정문부(鄭文孚)는 의병의 깃발을 올려 100여명
 
 이 피를 나누어 마시고 이 숙질을 비롯, 일본측에 붙은 육진(六鎭) 반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
 
 했다. 이에 민심이 결집되어 의병수가 7000으로 불어났고 게을러진 일본군의 퇴로를 막아 섬멸
 
 하며 남하(南下), 가토 군의 정예가 지키고 있는 길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측 기록인 ‘고려진각서(高麗陣覺書)’에 보면 “길주성 이웃에 있는 장덕산에 포진, 공격
 
 해 온 정문부군을 성을 나와 요격하던 일본군은 밤이 되면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성 안으로 퇴각했고 성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성 안의 일본군은 혹한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시
 
 탄(柴炭)과 채소 공급을 차단당하는 바람에 가토의 오른팔이 무력화되었다”고 했다. 패한 것은
 
 인정했지만 추위 때문으로 돌리고 사상자도 밝히지 않았다. 당시 왜군 정예 1500 병력이 배치돼
 
 있던 길주성을 시작으로 이룩한 북관대첩에 대한 조선측 기록인 ‘연려실기술’은 이렇다. ‘정문부
 
 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은 의병은 적을 장덕산 밑에서 만나 크게 파했고, 길주 장평에서 만나 습
 
 격해서 파하니 이웃 고을들에서도 수만 군중이 일어나 적을 협공 섬멸했다. 마천령 넘어가는 적
 
 을 추적, 단천 말티에서 세 번 싸워 거의 베어 죽이기도 했다.’

 
 난중의 북관 사정과 대첩사실을 적은 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이 굳이 약탈해간 것은 문화재로서
 
 보다 역사적 치욕을 은폐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대첩비를 전쟁 망혼들의 집합
 
 소인 야스쿠니 신사에다 버려둔 저의는 당시 북관에서 죽은 왜 병사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서였
 
 을지도 모른다. 그 버려진 대첩비의 뒤늦은 환국(還國)만도 다행인데 본래 서 있던 대첩의 땅 길
 
 주에 돌아가게 되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