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
翩 翩 黃 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雌 雄 相 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 我 之 獨 외로운 이 내 몸은
誰 其 與 歸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翩 : 가볍게 날 편 雌 : 암컷 자 雄 : 수컷 웅 依 : 의지할 의 念 : 생각 념 誰 : 누구 수 與 : 더불어 여 歸 : 돌아갈 귀 |
● <황조가> 배경 설화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즉위 2년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가 세상을 떠나매, 왕은 다시 두 여자를 맞아 계실로 맞았다. 그 하나는 골천 사람의 딸 화희였고, 또 하나는 한나라 사람의 딸인 치희였다. 이 두 여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왕은 할 수 없이 동서 두 궁궐을 지어 따로 살게 하였다.
한번은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어 화희가 치희를 욕하되,
"너는 한나라 비첩(婢妾)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제 고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그 뒤를 쫓았으나 치희는 노여움을 풀지 않고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나뭇가지에 꾀꼬리들이 날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노래불렀다. <삼국사기>
/ 꾀꼬리 모습 구경하기 /
● 유리왕은 어떤 사람이지?
유리왕은 기원전 19년에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라고 일컬어지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왕)의 원자(元子)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를 들어 임신이 되고 주몽이 망명한 후에 유리가 태어났다. 유리가 어릴 때에 거리에 나와 놀며 참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을 길어 가던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리자, 여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어 이같이 미련한 짓을 한다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하면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며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으므로 남녘 땅으로 망명하셔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망명하실 때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만일 사내아이를 낳으면 내가 가졌던 유물을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 가지고 오면 나의 아들로 맞겠다.'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에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느 날 아침, 집에 있노라니까 소나무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살펴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마침내 기둥 아래에서 끊어진 칼 도막을 하나 찾았다.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 3인과 더불어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 부왕(父王-주몽)을 뵙고 끊어진 칼을 바치자 왕이 가지고 있던 칼과 맞추어 보니 비로소 한 자루의 칼이 이루어져 왕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아, 이 때(기원전 19)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
● 고구려 사람들도 우리말로 노래했을까?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황조가>의 원문은 한자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삼국사기가 나온 고려 시대에 한글은 없었으므로, 이러한 <황조가>를 오늘날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이 번역시이다. 그러나 <황조가>를 처음 불렀던 유리왕은 한시로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우리말로 노래했다. 다만 우리말로 부른 노래가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아직 우리만의 독자적인 표기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려 기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보고 유리왕은 '펄펄'이라 노래했을 것이다. 이를 기록하기 위해 한자어 중 '펄펄'의 의미를 지닌 의태어 '편편'을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황조가>는 처음부터 한자로 기록한 한시가 아니라 우리말로 불리던 노래가 정착의 과정에서 한자로 기록된 한역시이다.
● 이 시가 최초의 '개인 서정시'라니?
이 노래의 지은이는 유리왕이다. 그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아들로,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가서 왕위를 계승하였던 인물이다.
한 개인에 의해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 중 가장 오래된 개인 서정시로 알려져 있다. '개인의 심정을 노래하지 않는 노래도 있단 말이야?' 하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살핀 <구지가>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노래 이전의 노래들은 모두 집단적인 필요(풍요 기원, 권력의 획득 등)에 의해 지어진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따라할 만한 유행가 가사, 그것의 시초는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였다.
● <황조가> 작품 정리
* 출전 : 삼국사기
* 연대 : 유리왕 3년 (B.C. 17)
* 형식 : 4언4구체의 한역가, 서정시
* 주제 : 실연의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