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는 중국의 정복왕조 중 두 번째 정복왕조로, 삽시간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하여,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아오고 회수(양쯔강과 황하강 중간에 있는 중국 강) 이북을 차지하였다.
또한 금은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였고, 이에 김부식 등 신라 출신 사대 유학자들이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자주파였던 묘청, 정지상은 금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읍을 서경(평양)으로 옮겨 북진정책을 추진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부식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은 서경에 도읍하여 대위를 세웠으나 결국 고려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렇듯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런 금나라의 통치자 금나라 황제의 피에 고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믿어지는가? 놀랍게도 금나라 황제의 시조는 고려인이었다고 한다. 금나라 시조가 고려인이고, 금나라 황제들이 고려인의 피를 이었다면 금은 우리의 방계(傍系) 역사가 되는가? 지금부터 금의 시조가 고려에서 왔는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금나라의 시조는 함보라는 인물이다. 금나라를 기록한 역사서를 보면 금의 시조 함보를 고
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적고 있다. 먼저 『금사』「세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금의 시조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시조가 완옌부에 살기 오래였는데 그 부족 사람이 일찍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화해할 수 없었다. (이에)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완옌부에는 나이 60에 시집을 안간 어진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오'하니 시조는 그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상대부족에게)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인해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데 그치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는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워루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을 낳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삼조북맹회편』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지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 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건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세워 사람들에게 빚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 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맺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고려사』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예전의 우리의 평주 승려 금준이 달아나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 구얼 태사를 낳고 구얼이 훠러 태사를 낳았다. 훠러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 아들은 해리버요, 막내는 잉거였다. 잉거가 가장 웅걸하여 민심을 얻었더니 잉거가 죽으니 해리버의 장자 우야소가 뒤를 이었으며 우야소가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금의 태조인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가 있는데 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건방진 국서이지만, 국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 태조 아골타는 자신의 가문의 기원이 고려에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또한 금나라가 거란정권인 요나라를 공격할 때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과 맞서자 발해 유민들을 회유하기도 했다. 발해 유민을 회유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말하며, 발해인들을 회유하였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女眞 渤海 同本一家)"
송나라 역사책인 『송막기문』에는 "여진 추장은 신라인으로 성은 완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금 태조가 자신들의 국명을 금(金)이라고 정한 이유를 『만주원류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같은 책(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 시조의 출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에서 완안부로 거주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안출호(安出虎)에 거주하였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박은식 전서』 「몽배금태조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몽배금태조란 꿈에 금나라 태조를 보고 절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금 태조를 보고 절했을까? 이에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대금국(大金國)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인(平州人) 김준(金俊)씨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요,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하자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변칭자(變稱者:고쳐서 달리 부르는 것)요, 발해족은 마한족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 일개 소부락으로 굴기하여 일거에 요(거란이 세운 국가)나라를 멸하고 재거(再擧)에 북송을 취하여 지나(支那:중국) 천지에 주권을 장악했노니 같은 땅에서 나온 우리민족의 사람으로 특별히 천제(天帝)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 무등(無等)한 복록(福祿)을 받고 무상(無上)한 광영(光榮)을 발표함은 실로 단군 대황조(大皇祖)의 음덕과 백두산의 영우로 인함이라"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진 즉 금(金)의 시조는 고려인(또는 신라인) 임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은 금이 우리의 역사임을 알리는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위 기록만이 아니다. 금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발해인들이 활약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호, 장호, 고표, 곽약사 등으로 이들 발해 유민들은 금의 건국 일등공신이자, 금이 내치를 다스리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여진 정권, 즉 금의 황제들이 발해계였다는 사실이다. 금의 3대 황제 희종이 폭정으로 전횡하자,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하고 금 4대 황제로 등극하였다. 해릉왕은 금 태조의 서장자(庶長子)였던 요왕 종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대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이었다. 희종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발해 출신 인물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남송을 향한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 의해 시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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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릉왕 시대 활약한 발해관료: 대회충(점검-도단태후 살해), 고정(태자태보, 어사대부-해릉왕의 신변경호), 이유충(왕안형 살해, 모반사건), 고희정(영사-희종 시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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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치세 성군이라 불린 세종 또한 자신의 외가가 발해계라 해릉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발해 사람을 기용한다. 이들 발해인들은 금 황제의 보호 아래 조정에 많은 활약을 하였고, 금이 멸망할 때 까지 금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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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활약한 발해관료: 대영(비서승- 해릉왕에 의해 제명당했으나 세종 때 다시 발탁), 이석(정책공-세종의 외척), 장호(원로 대신), 장현소(절도사), 장여필, 고간, 고덕기, 고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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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후 금나라 황제는 세종의 핏줄을 이었다. 금나라 황제의 피에는 발해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와 같이 금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중국 한족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나라 역사는 우리민족 방계의 역사이다.
그래서 일찍이 손진태 선생은 금사를 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청은 신라계?
[ 金史 ]
" 金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松漠紀聞 ]
" 金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部族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滿州源流考 ]
" 신라王의 姓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高麗史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金나라의 조상(祖上)이다 "
위의 여러 역사서를 종합(綜合)하여 살펴보면
"금나라"는 신라의 김씨족이 가서 세운 나라이고
" 금(金) " 이라는 국호는 신라왕姓 김(金)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사서에 따라
金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인 金극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
金函普의 8代孫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신라계 김씨 출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누루하치는 金太祖 아골타의 16代孫입니다.
고려 시대 때 윤관이 변경의 여진족을 내쫓고 동북 9성을 쌓는다.
그 때 여진족 사신이 고려의 王에게 이런 말을 한다.
" 예전에 우리 태사영가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
금(金)나라는 나중에 후금(後金)이 되고
이 후금(後金)이 중원을 정복하여 세운 왕조가 바로 청나라이다.
[ 만주원류考 ]라는 청나라 사서는
삼한(三韓) 즉 마한, 변한, 진한을 한반도 남쪽이 아닌 만주 땅에 배정하고
고대에 신라가 만주땅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물론 과장된 내용이지만 淸나라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중원을 정복하고 淸을 세우면서
성을 " 애신각라(愛新覺羅) " 로 바꾸는데
그 뜻은 " 신라를 사모하고 기억한다 " 입니다.
누르하치(奴兒哈赤)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奴兒哈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냈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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