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 및 안스러운 이야기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고양도깨비 2007. 3. 8. 13:28
 
1. 위도앞바다 서해훼리호(우리는 그참사, 이렇게 극복했다.)
1) 경악의대참사 ***사망 262명**
-사고경위 : 1993년 10월10일 일요일 오전 10시10분 풍랑이 이는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정기여객선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온국민을 경악케 했다.
서해훼리호는 이날 위도 벌금항을 출발, 인근 식도를 경유 3백62명의 승객을 싣고 파장금항을 떠난 시각이 오전9시40분경
이배는 주말 호기의 낚시철을 맞아 바다낚시와 위도일대 구경에 나선 관갱객, 추석에고향을 찾았다 뒤늦게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육지에 진학하여 토요일에 집에 왔다가 뭍으로 돌아가는 어린학생들, 험난한 파도와 싸워가며 어렵게 장만한 젓갈을 육지시장에 팔러가는 위도주민들, 사고전날 어머님 제사를 모시러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 위도에서 직장생활을하고 있는 부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주말부부등 선실은 물론 갑판과 화물칸까지도 그야말로 초만원 상태였다 여객선 정원이 2백21명인데도 3백62명을 승선시키고 있었다.
-희생자현황 : 국내에서 세 번째 큰 해난사고로 도내에서는 가장 큰 해난 사고이다. 1953년 1월 9일 부산 다대포앞 창경호 침몰사고로 3백30명이 사망한 사고와 1970년 12월 15일 부산~제주간 남영호 침몰사고로 3백23명이 사망한 사고이후 세 번째 큰 해난사고를 기록했다.
61명이 승선하여 3명만 구조되고 58명의 희생자를 낸 위도는 섬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옥구군 나포면 이채규(42세)씨등 주민3명은 섬에 노동일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야미도 선착장 복구공사를 마치고 9일 위도의 또다른 공사를 맡아 장비를 보관한후 잠시 마을에 돌아오다 변을 당했다, 이중 윤석중씨는 37세의 노총각인데 결혼을 하지 못하고 젋은 인생을 바다에 빼앗겨 노모인 최백삼(64세)씨에게 “가난이 아들을 죽였다”는 한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사고발생 당시는 몇 명이 승선했는지도 몰라 희생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는 사고선박이 승선지인 벌금, 식도, 파장금에 매표소에 없어 선상에서 표를 판데다가 출항시 관제소에 승선인원과 명단을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이행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선박 회사측에서는 140명이 승선했다고 주장하고 생존자들은 정원을 훨씬 초과했기 때문에 많게는 400여명은 승선했을 것이라고 하여 큰차이를 보이자 희상자 가족들은 만약의 경우 사체가 인양되지 않을때는 사고선박에 승선했다는 확실한 물증없이 영원히 실종자로 남을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 정확한 승선자 파악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2) 혼신의구조활동
-생사를걸고 : 사고를 처음목격하고 인근 어선들에게 연락해 구조에 나서도록 한사람은 위도어민 강길홍씨이다 강길홍씨는 여느때처럼 이른 아침부터 6톤급 자기소유 소형어선을 타고 낚시꾼들의 바다낚시를 돕고 있던중 2백여미터 떨어진 임수도 부근해역에서 고무보트에 매달린 생존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강씨는 곧바로 인근 조업중인 어선에게 “여객선이 침몰되었다 무전이 교신되면 즉시 임수도 북쪽으로 출동하라”는 다급한 교신을 한뒤 뱃머리를 위도 파장금항으로 돌려 주민 김백산씨에게 알렸다 김씨는 택시기사 주원훈씨에게 알렸고 주씨는 군산해안경찰서소속 파장금 신고소에 신고함으로 구조작업의 첫 가닥이 잡혔다 해경은 마을 앰프방송을 통해 이사실을 알림으로써 일터에 나가있던 주민들이 모여들자, 강씨는 정박해 있던 같은마을 어선 10여척을 이끌고 다시 사고해역으로 돌아가 산더미같은 파도를 헤치며 생존자 구출작업에 들어갔다, 이날 구조활동에 나선 위도 어선은 모두 5~15톤급 소형어선 46척, 구조신호를 받자마자 사고지점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사고직후 20분에서 1시간 사이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거친파도와 싸워 70명의 생존자중 69명을 구출하고 사체도 44구나 인양하는 등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끈질긴수색활동 : 실종자가 조류에 따라 표류하거나 바다밑에 가라앉아 있을 것을 예상, 저인망 어구가 비치된 어선은 저인망으로 바다밑을 수색하고 저인망 어구가 없는 어선은 주변해역을 샅샅이 탐색하는 내용으로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사고당일부터 다음날까지는 높은파도가 일어 소형어선은 동원할 수도 없었다. 비교적 큰 어선과 수산청, 옥구 부안군 어업지도선등 20여척으로 수색작업을 계속 실시했으나 별 무소득이었다, 그 다음날, 참사발생 3일째를 맞이하였다.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지면서부터 실종자의 수색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수색작업을 위한 어선동원은 처음에는 위도지구 어선으로 2일간 실시하였으나 나중에는 옥구, 부안, 고창지구 어선까지 동원, 수색활동에 최선을 다하여 곰소 선적 대성호는 2구의 사체를, 위도 선적 천승호도 2구를, 영광호, 한진호, 제경호, 부길호, 은성호 등도 각각 사체1구씩을 인양, 해경정에 인계했다. 옥구 부안등 육지에서 동원된 어선은 위도중심으로 수색과 예인작업을 5일동안 계속했다. 6일째부터는 위도면 선적 어선과 격포 및 곰소 선적 어선 30여척의 저인망 어구로 바다밑 뻘속을 계속 긁어줌으로써 사체가 해면위로 부상하도록 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해구 내무부장관은 전남북지사 및 지방경찰청장 관련 군수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수색합동작전을 지시한 바 수색작업은 해상과 해저?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실시, 우선 제일먼저 동원되어 수색활동이 종료되기까지 수색작업을 벌인 어업지도선은 어부들 사이에 떠도는 말로 “바다생활중 시체를 발견하면 재수가 좋고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어서 이를 일캐우며 실종자 찾기를 독려했다. 일일평균 수천명이 인간고리를 형성, 해변에서의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밤낮을 가리지않고 수색은 계속되었고 야간에는 횃불을 이용, 손과손을 맞잡고 수색했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동원돼 공중 관찰작업이 병행됐다. 인근의 어업지도선의 협조와 민관군 합동으로 적극적인 수색작업이 실시돼 영광앞바다까지 떠내려간 사체를 인양하기도.. 해난사고사상 단한구의 사체까지도 유실되지않고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며 사고발생 23일만인 11월2일 수색선이 위도와 임수도 중간지점을 통과할 때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어둠속에 하얀물체가 배위의 오른쪽으로부터 10k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언뜻 스쳐 지나갔다. 뱃머리를 돌려 물체확인을 지시했고 다가가서 확인한 결과 나이많은 남자사체인 것이 분명하였다 배에서 사용하고 있는 담요로 사체를 인양한 뒤 그때까지 찾지못한 임봉석씨 임이 확인됐다. 실종자 마지막 1구까지 인양하게 된 것이었다. 실종된 2백92명의 전 사체를 인양한 것이었다.
-사체안치 : 생존자들을 식당과 각 가정으로 분산시키고 헬기에 의한 부상자들의 긴급 후송이 끝나자 위도주민들은 어민공동작업장을 치우고 희생자 임시안치소를 설치하였다. 의용 소방대원 30여명과 부녀회원들이 마대로 만든 들것을 이용, 사체를 임시안치소로 운구하고, 파장금 이장이 준비한 6필의 마포로 시신을 모두 감쌌다. 이들은 신원을 확인한 뒤 이름표를 달아주고 분향소를 설치 조문객 등이 분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사체수송은 이틑날부터 시작되었다. 10월11일부터 11월2일까지 22일간 사체수송을 전담한 공무원과 해경요원들이 사고후 22일만인 11월2일 인양된 사체 수송을 끝으로 총 2백92구의 사체수송이 무사히 마무리 됐다.
- 사체봉안과 염습 : 10월10일 오전11시 이건재 군산시장이 하달한 비상소집을 통해 상황실 산하에 사체 봉안반이 설치되었다. 각각20명씩 60명의 근무조를 편성, 도내 장의사에 연락하여 6명의 염사를 확보 공무원과 조를 짰다. 50명분의 특수관, 수의, 드라이아이스, 시트카바, 조화, 향로, 촛대, 위패등을 구입, 전화국과 협조하여 이동전화를 설치했다. 11일 오후4시35분 21구의 사체가 처음 부두에 도착, 처음 사체를 대하여 직원들은 모두 소주 한병씩을 마시고 염사에게 교습받은 절차에 의하여 수습하고 모포에 싸서 앰블란스에 실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본 직원외에는 처음 대하는 사체를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의무감은 불가능이 없었다.
- 응급의료와 환자진료 : 망망대해에서 발생한 이번참사는 대다수가 사망하였다.부상자 54명이 사고당일 오후 2시30분부터 육해공군과 경찰헬기 13대로 1차 후송된 후 기동의료반으로 옮겨져 부안혜성병원, 전북대병원, 고창병원 등에서 치료토록하고 그중 5명은 바로 귀가하였다. 49명은 물을 많이 먹어 폐렴증세로 입원 3~4일씩 치료를 받은후 귀가, 일부 의료기관에서 이들 환자에 대한 진료비 문제를 제기했으나 국가차원에서 보상방안을 강구, 환자나 보호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했다.
2. 사고선박인양
-해양환경 및 서해안의 10월기상 : 위도앞 해상은 육지와 도서의 중간지역으로 도랑과 같은 해저지형, 즉 골이 형성되어 있다. 서해 특성상 조석 간만의 차는 4~7미터에 이르고 조류는 1~3노트(시속2~6km)로서 계절적으로 삼각파도가 높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해저지질은 찰뻘지역으로 단단하고 수중의 시계는 혼탁하여 50cm이하로 불량하다. 내륙의 고기압으로부터 분리된 변질된 이동성고기압이 4~5호 정도 한반도를 통과할 때 고압대를 형성, 연중최다의 청정일수를 보인다.
- 인양기간중 사고해역 기상 : 93년 10월10일부터 10월27일까지 18일동안 파도는 최저 1미터에 최고4미터로 대체적으로 높았고, 바람은 최저 10노트에서 30노트의 강한 북서풍이 불었다. 대체로 해상상태가 불량하여 사체 및 선체인양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표류사체인양 : 조류에 의해 최대 24km 해상까지 표류하였다. 표류하는 사체를 인양하기 위해 해군과 해경함정 40척과 헬기12대, 관공선7척, 육군 9군단 병력과 전경 등으로 해상과 해안일대를 수색하여 해상에 부유하고 있는 사체를 인양하였다.
-선체인양 : 침몰된 선체안에 사체가 그대로 있는데다 승선규모 및 사고원인 등을 밝혀줄 열쇠가 배 자체이기 때문에 선체를 있는 그대로 손상없이 인양해야 하고, 인양 소요기간도 최대한 단축해야 했다. 그러나 사고해역 조류가 최고시속 6~7노트나 되고 1백10톤급인 침몰선체 안에는 물이 찬데다 진흙까지 묻어있어 선체가 5백톤이상 나갈것으로 보여 어려움예상. 인양작전지원은 해운산업연구원 소속 9천7백톤급 해상크레인 설악호와 해군 구조함 구미함, 5척의 예인선, 2척의 바지 및 해난구조대 48명과 UDT 31명 등 전문요원 등이 동원되었다
3. 서해훼리호의 교훈
- 안전의식의 결여 : 안전사고 예방대책을 소홀히 하여 유발된 인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고당일 기상청의 폭풍주의보는 발효되지 않았으나 “파도가 높고 초속 10~13cm의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하는 선박은 주의를 요한다” 는 방송이 있었고, 여객선이 정상 운행하기는 어려운 날씨였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적지 않다.
- 정원외 141명이나 초과 승선 : 초과승선이 상습화되어 있어도 지도, 감독을 소홀히 하고 운항횟수를 늘리지 않은 당국과 선박회사도 과실이 크다.

4. 위도에서 얻어진 산 교훈
- 철저한 안전대책 : 승선인원의 철저한 확인과 승선인원 통제가 있었어야 했다.
- 휴일이나 계절에 따른 증편운항이나 임시여객선 투입조치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 예측이 가능한 기상 악조건에서 무리한 운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비극을 자초한 것.
- 승선자 전체의 안전을 위해 엄격한 정원관리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