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59명
`이리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에 일어났다. 지금은 익산시로 바뀐 이리시는 당시 인구 13만의 조용한 작은 도시였다. 특히 폭발사고가 발생한 그 순간은 많은 시민들이 집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폭발음 소리와 함께 도시는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화약 30톤(다이너마이트용)을 싣고 광주로 가던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 대기하고 있던 열차가 폭발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 등 도합 30.28톤.
`쾅''하는 대형 폭발음은 약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는 것이 이리시민들의 증언이다. 당시 6살이었던 소설가 김남중(33)씨는 최근 발간된 `기찻길 옆 동네''(창비 간)라는 어린이소설 속에 당시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리역 폭발사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린 눈으로 보고 묘사한 사고 현장과 당시 피해상황이었지만 상황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당시 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던 김남중씨의 경우는 그래도 `간접 피해''지역에 든다.
직접 피해지역에 살았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리역 바로 앞 창인동에 살았던 박정근(71)씨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창인동은 역전일대여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의 하나. 당시 역 앞에서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던 박씨는 그 날 밤 노모와 세 아들, 부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쾅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갔어요. 잇따라 벽이 넘어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집은 거의 완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죠. 저는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행히 다른 식구들은 무사했습니다”.
사고 당시 현장을 취재 보도한 전남매일신문(1977.11.13·현 광주일보)에는 사고 현장 피해자나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렇게 실려있다. “조윤경(25·이리시 창인동)씨는 저녁식사도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전깃불이 나가고 집이 무너져 30여분 동안이나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와보니 4살 먹은 아들은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리시 중앙동에서 TV상을 한다는 노병조(34)씨는 거래처에 수금을 나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이리역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쾅하는 폭음의 압력 때문에 자전거와 함께 4m정도까지 떠밀려 넘어졌다고 밝혔다”.
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중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중상자 185명, 경상자 1천158명 등 모두 1천402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주민들 외에 근무중이던 철도 공무원들도 모두 16명이나 숨졌다.
또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1㎞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갔으며 반경 8㎞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 780동였고 경미한 피해를 입은 건물은 6천여동이었다. 이재민 수는 1천674세대, 7천873명에 달했다.
피해지역별로 볼 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이리역 부근의 창인동과 모현동 일대였다. 특히 주로 서민 주거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는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50m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이리역 다음 역인 부용역에 근무했던 정우수 현 이리역장(55)은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m 떨어진 시내 우리 집앞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왔었다”고 말했다.
사고 원인은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
당시 수사당국의 사고원인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씨는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이 들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켜놓은 촛불이 잠든 사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약회사 호송원의 허술한 안전의식과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로 통과시켜야 하는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등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이 빚은 사고였던 것이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22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나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약종이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가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위험물질을 운반하면서 호송원 1명이 책임졌고 역 당국도 `목적지 직송원칙''을 어기고 구내에 장시간 대기시킨 점 등이 모두 문제로 드러났다. 철도운송 제46조는 ‘화약품의 운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로 운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사고 책임을 물어 당시 한국화약 신현기사장을 비롯해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7명과 신무일씨 등이 무더기로 구속됐고 신무일씨는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 가수 하춘화(49)씨간의 사연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22살의 인기절정이던 가수로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관객 500여명을 두고 공연중이던 하춘화씨는 폭발로 부상을 당했다. 또 함께 공연중이던 이주일씨는 하씨를 업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토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22살의 인기절정이던 가수로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관객 500여명을 두고 공연중이던 하춘화씨는 폭발로 부상을 당했다. 또 함께 공연중이던 이주일씨는 하씨를 업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토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신문에는 하씨가 실종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으며 극장 주인 등 10여명이 숨졌다. 이 사고와 관련 하춘화씨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당시 사고순간을 설명해 달라.
이번에 발생한 룡천역 사고와 비슷하다. 당시 나는 콘서트중이었다. 9시에 공연이 시작되자 오프닝 공연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갔다. 당시 11월이었기 때문에 쌀쌀해 나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내 개인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에 나가기 위해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무너진 극장 지붕이 쏟아져 내렸다. 땅이 뒤집어지고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전쟁이 난 줄 알았다. 당시엔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이었잖은가. `이건 북한의 침략이구나'', `폭탄이 또 터지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지붕이 무너진 이후 상황은
폭발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고 암흑으로 변했다. 당황한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였다. 어둠속에서 이주일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소리에 서로 생사를 확인한 뒤 이주일씨가 나를 끌고 더듬더듬 밖으로 나왔다.
극장 밖으로 나온 뒤 극장과 외부 사이에 있는 담벼락으로 이주일씨가 먼저 올라갔다. 담 위에서 나를 끌어 올린 뒤 이주일씨가 먼저 뛰어내리고 나한테 뛰어 내리라 했지만 무서워서 못했다. 그러자 이주일씨가 자기 머리를 딛고 내려오라고 해 그렇게 했다.
▲알려진 바로는 이주일씨가 업고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랬다. 담을 넘는데 성공하자 이주일씨는 자기 등에 업히라고 했다. 나는 당시 긴 치마를 입고 있어서 걷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등에 업혔는데 이주일씨가 자꾸 넘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어떤 건장한 청년이 다가와 “누구냐”고 묻자 이주일씨가 “하춘화씨다”고 하니까 그 청년이 “업히라”며 나를 업었다. 혹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주일씨는 그 남자 팔짱을 끼고 따라왔다.
우리는 근처에 있던 숙소인 호텔로 갔다. 그 곳에 자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자가용 지붕도 내려앉고 길 바닥은 온통 하얀 유리조각들로 가득했다. 이미 거리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하고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어떻게 탈출했는가
당시 차에는 기사와 제 아버지가 같이 계셨는데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모두 차 지붕을 두드려 펴고 군산으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 길가에는 사진에서 보던 6·25피난 행렬처럼 사람들이 대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데 피해정도는 어떤가
다행히 이렇다하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 경황도 없었지만. 2시간만에 군산도립병원에 도착해 보니 유명인이라고 산모들이 쓰는 따뜻한 방을 내줘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침대가 없어 땅바닥에 누워있고 30분 간격으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본 의사가 “어깨 뼈 골절”이라며 상반신에 깊스를 했다.
이틀 뒤 서울의 각 대학병원들이 나를 자기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모두 차를 보냈는데 한양대학병원으로 입원했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 다시 검진해보니 오진이었다. 어깨 타박상 정도였다.
문제는 이주일씨였다. 도착해 보니 두개골 일부가 함몰될 정도의 중상이었다. 자꾸 넘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주일씨는 서울에서 수술후 한달 넘게 입원했다. 나는 그보다 먼저 퇴원했다.
▲당시 신문에 행방불명이라는 얘기는 왜 나왔는가
워낙 신속하게 군산으로 이동해버린 통에 내가 없어진줄 알았던 것이다. 당시 `하춘화 실종''이라는 말에 박정희 대통령도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행방불명 이야기는 다음 날 늦게 해결됐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들이 몰려왔다.
▲사고 이후 이리시와의 어떤 인연이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입원 한달만에 퇴원하자마자 구 서울시민회관에서 이리시민 돕기 콘서트를 열었다. 또 1주년이 된 때에도 이리 시민회관에서 이재민 돕기 콘서트를 해 수입금 전액을 기탁했다.
당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이리시민들이 매우 고마워했다. “이리에서 국회의원 나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군의관 윤장현씨**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화제가 됐던 인물도 있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화제의 주인공은 현 광주 중앙안과 윤장현(54) 원장. 폭발사고 당시 광주 국군통합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 원장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치료해 줬다. 그러나 윤 원장이 당시 그같은 발빠른 지원활동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사실은 지휘관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했던 행동이어서 더욱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윤 원장은 “당시 젊은 군의관으로서 내 임무에 충실하고 싶었고 항상 환자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출퇴근하지 않고 병원에서 숙식하며 지내고 있었다”며 “사고 당일도 부대 내에 있는데 텔레비전을 통해사고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자 마자 `이건 어떻게든 출동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전북이면 광주 통합병원 지원 위수지역이어서 `우리 관할인데''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군인정신이 바짝 들어있었고 산악인 출신이라 현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다.
그는 “곧바로 병원장을 찾았으나 연락이 안되고 당직에게 출동을 건의했더니 지휘관 지시가 없다고 갸우뚱 했다. 안되겠다 싶어 `나쁜 일 아니니 나 혼자라도 가자''고 생각하고 위생병과 간호장교 20여명을 뽑은 뒤 장비와 함께 현장으로 내달렸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 밤중에 현장에 도착한 윤 원장은 남성고 강당에 진료반을 차리고 곧장 파편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생겼다. 지휘관에게 보고도 없이 병력과 장비를 빼내 이동해 버렸으니 병원에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윤 원장은 “당장 철수하라며 호통을 쳐서 `알았다''고 철수준비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군 고위 관계자들이 밀려들었다. 군사령관, 참모총장 이런 분들이 오더니 `초동출동을 잘 했고 환자를 치료하느라 정말 고생했다''며 격려를 했다. 상황이 반전돼 버린 것이다”고 말했다. 가까운 논산지구병원에서도 오지 않았는데 멀리 광주에서 왔으니 당연한 칭찬이었던 셈이다.
결국 현지에 의무부대까지 차려지고 윤 원장은 그로부터 3개월 동안 그곳에서 더 활동했다.
그는 “나중에 훈장과 표창이 내려오고 요란했는데 장기 근무자들에게 양보했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전국민 온정의 손길 민관군 복구**
이리역 폭발사고로 한국화약 신현기 사장을 비롯해 한국화약 관계자 및 철도청, 대한통운 직원 등 7명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대부분 형이 감량돼 중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다만 폭발사고의 주범인 신무일(당시 36)씨만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소후 신씨의 행방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진 바가 없다. 취재팀은 이름과 생년을 기준으로 신씨를 찾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리역 폭발사고후 복구과정은 12만 이리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땀과 노력이 모아졌다. 온 국민이 저금통을 모으고 구호성금품을 보내 상처를 치유해 간 과정은 마치 전 세계가 나서 북한 룡천돕기를 했던 것과 비슷했다.
참변이 있은 뒤 전국 각지에서 모두 5억6천만원의 성금이 모아졌고 쌀 8만8천kg의 쌀을 비롯해 58만점의 각종 성금품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은 사고 현장 주변이나 텐트촌에 대형 가마솥을 걸고 라면을 끓여 지원했고 재건의 삽질에 나섰다. 군부대 지원도 많아 공수부대와 공병, 의료부대가 복구작업을 도왔다. 사고후 1개월간 응급복구에 투입된 인원만도 25만8천명, 각종 차량은 1천388대에 달했다. 복구에 들어간 비용은 피해액의 5배인 200억원이 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사고 이후 이리시는 크게 달라졌다. 이재민들은 1년여의 텐트생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국적인 도움의 손길과 민·관·군의 복구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역사는 새로 지었으며 당시 집을 잃은 이재민 가운데 2천여세대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이주했다. 이리시내는 새로 도로를 뚫고 재건사업을 통해 “시 발전을 30년은 앞당겼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당시까지 발생한 최대의 폭발사고였다. 6·25 전쟁 말고 폭발사고로는 당시까지 10명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59명이었으니 엄청난 사고였음에 틀림없다.
이후로는 각종 폭발이나 화재, 붕괴 등 각종 안전사고로 수십명에서 100명 이상에까지 이르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문제는 각종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다시는 그와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그 사고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 것이다. 사고원인을 철저히 분석, 점검해서 근본부터 치유해 다시는 똑같은 사고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리역 사고도 당시에는 우리 철도운송과 화약류 등 위험물 운송 시스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
정우수 현 이리역장(55)은 “당시 사고는 우리나라 철도의 위험물 수송원칙을 새로 보완하거나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사고 직후 정부에서 대규모 점검단을 내려 보내 무엇이 사고의 근본 원인인지 철저히 조사했다”며 “그와 같은 조사를 바탕으로 화약류 운반 열차가 역내에 진입하면 우선적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행동요령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정 역장은 또 “사고로 피해가 컸지만 반대의 측면에서 보면 그같은 대형사고를 계기로 또 다른 사고를 막기 위한 학습을 한 측면도 있었다”면서 “그 이후론 그같은 대형 철도사고가 없다는 것이 교훈을 잘 활용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철도 당국의 운송체계 점검 노력과는 달리 이 대형참사를 잊지않고 길이 교훈으로 삼으려는 흔적은 사실상 남아있지 않는 것이 문제다. 특히 사고 당사지역인 이리시, 즉 현 익산시의 노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는 기술적인 분야나 해당 기관 한 두곳에서 점검하고 잊어버려도 되는 사고이기 보다는 사회 전체적으로 두고두고 교훈을 되새겨야 할 의미를 가진 사고였다. 이 사고가 단순히 철도나 위험물 운반 체계나 관리 실수로 일어난, 그 분야만의 사고로 한정하기에는 사회 많은 부분이 관련이 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후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성수대교 붕괴사고,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등 숱하게 많은 대형 안전사고들의 공통점은 `인재(人災)였다는 점이다.
이리역 열차사고 또한 원칙을 무시하고 호송원을 한 명만 배치했다거나, 위험물 차량은 곧바로 다음 역으로 통과시켜야 한다는 등의 기본적인 관리지침만 지켰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고였다.
또 그같은 대형사고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그 가족들은 한 없는 슬픔에 가족을 해체당하고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지역사회는 물질적으로 보상받고 길을 새로 내거나 건물을 지어 발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한 없는 슬픔이나 지역 이미지 손상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식이든 그 같은 교훈을 잊지 않고 자꾸 되새겨 다시 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후세들에게까지 가르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익산시내엔 그런 큰 사고가 그 때 있었다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사고 이후 역사는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무너진 건물은 새로 지었다. 그러나 사고를 잊지 말자는 기념물이나 민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푯말하나 없다. 이리역 구내에 당시 숨진 철도청 직원들을 기리는 작은 탑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소장물도 없다. 당시 사고와 관련된 기록은 `익산시사(益山市史)'' 교통체신편에 2페이지 분량이 있을 뿐이다. 당시 무수히 찍었을 사고 현장이나 수습과정, 이후 복구노력 등에 대한 어떤 사진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관하지 못하고, 당시 수습과정에서 기록했을 많은 상황들에 대한 일지들도 남아있지 않다. 익산시청은 “시간이 너무 흘러 보존연한이 지나 폐기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청 어느 한 쪽 구석이라도 당시 자료를 모아놓았을 것으로 생각한 취재팀의 물음에 익산시청은 사고 직후 찍은 낡은 사진 몇장만 제시했다. 그나마 추가로 필요한 사진은 당시 사진을 찍었던 시민에게 부탁해 얻어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각종 자료나 유물이 어디엔가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이리시 창인동장으로 수습과정에 참여했던 정규철(70)씨는 “사고 이후 몇년동안 시청 정문 오른쪽엔가 폭발 당시 부서지거나 날아온 기관차 잔해, 그리고 현장 사진 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당시 공보실에 사진기사가 사진을 많이 찍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시청 어딘가에는 이들 자료가 묵혀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몽땅 처치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근무중인 직원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고의 역사성을 무시하기는 철도청도 비슷했다. 익산역측은 당시를 눈으로 보여줄 자료는 갖고 있지 않고 사고 발생 한참 후에 작성한 `이리역 폭발사고 개요''만을 보관하고 있다. 사고 전말과 피해내용을 적은 것이 내용의 전부다. 익산역 관계자는 “언론에서 하도 물어오는 일들이 많아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참사 희생자를 추모한 사업이나 행사도 전무한 실정이다.
**사고 낸 신무일씨
1977년 11월 11일 운명의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신무일(당시 36·당시 거주지는 인천시 논현동)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일 밤 술에 취해 화약용 상자 위에 촛불을 켜고 자다 폭발사고를 낸 한국화약 호송원 신씨는 기록상으로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돼있다.
신씨는 사고 직후 체포돼 구속됐다. 검찰은 1978년 2월 10일 방화 및 폭발물 파열 치사상죄를 적용, 신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이후 신씨는 전주지법에서 열린 1심에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광주고법에 항소했다. 그러나 광주고법은 그해 7월 13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신씨는 적어도 10년 형은 살았을 것으로 보이나 이후 만기출소했는지, 감형 또는 사면 됐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취재팀은 신씨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동일 이름을 가진 비슷한 연배의 인물을 찾았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복구주역 정규철씨
사고 당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이리시 창인동장을 지낸 정규철(70)씨도 이리시의 역사적 무감각을 안타까워했다.
정씨는 “당시 시청 마당 한쪽에 기관차 잔해 등이 있다가 사라져버렸다”며 “어디에 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대통령 방문 사진 등을 크게 뽑아 시청 입구에 한동안 붙여 뒀는데 그것도 없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개인적으로 희생자들의 추모제나 당시를 기억할 작은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폭발사고때부터 사고가 수습될때까지 최일선에서 일해 당시 사고수습과정을 가장 잘 아는 공무원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그날 9시15분께 역앞에 있던 동사무소에서 퇴근준비를 하던중 갑자기 폭음과 함께 정전이 됐고 거리에 나가봤더니 아비규환이 돼 있었다”며 “그때 시체가 나뒹굴고 환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차들을 징발해 환자를 수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해 텐트를 마련하고 겨우살이를 준비하던 일도 새롭다”고 말했다.
동장을 맡은 지역인 창인동 희생자가 많은 탓에 정씨는 후에 `보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2천여건에 달하는 피해를 심의 보상하는 과정에서 단 한건의 잡음도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 시민이 긍지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당시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피해자들 가운데 한 시인이 짓고 주민들이 서명해 만들어 보낸 `재난의 길목에서''라는 시 액자를 가장 소중한 선물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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