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는 뜻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하는 말.
緣 : 인연 연/木 : 나무 목/求 : 구할 구/魚 : 물고기 어
주(周)의 신정왕 3년(BC 318), 맹자는 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이미 50을 넘은 나이였다. 동쪽에 있는 제는 서쪽의 진(秦), 남쪽의 초(楚)와 더불어 전국 제후 가운데에서도 대국이었다.
선왕(宣王)도 재주있는 사람이어서, 맹자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가 아닌 부국강병이며, 외교상의 책모, 원교근공책, 합종책, 연횡책이었다. 선왕은 중국의 통일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맹자와 선왕은 이런 문답을 하였다.
"임금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를 맺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내게 대망(大望)이 있기 때문이오." "임금님의 대망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인의(仁義)의 왕도정치를 논하는 맹자에게 선왕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맹자는 낚시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의식(衣食)이오니까, 인생의 오락이오니까?" "아니오, 나의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오." 선왕은 맹자의 교묘한 변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맹자는 힘차게 논하였다.
"그러시다면 이미 다 알 수 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여 진과 초와 같은 대국으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하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방법 즉 일방적인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연목구어 같은 것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렵습니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신을 다해도 결국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큰 재난까지 입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옵니다." "재난을 당하는 까닭을 가르쳐 주시오." 선왕은 귀가 솔깃하여 다가앉았다. 이렇게 맹자는 교묘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얻어,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론을 당당히 설명해 갔다.
침어낙안/沈魚落雁
물고기는 연못 속에 잠기고 기러기는 하늘로부터 떨어진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얼굴을 최대한으로 형용하는 말.
沈 : 잠길 침/魚 : 고기 어/落 : 떨어질 락/雁 : 기러기 안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애인 여희(麗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를 보면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물고기는 물 속으로 깊이 숨어버리고 기러기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대열에서 떨어졌다[沈魚落雁]'고 하고, 또 '환한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꽃은 부끄러워 시들었다[閉月羞花:폐월수화]'고 여희의 미모를 극찬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다음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결(齧缺)과 왕예(王倪)의 문답을 에피소드의 형식을 빌려 왕예의 말로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은 소와 돼지고기를 먹고, 큰 사슴과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여기고, 새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올바른 맛을 알고 있다. 원숭이는 편저라는 추한 원숭이를 암컷으로 쫓고, 큰 사슴은 사슴과 더불어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논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고, 큰 사슴과 사슴은 그녀들을 보면 결단코 도망갈 것이다. 이 네 가지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색(色)을 알겠는가? 내가 보건대 인의(仁義)의 끝과 옳고 그른 것의 한계가 뒤섞여 혼란하다. 내 어찌 능히 그 구별을 알랴!" 여기서 '모장과 여희'의 이야기가 나오고,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난다'는 구절에서 '침어낙안'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장자》에 나오는 이 말은 최대의 미인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미인으로 보이는 것이라 해도 물고기와 새에게는 단지 두려운 존재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한단지보/邯鄲之步
한단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제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邯 : 땅 이름 한/鄲 : 조나라 서울 단/之 : 의 지/步 : 걸을 보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손룡(公孫龍)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사상가로, 자신의 학문과 변론이 당대 최고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장자(莊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변론과 지혜를 장자와 견주어보려고 위(魏)나라의 공자 위모(魏牟)에게 장자의 도(道)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장자의 선배인 위모는 공손룡의 의중을 알고는 안석에 기댄 채 한숨을 쉬고 하늘을 우러러 웃으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밖의 세상을 볼 수 없다라고 말하고, 가느다란 대롱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송곳을 땅에 꽂아 그 깊이를 재는 꼴이라며 비웃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네는 저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엎드려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세. 지금 자네도 장자에 이끌려 여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는 그것을 배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네 본래의 지혜를 잊어버리고 자네의 본분마저 잃게 될 걸세." 이 말을 듣고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도망쳤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말이 비롯되었으며, 이는 자기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지각없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웃어준 이야기이다. 한단학보(邯鄲學步)와 같은 말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
大 : 큰 대/器 : 그릇 기/晩 : 늦을 만/成 : 이룰 성
《노자(老子)》 41장에서 나온 말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옛글을 인용하여 도(道)를 설명하였는데 "매우 밝은 도는 어둡게 보이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 같다. 가장 평탄한 도는 굽은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몹시 흰 빛은 검은 것 같고, 매우 넓은 덕은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다. 아주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매우 질박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또 "그러므로 아주 큰 사각형은 귀가 없고(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大音希聲),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象無形). 왜냐하면 도는 항상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긍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보듯 만성(晩成)이란 본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로,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강하다. 그런데 후일 이 말이 늦게 이룬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이름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외모도 빈약하고 출세가 늦어 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다. 하지만 최염만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큰 종이나 큰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형이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최림은 후일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나이 들어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을 따름을 이르는 말.
또는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본색을 숨기고 인간계(人間界)에 나타남을 이르는 말.
和 : 화할 화/光 : 빛 광/同 : 한가지 동/塵 : 티끌 진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노자(老子)》에 나오는 구절로,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다음은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말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이목구비를 막고 그 문을 닫아서, 날카로운 기운을 꺾고, 혼란함을 풀고, '지혜의 빛을 늦추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함께하니[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해질 수도 없고, 소원해지지도 않는다. 이롭게 하지도 않으며, 해롭게도 하지 못한다. 귀하게도 할 수 없으며,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 귀한 것이 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앎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니, 앎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진정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날카로움을 꺾고, 지혜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늦추고, 그리고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되니,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현동의 사람에 대하여는 친해질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으며, 이득을 줄 수도 해를 줄 수도 없고, 귀하게 할 수도 천하게 할 수도 없으니, 천하에 가장 귀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광동진이란 말이 비롯되었으며, "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노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화광동진'과 '현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백아절현/伯牙絶鉉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 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말.
伯 : 맏 백/牙 : 어금니 아/絶 : 끊을 절/絃 : 악기줄 현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시대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지만 진(晉)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거문고의 달인 백아가 있었다. 백아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種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들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하늘 높이 우뚝 솟는 느낌은 마치 태산처럼 웅장하구나”라고 하고, 큰 강을 나타내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황허강 같구나”라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였다.
또 두 사람이 놀러 갔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이를 피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다. 백아는 동굴에서 빗소리에 맞추어 거문고를 당겼다. 처음에는 비가 내리는 곡조인 임우지곡(霖雨之曲)을, 다음에는 산이 무너지는 곡조인 붕산지곡(崩山之曲)을 연주하였다. 종자기는 그때마다 그 곡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알아 맞혔다. 이렇듯 종자기는 백아가 무엇을 표현하려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백아와는 거문고를 매개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음악 세계가 일치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종자기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등지자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伯牙絶絃]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거문고 줄을 끊은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를 사귀거나 친구를 배신하는 현대 사회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진실한 우정을 생각하게 하는 고사성어이다. 또한 깊은 속마음까지 서로를 알아 주고 위하는 완벽한 우정을 비유할 때 인용된다. 줄여서 절현이라고도 하며, 백아파금(伯牙破琴)이라고도 한다. 비슷한말은 지음(知音), 고산유수(高山流水:높은 산과 그곳에 흐르는 물이라는 말로, 아주 미묘한 음악, 특히 거문고 소리를 이르거나 知己를 비유하는 뜻), 지기지우(知己之友) 등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쪽[藍]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靑 : 푸를 청/出 : 날 출/於 : 어조사 어 /藍 : 쪽 람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사상을 집록한 《순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말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已].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인 '청출어람'이 나왔으며, '출람(出藍)'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또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을 '출람지재(出藍之才)'라고 한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음을 강조한 순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북조(北朝)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은 어려서 공번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하였다. 그는 학문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몇 년이 지나자 스승의 학문을 능가하게 되었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사고 또 훌륭한 제자를 두었다는 뜻에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칭찬했다. 우리 속담에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출람지재' '출람지예(出藍之譽)' 등과 함께 '청출어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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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구검
☆겉뜻: 배에 새겨 칼을 찾다
☆속뜻: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뜻.
☆유래: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군계일학
☆겉뜻 :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
☆속뜻 : 여러 평범 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
☆유래: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瑞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 유령(劉伶), 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瑞康) 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瑞紹:? ∼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 司馬炎)에게 상주(常住)하였다.
"폐하, 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혜강은 도륙 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 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 하시오소서."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 (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계란유골
☆ 겉뜻 : 계란에도 뼈가 있다.
☆ 속뜻 :운수가 나쁜 사람의 일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유래: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의하면,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황희(黃喜, 號 : 尨村)는 마음이 착하고 생활이 검소하였다.
황정승의 생활이 매우 빈한한 것을 상감(上監)께서 궁휼히 여기시고 어떻게 잘 살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었다. 한 묘안을 얻어 명령하시되 내일은 아침 일찍 남대문을 열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이 문을 들어오는 물건을 다 황정승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폭풍우가 몰아쳐 종일토록 멎지 아니하므로 문을 드나드는 장사치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 어두워 집에 들어갈려고 할 때 무슨 까닭인지 시골 영감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어 이것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와 곧 삶아 먹으려고 하니 알마다 곯아서 한 알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한다.
★갈택이어
☆겉뜻 ;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 고기를 잡는다는 뜻
☆속뜻 ;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함.
☆유래 ;
☆겉뜻:물과 물고기의 사귐.
☆속뜻:임금과 신하 사이의 두터운 교분. 부부의 친밀함.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유래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양상군자
☆겉뜻 ;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
☆속뜻 ; 도둑을 가리키는 말.
☆유래 ;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식은 학식이 뛰어나고 성질이 온화하며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태구현(太丘縣)의 현감으로 있을 때 어느날 밤 도둑이 그의 방으로 들어와 천장 들보 위에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진식은 곧 의관을 정제하고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훈계를 시작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착하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도 반드시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아니다. 평소의 잘못된 버릇이 성격으로 변하여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 들보 위의 군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도둑은 이 말에 깜짝 놀라 얼른 들보 위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조아리며 죽여 주십사하고 사죄하였다. 진식은 그를 조용히 타이르고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고을 안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다.
★여도지죄
☆겉뜻 :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란 뜻
☆속뜻 :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의 비유.
☆유래 :
전국 시대, 위(衛)나라에 왕의 총애를 받는 미자하(彌子瑕)란 미동(美童)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전갈을 받은 미자하는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는 사람은 월형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오히려 효심을 칭찬하고 용서했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 "
또 한 번은 미자하가 왕과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먹어 보더니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먹을 것도 잊고 '과인에게 먹이다'니…‥. "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도 엷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처벌을 받게 되자 왕은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과인의 수레를 탔고, 게다가 '먹다 남은 복숭아 [餘桃]'를 과인에게 먹인 일도 있다. "
이처럼 한 번 애정을 잃으면 이전에 칭찬을 받았던 일도 오히려 화가 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관규천
☆겉뜻 :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다.
☆속뜻 :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살펴 보았자 그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유래 :
춘추시대 말기의 일이다. 뒷날 동양 의학의 원조(元祖)이자 의성(醫聖)으로도 일컬어지는 편작(扁鵲)이 괵이라는 나라에 갔을 때였다. 마침 병을 앓던 이 나라의 태자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편작은 궁정의 의사를 찾아 갔다. 태자의 병이 무슨 병인가를 물어보고 현재의 상태를 알아낸 편작은 말했다. "그럼 내가 태자를 소생시켜 보겠습니다." 편작이 팔을 걷고 나서자 궁정의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무책임한 말씀은 삼가시오. 어린애도 그런 말은 곧이듣지 않을게요." 그러자 편작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듯 말했다. "당신의 의술 따위는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며(以管窺天)' 좁은 틈새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소." 잠시 뜸을 들였다가 편작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 말을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번 태자를 살펴보시오. 그의 귀가 울고 코가 벌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게요. 그리고 양쪽 사타구니를 쓰다듬다가 음부에 손이 닿으면 그곳은 아직 따뜻할 것이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진찰해보니 편작이 말한 그대로이자, 궁정의사는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괵나라 임금은 편작에게 매달렸다.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는 소생했고 치료를 더하자 20일 후에는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편작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하자 편작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게 아니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고친 것뿐이오'"
★이포역포
☆겉뜻 ;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뜻
☆속뜻 ; 정치를 하는데 있어 힘에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 말.
☆유래 ;
이포여포란 위정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 힘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한 고사가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편(伯夷叔齊列傳篇)〉에 실려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이다. 왕은 아우 숙제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나라를 떠났으며, 숙제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나라에서는 할 수 없이 둘째를 왕으로 삼았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백은 이미 죽어 문왕(文王)에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諫)하였다.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 할 수 있는가?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호위 무사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태공이 이들을 의인이라고 하며 돌려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을 평정하여 천하가 주(周) 왕실을 종주로 섬겼으나, 백이와 숙제는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비[薇]를 꺾어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 죽기 전에 이런 노래를 지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다스렸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神農), 우(禹),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고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역사 이전부터 백이와 숙제가 힘의 정치에 대한 부당성을 비판하였지만, 지금도 이런 정치 형태는 여전히 그 힘을 발한다.
★전거후공
☆겉뜻 ; 이전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
☆속뜻 ; 상대편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 것을 비유한다.
☆유래 ;
춘추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손꼽히는 소진(蘇秦)이 있었다. 그는 본래 낙양(洛陽) 사람으로 귀곡자(鬼谷子)를 스승으로 섬겼고, 수년 동안 제후들에게 유세하러 다니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결국 실의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낙향에 아내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형수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비웃었다. 소진은 두문불출하고는 마침내 종횡의 이론을 생각했다. 소진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로 가서 제(齊), 초(楚), 위(魏), 한(韓)등 6개 나라가 연합하여 막강한 진(秦)나라에 대항하자는 건의를 했다. 결국 그의 견해는 받아들여져 6국은 소진을 승상의 지위까지 맡겨 진나라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진은 어느 날 북방에 있는 조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그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형제와 아내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하며 시중을 들었다. 특히 형수의 태도는 더욱 공손하였다. 소진은 그 모습을 보고 형수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무척 거만했는데, 지금은 이다지도 공손해지셨습니까?”
“이제는 서방님의 지위가 높아 감히........”
이 말을 듣고 난 소진은 한탄하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진인데, 부귀할 때는 남들이 두려워하고 빈천할 때는 멸시하니, 부와 명예가 이렇게도 대단하던가!”
우리 주변에도 소진의 형수 같은 무리들이 적지 않음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추종자들의 그들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다.
★조령모개
☆겉뜻 :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뜻
☆속뜻 : 일관성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말.
☆유래 :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 재정경제사장(財政經濟史章)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흉노(匈奴)가 자주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니, 경작하면서 수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히 변방에서 수확하는 곡식만으로 충당하기에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헌납받는 사람들과, 그 곡식을 변방까지 수송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을 주기로 하였다. 그 벼슬의 지위는 대서장(大庶長)까지였다. 이 조치는,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조(晁錯)의 헌책(獻策)을 취한 것이었음을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 밝히고 있다.
조조가 상소한 이 헌책은 후세에 〈논귀속소(論貴粟疏)〉라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 조령모개라는 말이 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다섯 가족의 농가에서는 부역이 과중하여, 노역(勞役)에 복종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경작하여 수확하는 것은 백 묘(畝)가 고작인데, 이 백 묘는 많아야 백 석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경작하고 여름철에 풀 뽑고,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저장하는 외에, 관청을 수리하고 부역에 불려나가는 등 춘하추동 쉴 날이 없다.
또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들을 받고, 어린이를 기른다. 또한 홍수와 한발의 재해를 당하는 위에 갑자기 세금이나 부역을 당한다
이것은 일정한 때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아침에 영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朝令而暮改). 전답이 있는 사람은 반값으로 팔고, 없는 사람은 빚을 내어 10할의 이자를 낸다. 이리하여 농지나 집을 방매(放買)하고, 아들과 손자를 팔아 부채를 갚는 자가 나오게 된다.
여기서 '조령모개'는 '법령에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청(淸)나라 때의 학자 왕염손(王念孫)은 후한(後漢) 때의 순열(荀悅)이 《한기(漢紀)》에 기록한 대로, '조령이모득(朝令而暮得)’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하였다. '조령모득'은 '아침에 법령을 내리고 저녁에 거둔다'는 뜻이다.
★죽마고우
☆겉뜻 ;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속뜻 ; ① 어렸을 때의 벗. (소꼽동무)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 오랜 친구.
☆유래 ;
진(晉 : 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 : 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 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 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지어지앙
☆겉뜻 ;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이라는 뜻
☆속뜻 ; 뜻밖의 횡액을 당함을 비유하는 말.
☆유래 ;
《여씨춘추(呂氏春秋)》〈필기편(必己篇)〉에 전한다.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에 사마(司馬) 벼슬의 환(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진귀한 보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었다. 처벌을 받을 것 같자, 보석을 가지고 도망쳤다. 그의 보석 이야기를 들은 왕이 욕심이 생겨 수중에 넣고 싶어하였다. 왕은 측근의 환관에게 속히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환관이 어렵게 환을 찾아내자, "그 보석은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에 던져버렸다"라고 하였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그물로 연못의 바닥을 훑게 하였다. 보석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었다. 그러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물을 모두 퍼내는 바람에 애꿎은 물고기들만 말라 죽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보석과 물고기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고기만 영문도 모른 채 떼죽음당했을 뿐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초(楚)나라의 원숭이와 성문의 화재 이야기가 있다. 초나라 왕궁에서 원숭이를 기르다가 놓쳤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 달아난 산에다 불을 놓아 나무를 모두 태워버렸다. 또 초나라 왕궁 성문에 불이 났다. 사람들이 성문 옆의 연못에서 물을 퍼내어 불을 껐다. 이 때문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려 물고기들이 다 죽었다. 모두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남 때문에 뜻밖의 재앙을 당한 경우이다.
우리 속담의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는 것과 통할 법한 이야기이다.
★창해일속
☆겉뜻 ; 푸른 바다에 좁쌀 한 톨이라는 뜻
☆속뜻 ;아주 작고 보잘것없음을 비유한 말.
☆유래 ;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처음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이 적벽부를 천하 명문(名文)의 하나로 꼽는다. 두 편으로 된 이 부는 소동파가 황주(黃州)로 귀양가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인간사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자신의 근황을 신선(神仙)에 기탁하여 나타내었다. 음력 7월 중순의 어느 날, 소동파는 벗과 함께 적벽을 유람하였다. 때마침 날씨는 맑고 바람마저 잔잔하였다. 달빛은 일렁이는 물결에 부서졌다 모이고 하여, 인간의 감정을 고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러한 적벽의 주변 풍광은 마치 선경(仙境)과도 같았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조리던 중에, 소동파는 문득 그 옛날 조조(曹操)와 주유(周瑜)가 여기서 천하를 두고 한판 승부를 펼쳤던 적벽의 싸움[赤壁大戰]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소동파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달이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조조)의 시(詩)가 아닌가? 서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엉겨 울창하다. 이는 조맹덕이 주랑(周郞: 주유)에게 곤경에 처했던 곳이 아닌가. 그가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와 물결을 따라 동으로 나아갈 때, 전함은 천 리에 뻗어 있고 깃발이 하늘을 가렸다. 술을 걸러 강에 임하고 창을 비껴 들고 시를 읊노니, 진실로 한 세상의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그대와 나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 하면서, 물고기, 새우들과 짝하고, 고라니, 사슴들과 벗하고 있다. 작은 배를 타고 술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서로 권하니, 우리 인생은 천지간에 하루살이처럼 짧고, 우리의 몸은 푸른 바다에 한 톨 좁쌀[滄海一粟]과도 같구나. 정말, 너무나 짧구나! 어찌 장강(長江)처럼 다함이 없는가? 여기서 창해일속이라는 말이 나왔다. 무한한 우주 속에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무상함이 깔려 있다.
★천고마비
☆겉뜻 ;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속뜻 ; ① 하늘이 맑고 오곡 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는 가을을 형용하는 말.
② (흉노에게 있어, 전하여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활약(동) 하기 좋은 계
절을 이르는 말.
☆유래 ;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말은 본래 흉노족(匈奴族)의 침입을 경계하고자 나온 말이다. 은(殷)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周), 진(秦), 한(漢)의 삼왕조(三王朝)를 거쳐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북방 변경의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범 약탈해 온 표한(剽悍)한 유목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늘 고심했는 데 전국시대에는 연(燕), 조(趙), 진(秦)나라의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기존의 성벽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증축 연결(增築連結)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 가는 흉노에게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을 살아야 할 양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흉노족이 사는 곳은 중국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광활한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을 업으로 하고 있다.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먹은 말은 가을에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그들은 식량을 찾아 살찐 말을 타고 중국 변방을 쳐들어 와 곡식이며 가축을 노략질해 갔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병사들은 활줄을 갈아 매고 활촉과 칼을 벼르며 경계를 강화시켰다.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지는[天高馬肥]'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했다고 한다. 또한 두보(杜甫)의 조부 두심언(杜審言)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도(蘇味道)에게
"맑은 눈발이 아름답게 별 떨어지듯 하고,
가을 하늘은 드높고 변방의 말은 살이 찌네.
(雪淨妖星落하고, 秋高塞馬肥 하네.)" 라고 한 오언율시(五言律詩)의 한편의 시를 적어 위로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杜審言의 詩)
★청운지지
☆겉뜻 ; '청운의 뜻'
☆속뜻 ; 입신출세하고 싶은 마음 또는 고결하여 속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일반적인 의미는 입신출세하려는 대망, 즉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뜻으로 '능운지지(陵雲之志)'와 같은 말이다.
다음은 당나라 때의 문인 장구령(張九齡)의 '거울을 비춰 백발을 보다'라는 뜻의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이라는 오언절구의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宿昔靑雲志]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네[蹉白髮年]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唯知明鏡裏]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形影自相憐] 위의 시에서 '청운지(靑雲志)'는 바로 입신 출세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말이다. 이 시를 풀이하면, '그 옛날 푸른 꿈을 안고 재상이 되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늙은 나이에 미끄러져 물러나고 말았다. 거울 속에 비친 백발을 보며 서글퍼하는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오'라는 내용이다.
장구령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어진 재상이었으나, 이임보(李林甫)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쓸쓸한 감회를 읊은 것이 바로 위의 시이다. 한편 '청운지지'는 높이 세상 밖에 초탈하여 속세를 떠나려는 마음인 '능운지지(凌雲之志)'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칠종칠금
☆겉뜻 ;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
☆속뜻 ;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
를 기다린다는 말.
☆유래;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인 유비(劉備)는 제갈 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魏)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 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 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 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탐천지공
☆겉뜻 ; 하늘의 공을 탐내다.
☆속뜻 ; 남의 공로도 자기 것으로 하는, 남의 공을 도용(盜用) 함을 이름.
☆유래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오랜 유랑 끝에 진(秦)나라의 원조로 귀국하여 즉위한 후 논공행상했다. 망명을 함께 한 자나 자금을 제공한 자에게는 토지를 내리고 가봉(加封)이 있었으며, 귀국을 환영한 자로부터 일반인에게까지 상이 미쳤으므로 모두가 기뻐했다. 문공은 행여 빠진 자가 있을까 염려해 해당자는 신고하라고 포고했다. 망명을 함께 한 개자추(介子推)라는 충신이 빠져 있어서, 그 이웃 사람이 포고를 보고 개자추에게 고했다. 개자추는 문공이 귀국한 후에 병이 나서 집에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모친을 지키며 청빈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웃 사람의 권유에 개자추가 웃으며 상대하지 않자, 그의 모친이 말했다.
"너는 굶주린 문공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바칠 만큼의 공로가 있었는데, 왜?"
개자추는 웃으며 말했다.
"뭘 바라고 충의를 다한 건 아니니까요."
이웃 사람은 기가 막혔다.
"신고만 하면 이런 가난은 면할 텐데."
"헌공(獻公)의 9공자 중 문공님은 가장 현명한 분이시니 오늘날의 즉위는 당연하다. 그런데 다들 그것을 모두 자신의 공로인 듯이 말하고 있다. 볼꼴사나운 일이다. 군주에 대해 탐천지공(貪天之功)을 다투는 것은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행위다. 차라리 짚신을 삼는 편이 훨씬 즐겁다."
모친도 개자추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
그날 밤 개자추는 지체없이 어머니를 업고, 때마침 환하게 비치는 달빛을 의지하여 면산(綿山)으로 깊숙이 들어간 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안 문공은 개자추를 찾아 온 장안을 뒤져 그가 산속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나올 것을 권유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나오게 하려고 산까지 태웠다. 개자추는 그래도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불에 타 죽었다. 문공은 슬피 여겨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날을 기억하여 제사 지내고 그날 만큼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게 했다고 한다.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다.
★태산북두
☆겉뜻 ; 태산과 북두칠성이라는 뜻
☆속뜻 ;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는 말 또는 학문이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나 대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한유(韓愈)는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자이자 사상가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당나라의 대표적 4대 시인의 한 사람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히는 중국 제일의 문장가이다. 그는 25세 때 진사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과 파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뒤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유는 순탄하지 못했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학문과 사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친구인 유종원 등과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고문이 송대 이후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게 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지는 등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사상 분야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여 공자 이래의 유학을 왕성하게 하는 데에 힘써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
★타면자건
☆겉뜻 ;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
☆속뜻 ; 처세에는 인내가 필요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이 말은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것으로, 남이 나의 낯에다 침을 뱉을 때 이를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독차지하여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탄압책을 쓰는 한편, 유능한 신흥 관리를 많이 등용하고 명신을 적절히 등용하여 정치를 담당시켰기 때문에 천하는 그런 대로 태평했다. 그 무렵, 측천무후의 유능한 신하 중에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관인(寬仁)하여, 아무리 무례한 일을 당해도 그 자세에 흔들림이 없이 항상 똑같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代州刺史)로 임명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동생을 불러
"우리 형제가 다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만큼 남의 시샘도 크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생이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 만사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응대하여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누사덕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크게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침을 닦아버린다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그는 틀림없이 더 크게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니, 그런 때는 웃으며 그냥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투편단류
☆겉뜻 ;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막는다는 뜻
☆속뜻 ; 병력이 많고 강대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진서(晉書)》의 〈부견재기〉에 나오는 말로, ‘강을 건너는 병사의 수가 많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진(前秦)의 제3대 왕인 부견은 전연(前燕)과 전량(前凉)을 항복시켜 강북을 통일하였다. 부견은 이 기세를 몰아 남방의 동진(東晉)을 공략해 천하를 통일하려고 융졸(戎卒)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출발했다. 그러나 신하들 중 권익은 ‘동진에는 현신(賢臣)이 많다’는 이유로, 또 석월(石越)은 ‘동진은 양쯔강의 험란함에 의거하고 있고 그 조정에 혼란의 증후도 없으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불리하다’며 출병을 반대했다. 그러자 사기가 충천함만을 믿고 부견은 “우리 대군의 채찍으로도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投鞭斷流].”라고 호언장담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부견은 사현(謝玄)이 이끄는 동진군에게 비수(水)에서 크게 패해 뤄양[洛陽]으로 도망쳤다. 결국 부견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전진은 서진(西秦)에 의해 멸망하였다. 전쟁이란 단지 군사의 수가 많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이 ‘비수(페이수이)의 싸움’에서 ‘풍성학려(風聲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쾌도난마
☆겉뜻 ; 날랜 칼로 복잡하게 헝클어진 삼을 베다.
☆속뜻 ; 어지럽게 뒤얽힌 일이나 정황 (情況)을 재빠르고 명쾌하게 처리하는 것
☆유래 ;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창시자 고환(高歡)은 선비족화(鮮卑族化)한 한족(漢族)으로 그의 부하도 대부분 북방 변경지대의 선비족이었다. 선비족의 군사는 난폭했지만 전투에는 용감했기 때문에 고환은 이러한 선비족 군사의 힘을 배경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환은 아들을 여럿 두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싶어 한 자리에 불러들였다. 그는 아들들에게 뒤얽힌 삼실 한 뭉치씩을 나눠주고 추려내 보도록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한 올 한 올 뽑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양(洋)이라는 아들은 달랐다. 그는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와서는 헝클어진 삼실을 싹둑 잘라버리고는 득의(得意)에 찬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아버지 앞에 나아간 고양은 "
어지러운 것은 베어버려야 합니다(亂者須斬·난자수참)"고 말했다.
★파부침선
☆겉뜻 ; 밥 짓는 가마솥을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다.
☆속뜻 ; 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비유하는 말.
☆유래 ;
진(秦)나라가 말기 증세를 보이자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제후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나라 때부터 장군의 전통을 이어온 항우(項羽)와 그의 삼촌 항량(項梁)도 반기를 들었다. 호응하는 사람들로 세력을 크게 불린 항량과 항우는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봉기군은 정도(定陶)에서 진나라 장군 장한에게 크게 패해 봉기군 총수 항량도 목숨을 잃었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조왕이 있는 거록(鋸鹿)을 포위했다. 조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초왕은 송의(宋義)를 상장, 항우를 차장으로 앉혀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는 군대를 안양(安陽)까지 진격시키고는 40여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작전상 그렇게 했지만 몇번이나 진군을 재촉해도 송의가 듣지 않아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었다. 상장이 된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넜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항우는 '타고 온 배를 전부 가라앉히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皆沈船破釜甑·개침선 파부증)' 진영을 불태운 뒤 사흘분 군량미만 지급함으로써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과연 전장병은 결사의 각오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항우군은 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의 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의 장군들이 항우의 진영에 모였는데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반진(反秦)연합군 가운데서 항우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파죽지세
☆겉뜻 ;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
☆속뜻 ;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
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쳐들어 가는 당당한 기세.
☆유래 ;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晉)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晉)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建業 : 南京]으로 쇄도(殺到) 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晉)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惡毅)는 제서(齊西)의 한 번 싸음에서 승리하여, 강한 제(齊) 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포호빙하
☆겉뜻 ;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황허강[黃河]을 걸어서 건넌다는 뜻
☆속뜻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용기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말로,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과 같은 뜻이다. 공자는 군자(君子)란 마음에 어떤 집착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등용되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등용되지 않으면 자신의 자취를 감출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이처럼 집착함이 없이 무심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안회(顔回:顔淵)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공자가 안회에게 "권력 있는 자가 써 주면 행하고 버리면 물러나 마음 속에 감출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뿐일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는 자신을 제쳐두고 한참 후배인 안회를 인정하는 스승의 말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도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만약 선생님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은근히 기대하며 공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기대와는 달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발로 황허강을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즐겨 도모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포호빙하 사이무회자 오불여야 필야임사이구 호모이성자야)]."
공자의 이 대답은 자로의 경솔한 태도와 만용(蠻勇)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제자에 대한 깊은 배려가 들어 있다.
★풍수지탄
☆겉뜻 ; 바람과 나무의 탄식이란 말
☆속뜻 ;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
☆유래 ;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수욕정이풍부지 樹欲靜而風不止)'에서 나온 말로 부모가 살아 있을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에 한탄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공자의 귀에 들려왔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곡성의 장본인은 고어(皐魚)라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우는 까닭을 물어보았다.
울음을 그친 고어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세가지 한(恨)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는 저의 경륜을 받아들이려는 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바람이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고어의 말이 끝나자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이 말을 명심해 두어라. 훈계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이날 충격과 함께 깊은 감명을 받은 공자 제자 중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섬긴 사람이 열세명이나 되었다.
★하로동선
☆겉뜻 ;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속뜻 ; 곧 격이나 철에 맞지 않거나 쓸데 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
☆유래 ;
후한 시대의 학자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쓸모 없는 재능을 내세우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의견을 내놓는 것은 여름에 화로를 권하고 겨울에 부채를 내미는 것과 같다" (作無益之能 納無補之說 (獨如以夏進爐以冬奏扇 亦徒耳)
겨울의 화로와 여름의 부채는 유용하고 환영 받는 물건이지만 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인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의 화로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젖은 것을 말릴 수도 있으며 겨울의 부채라 하더라도 그것을 부침으로써 꺼져가는 불을 살려서 활활 타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좀 더 비약하면 아무 쓸모 없이 보이는 것이 때로는 어느 것보다 더 유용하게 쓰이는 이른바 장자의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無用之用)'의 철학에도 생각이 미친다. 장자는 '사람들은 모두 유용(有用)의 쓰임을 알지만 무용(無用)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못쓰겠다고 단념하고 내버린 것이 나중에 중용(重用)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범속한 인간들의 눈에 무용으로 보이는 것이 도리어 대용(大用 크게 쓰임)으로 쓰일 수도 있다.
★혜전탈우
☆겉뜻 ; 남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그 소를 빼앗다.
☆속뜻 ; 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
☆유래 ;
춘추시대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자기 집에 놀러와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弑害)했다. 이 소식을 들은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군사를 일으켜 진(陳)나라의 수도를 공략하고 하징서를 죽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장왕은 내친 김에 진나라를 초나라의 한 고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장왕이 우쭐해 있을 때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있던 대부 신숙시 (申叔時)가 돌아왔다. 그가 장왕에게 업무 보고만 하고는 그대로 물러나려고 하자 장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하징서가 무도하게도 그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과인이 쳐들어가 그를 죽였다. 제후(諸侯)와 현공(縣公)들이 모두 축하해주는데 그대만 아무 말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신숙시의 대답은 이랬다.
"임금을 시해한 죄는 물론 크지요. 그를 처단하신 전하의 의리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해서 그 소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남의 소가 무단히 내 밭을 짓밟았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그렇다고 남의 소를 빼앗는다면 지나친 처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후들이 전하를 칭송하는 것은 죄지은 자를 징벌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를 이 나라의 한 고을로 만든 것은 남의 부(富)를 탐낸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징벌하면서 남의 땅까지 탐낸다면 이게 옳은 일이 되겠습니까?"
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과인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군. 지금이라도 돌려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 신하에 그 임금. 장왕은 빼앗은 진(陳)나라를 즉각 원상 회복시켜 주었다.
★호가호위
☆겉뜻 ;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리다.
☆속뜻 ;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의 비유.
☆유래 ;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날 선왕은 위(魏:梁)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 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諸國)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 혹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러면 들어 보십시오. 『어느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하신 천제(天帝) 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 와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었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背後)에 있는 초(楚)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의 강병(强兵) 입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阿附)로써 영신(?臣)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