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과 왕의 신비로운 놀이터, 초선대에서.
[데일리안 김대갑]마애불은 석불의 일종으로 흔히 자연의 낭떠러지나 큰 돌에 불상 등을 음각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양식은 BC 3세기경에 인도에서 처음 나타났다. 인도의 아잔타 석불이 그 대표적인 양식이며 중국의 유명한 돈황 석불도 마애불 양식이다. 이 석불들은 대개가 거대한 불상들인데, 우리나라의 마애불도 그 규모나 크기가 자못 장대하다. 우리나라의 마애불 중에서는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유명하며, 경주 남산의 마애불 군상도 꽤 볼만한 석불이다. 부산의 경우에는 근래에 지어진 금정산 남단의 석불사에서 이런 마애불상을 만날 수 있다.
◇ 초선대 입구 |
그런데 경상남도 김해의 삼안동에 가면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마애불상이 초선대의 암벽위에 소박하게 새겨져 있다. 혹자는 이 마애불상의 존재야말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곳이 가야라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거불 양식에 불과하다면서 앞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마애불을 놓고 오늘도 여러 학자들과 향인들은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는 초선대에는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흔히 ‘무슨 대’라고 하면 고풍스런 정자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초선대는 그런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숲과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선대는 말 그대로 하자면 ‘신선을 초대하는 대’라는 뜻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초대했다는 말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 초선대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눈에 뜨인다.
◇ 초선대 내부 |
‘옛 말에 이르기를, 가락국 거등왕께서 칠점산의 담시선인을 부르시면 담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함께 즐겼다. 이로 인하여 초선대(招仙臺)라고 하였다. 그때 왕과 선인이 앉았던 연화 대석과 바둑판 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칠점산(七點山)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으며 산이 칠봉(七峰)인데, 칠점(七點)과 같으므로 칠점산이라고 이름 하였다.’
초선대와 관련된 설화는 바로 이 기사에서 비롯된다. 그럼 거등왕과 담시선인은 누구인가? 거등왕은 가락국의 2대왕이라고 전해지는데, 주지하다시피 가락국의 첫째 왕은 김수로왕이며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중 첫째가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 셋째는 허왕후의 성을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따라 일곱 부처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등왕은 김수로왕의 첫째 아들이란 말이다.
◇ 초선대 마애불 |
담시선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선’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이 칠점산이라고 했는데, 이 칠점산은 부산 강서구 대저동의 어느 곳에 있었던 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담시선인에 대해서는 여타의 사료에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국선도에서는 이 담시선인을 박혁거세의 선맥을 계승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어 아주 흥미롭다.
즉, 담시선인은 박혁거세를 보좌했던 ‘고공선인’의 선맥을 계승한 사람으로서, 옥처럼 맑은 얼굴과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물계자는 신라 화랑도를 창설한 사람이며 제자인 원광법사로 하여금 세속오계를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국선도의 주장은 명확한 증거나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초선대’라는 명확한 유적지에 관계된 인물인지라 그 신비한 모습을 추론하는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 초선대 금산사 |
어찌 보면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아득히 먼 그 시절에 친구인 거등왕의 초대를 받아, 푸른 바다위에 조각배 하나를 띄우고 옥쟁반에 굴러가는 맑은 거문고소리를 내며 나타난 신선이라. 아마 그 신선의 주변에는 백설기처럼 눈부신 학들의 군무가 펼쳐졌을 것이다.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의 푸른빛과 학들의 군무에 휩싸인 채, 녹음이 우거진 숲 속의 바위에서 고요히 바둑을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그 신비한 광경이 우리의 머리에 투명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비록 사실이든 아니든 초선대 설화는 우리의 정서를 풍부히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초선대의 마애불은 둔탁한 암벽 끝에 3cm 두께의 선으로 얕게 새겨져 있는 불상이며 이 불상이 누구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설에는 거등왕 혹은 장유화상의 초상이라고 하지만, 불상의 전체적인 형상을 보건대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불상은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를 한 모습이며, 불상의 뒤쪽에는 두광과 신광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양쪽 어깨에서 무릎까지 옷자락이 풍성하게 드리워져 있다.
◇ 초선애 원경 |
현재 이 마애불 주변에는 ‘초선대 금선사’란 작은 절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애불 앞에는 불단이 놓여 있어 신도들로 하여금 경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금선사의 주지스님은 ‘돌배를 타고 부처님 오시다’라는 책을 통해 금선사과 마애불의 역사가 1500년을 상회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 진위여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마애불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새겨진 ‘족적’이다. 스님은 이 족적이 부처님의 발바닥 자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애불과 금선사가 고대 인도에서 가야로 불교가 처음 전래된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역시 그 진실이야 알 순 없지만.
어쨌든, 세간의 평가나 주장이 어떠하든 간에 초선대의 마애불은 오늘도 웃을 듯 말 듯한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어천과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전체 높이 5.1m에 4.3m의 몸체를 자랑하는 마애불은 경남 유형문화재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재라는 위상과는 달리 시내 주택가와 공장 주변에 둘러싸여 있어 쓸쓸함괴 을씨년스러움을 안겨주고 있다.
상상과 신비로 가득 찬 금관가야의 고도, 김해. 이 도시에는 경주 못지않은 훌륭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런데 1500년 전 금관가야가 신라에게 패망한 이후, 김해는 잊혀 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신라의 고도로써 엄격한 보호를 받는 경주와 달리, 김해는 금관가야의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홀대받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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