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잃어버린 문화재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재들

고양도깨비 2006. 12. 12. 18:22

 

 

문화재명
사진
설명
몽유도원도
  일본 천리대 중앙 도서관 소장
1447년 작품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작품
묵란석첩
  조선시대 조희룡
먹으로 그린 난초와 돌 그림을 모은 책. 모두 24폭으로 구성된 절첩으로 2폭씩 한작품을 이룸. 주사 김정회와 불과 세살연하로 산수를 비롯해 묵란과 묵죽모두에 능했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외형만 닮았지 본질적인 내면은 전혀 다르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음. 하지만 그가 추구한 예술세계는 스승과 구별되는 새로운 감각의 미감이 보기도 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간에 걸친 조선왕조의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이다.
월정사 주지가 보관해오던 이 오대산 사고본은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등에 의해 약탈당해 일본으로 옮겨졌다.
3천6백 책이던 귀중한 실록은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고 47책만이 남아 도쿄대 도서관 한켠에 방치돼왔다.
귀거래도
  조선시대 강희안
사서화의 삼절로 지칭되는 강희안은 15세기 조선초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인화가이며, 조선중기 화단을 크게 풍미한 절파계 화풍의 선구자이다.
이 그림은 벼슬을 사직하고 전원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귀향하는 ‘귀거래사’를 지은 도잠이 주인공.
견갑형동기
  청동기시대,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토 거북이등껍질 모양의 청동기. 한국식 동검문화 성립기의 것으로 보이는데 나팔형동기와 함께 요령지방의 정가와자유적에서 유사한 청도기가 출토된 바 있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문화의 요소로 생각됨. 사슴 등의 형상문이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보이기 때문에 사냥 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
지태흑칠새우문오합
  고려시대
지태란 종이와 같이 매우 얇게 만든 도자기. 다섯 개의 합(넓은 그릇) 위에 흑칠을 하고 뚜껑 표면과 측면에 새우를 그렸음. 목형위에 종이를 여러 겹 발라 완성하는 지도기법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보임. 이 오합과 같은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상감투각구갑문화장상자’와 ‘목심흑칠화장합’등이 있다.
금동인장
  조선 18세기에서 19세기
거북모양의 금도장. 한수정후인이라는 한자가 양각되어 있다. 한수정후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관우에게 내려진 봉호이다. 이 인장은 거북으로 꼭지를 하였으며 거북꼭지 인장양식은 임금의 어보와 유사하여 관왕묘에서 사용하기위해 왕실의 제도에 따라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장이 거북꼭지 형태를 가지 시작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 5월에 명나라 태조가 도장 꼭지가 거북의 모양인 금도장을 보내온 이후로부터 보인다.
홍칠십이각풍혈반
  조선 19세기 말
12각 반면에 8각의 판각다리, 풍혈(바람구멍) 모양을 새겨 붉은 칠을 한 상.
8각 다리에는 방형, 원형, 만자, 여의두문 등을 투각하여 이동시에 손을 넣어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다리 아래쪽 모서리마다 망두형감잡이를 대었다. 홍칠은 조선시대 후기 궁중용으로 사용된 칠이다.
화각합죽선
  조선 19세기
화각이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쇠뿔을 오려 아주 얇게 덧붙인 것으로 베갯모, 참빗 따위에 응용되는 기법이다. 합죽선은 죽피를 맞붙여 40-50개의 부채살을 갖춘 대형으로 대와 수공이 많이 소요되는 최고급 부채였다. 이 부채는 부채살에 박쥐를 낙죽하고 변죽에는 화각을 댄 상류층 여성용 부채이다.
청자음각초화문화형탁잔
  고려 12세기
음각(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이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기법)으로 꽃을 새겨 장식된 탁잔(잔과 받침) 세트로 투명한 청녹색 유약을 발라 만든 청자.
잔과 탁은 모두 구연부를 8엽 화형으로 다듬었으며 특히 잔의 몸체는 골을 눌러 화판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외면의 음각문은 일정한 굵기의 가는선을 사용하여 부드러우면서도 도안적인 장식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잔 받침면 언저리를 인화기법으로 연주문 장식을 돌렸다. 잔탁의 이러한 형식과 기법은 금속기를 모델로 한 대표적인 예로 전성기 고려청자의 수려함을 잘 보여준다.
동판금강야차명왕상
  통일신라 9세기
- 금강야차 : 사찰 문의 좌우에 서서 수문신장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수호신
- 원래 불상을 모셔두는 방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임.
- 전체형태는 긴 사각형으로 상부에 목조건물의 지붕부를 표현,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하며, 상호는 무섭게 표현되었음. 네 개의 팔을 표현했는데 두손에는 긴검을 들었고 다른 두손은 가슴에서 모아 쥐었다. 옷 주름이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발 아래에는 연화좌가 표현되었음.
은평탈육각합
  통일신라
출토지가 경남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매우 희귀한 유물로 우리나라에는 없는 형태이기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지름 7.5-11.2cm에 높이 7cm인 이 유물은 나무에 흑칠을 하고 은판을 오려 붙인 상자로, 바닥을 제외한 7개 면에 흑칠을 하고 은판 포도 당초문을 붙여 장식했다.
※ 몽유도원도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제외한 위의 유물들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의 일부입니다.
일제강점기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을 역암한 일본인 실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22년 ~ 1952년에 걸쳐 한국문화재를 수집하였고,
오구라 컬렉션 한국 관련 유물은 고고, 회화, 조각, 공예, 전적, 복식류 등의
다양한 분야와 각 시대를 망라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 비화

- 이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고증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일본에서 몽유도원도를 가장 오래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은 구주 가고시마 출신의 시마즈 히사시루시이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기록은 몽유도원도의 부속문서인 ‘감사증’에 나와있다고 하는데요. 이 증서는 1893년 11월에 발부된 것으로 당시 소장자가 시마즈로 되어있고, 또 ‘미술상의 참고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함’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1893년 이전에 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몽유도원도에 대한 아픈 일화도 몇 가지 있는데요.
1947년경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가 몽유도원도를 구입할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너무나도 어려운 국내 사정으로 수천달러에 이르는 값을 지불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만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는 현재 몽유도원도를 소장하고 있는 덴리대학교로부터 몽유도원도를 빌려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를 했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그림이 훼손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사진조차도 못 찍게 했다고 합니다.
이 이후로 몽유도원도는 이름과 사진자료로만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