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잃어버린 문화재

잃어버린 우리의 국보들

고양도깨비 2007. 3. 10. 01:28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

    일본을 넘나든 시련의 탑
       일본인은 고분의 유물 뿐만 아니라 옛 절과 석탑, 불상, 범종, 기타 불교미술품과 책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탐을 내어서 한국의 모든 종류의 문화재가 참혹한 수난을 받았다. 1906년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 다나카는 개성에서 50리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경천사터에 서 있던 십층석탑을 일본으로 운반했다. 이미 폐허가 된 경천사지에는 고려시대의 특이한 대리석탑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높이가 13m도 넘는 거대한 탑신마다 온통 섬세한 부조를 새겨놓은 걸작이었다.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하사했다. 대리석탑을 서해로 해서 도쿄의 다나카 대신의 정원에 옮겨라."라는 명령을 앞세워 석탑을 마구 해체, 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양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렸다가 인천으로 운반했고, 다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 반출시킨 것이다.
       그러나 경천사 십층석탑의 불법반출 사건은 금새 소문이 나면서 양심있는 일본인 사이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누구보다도 엄중하게 그것을 지적한 사람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였다. 그는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을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었다." 라고 주장하며 다나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다나카는 몇 년동안 석탑 반환을 거부하다가 여론의 압역과 조선총독부의 계속적인 반환요구에 굴복하여 다시 반환하였다. 탑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운반과정에서 이미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다시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의 위치인 근정전 동쪽회랑밖에 모습으로 보수되어 다시 복원된 것은 40년이 흐른 1960년의 일이었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

    다시 볼 수 없을 위기에 처한 걸작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대 유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750원을 주고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파격적인 매수액에 놀란 주민들이 뒤늦게 불법행위임을 깨닫고, 이어서 당국이 개입하여 그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석등은 한동안 전남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1937년 서울 박물관으로 올라와 그해 11월 경복궁 안에 복원되었다.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을 여러 곡절 끝에 다시 보게된 것이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

    상륜부를 영원히 잃어버린 비운의 석탑
       경주 근처인 월성군에 위치한 국보 제40호의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1911년 약탈될 뻔했다. 수 명의 반출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 놓았을 때,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가고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후 이 십삼층석탑은 땅에 내려진 탑재를 올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십층의 꼴로 서있었다. 그 와중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 버리고 말았다.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부도의 내부 유물을 절취당한 대표적인 사례
        1934년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는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당시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던 고달사지 부도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부도 전방에 있던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에 세워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으로 들어올린 후, 그 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유물을 넣었을 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석물을 운반하여 석물을 약탈했던 일본인들은 이렇게 탑 속에 있는 유물만 꺼내는 수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탑이나 부도를 밀어 버리거나 무너뜨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유물을 훔쳐갔다. 석탑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여, 불법반출의 화를 면했던 석물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그들은 탑 속에 있는 금동제 불상이나 보탑, 합, 기타 사리병을 약탈하고 그 과정에서 탑이나 부도는 파괴되었다. 심지어는 고려시대의 현화사 칠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훔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하여 석탑을 폭파하기까지 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일본인 불법자들이 약탈하여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했던 걸작품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입수했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또 하나의 반가상이 어디에서인가 불법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데라우치 총독에게 기증형식으로 진상하게 되었다. 총독 관저로 들어간 이 반가상에 대해서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었고, 다만 경상도에서 발견된 듯하다는 추측에 그쳤다.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과 출토지를 말하려 하지 않았고, 약탈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인멸시켰기 때문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인 불법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반가상은 데라우치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던 해인 1916년 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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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십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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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산성 쌍사자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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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지 십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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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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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백제의 불상인가, 신라의 불상인가?
        현재 한국의 국보중의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 2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78호와 제83호가 그것인데, 이 유물들은 어느 지역 어느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출처가 분명치 않다. 국보 제83호는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당시로서는 어마마한 거액인 2600원을 주고 일본 약탈자들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총독부는 유물 약탈의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채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범인들은 원위치와는 거리가 먼 듯한 다른 지역을 말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것은 악당들의 고의적인 증거인멸 술책이었다. 이후 전문가들은 뚜렸한 증거나 자료도 없이 범인들이 퍼뜨린 풍문에 따라 경주 남쪽에서 출토된 것이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경주지역 출토설'이 신뢰성이 없는 것은 1925년 이네다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예술 연구'라는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1910년대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 와보고는 십만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이네다는 합방 전부처 한국으로 건너와 충남 계룡산에 머물면서 한국의 불교움놔와 유물을 조사한 사람이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그만한 확실한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만일 경주가 아니라 충남의 어느 벽촌이 정확한 반출지였다면 반가상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일찍이 고유섭은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라고 했고, 가장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한 황수영은 '역사학보'에서 '충청 백제설'이 전혀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직 '신라 경주설'만이 신봉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유물을 거액을 주고 다시 사들이게 만든 일제의 만행도 통탄할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유물의 근거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자칫 역사를 왜곡되게 만든 일본인의 행위에 더욱 분노할 일이다. 반가상은 과연 백제불인가, 신라불인가?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송되어온 석조불
        한일협정으로 1966년에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과거의 약탈 및 불법반출 문화재 가운데 도쿄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한송사 석조보살죄상은 귀국 즉시 국보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희귀한 백대리석 조각품으로, 목이 부러졌으나 깨끗이 붙였고, 이마의 백호로 끼워졌던 보석이 탈취당한 것만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형태의 걸작 미술품이었다.
       한송사가 폐사된 후 인근의 칠성암이란 암자에 옮겨져있던 것을 1911년 와다라는 강릉측후소 기사가 반출했다. 그는 불상을 양도하라고 윽박을 지르고 약간의 돈을 주고서 좌상을 탈취하였다. 그리고는 주문진 선착장으로 운반한 뒤 배에 실어 도쿄의 제실박물관(지금의 국립박물관)으로 보냈다. 그후 이 석불은 '와다가 기증함'이란 카드와 함께 55년동안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었다.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

    행방불명된 경판의 일부
        1969년 문화재관리국의 조사를 위탁받은 연구진은 처음으로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팔만대장경판 중 10여장이 분실되었음을 알아냈다. 보고된 분실 경판은 18장인데, 이 숫자 역시 불확실했다. 그것을 언제 어떻게 도난당했는지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과거 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1937년에 해인사의 주지가 미나미 총독에게 4장의 대장경판이 도난되었음을 신고했었다. 당시 팔만대장경의 인경 때에 작업장의 경비책임을 맡은 자는 악질 순사부장으로 유명했던 일본인이었다. 총독부의 조사에서 청취된 증언에 의하면 그 순사부장이라는 자가 경판을 몇 장 빼갔가고 했다. 그 자의 집에서 누군가가 경판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나,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경판의 일부가 분실된 채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순금귀고리(국보 제90호)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을 빚어낸 도굴
        1910년을 전후해서 10여년간 개성과 강화도 부근의 고려고분과 1925년을 전후한 대동강 하류의 낙랑고분의 대대적인 도굴은 지난날의 한국의 매장문화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되고 수탈되었는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수만 점 혹은 그 이상의 유물이 조직적으로 마구 도굴된 것이다. 이후 일본 무법자들은 낙동강 하류와 경주지역에 무수히 널려있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17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시니라는 일본인 조사보고서에서 약 1천기 이상의 고분이 완전히 도굴되었으며, 고분이 도굴로 인해 황폐된 참상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고 썼다. 그는 또 다른 증언에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고분 도굴범은 조선인 중엔 없으며, 모두가 도의를 상실한 일본인의 소행'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이마시니는 서울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가야유물이 일본인에게 팔려가는 것을 보고 메모를 작성했는데, 그 목록에는 순금귀고리, 순금팔찌, 곡옥, 관옥, 유리옥, 기타 옥류, 검두, 무기류, 마형대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곡옥과 순금팔찌, 관옥 등은 교토대학으로 들어갔다.
       이같은 무법 도굴이 성행하자 총독부는 뒤늦게 아직 성한 고분 100여기를 서둘러 발굴했다. 이 때 부장품은 마차 20대, 화차 2칸 분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파헤친 수천 기의 고분에서는 출토 유물이 과연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 도굴품들은 즉시 전국 각지와 일본인 수집가의 수중으로 사라진 것이다. 순금귀고리의 경우만 적은 기록에 의하면 학술적 발굴조사를 거친 것만해도 70여쌍에 이른다니, 도굴된 수는 대단히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영국인 개스비가 일본인에게 샀던 것을 간송이 되사온 국보
        1914년 전후로 일본 도쿄에 변호사로 정착한 개스비라는 영국인은 고려자기에 대단한 매력을 느꼈던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값을 치루고라도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손에 넣는 수집에 있어서 정열적인 사나이었다. 그는 고려자기에 있어서 대단히 높은 안목을 지닌 수집가였던 동시에 문화재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가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고려자기에는 고려시대의 걸작인 '청자삼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과 '백자박산향로(보물 제238호)'가 들어 있었다. 그와 일본인의 다른 점은 개스비는 문화를 즐기고 애호했던 문화재 수집가였던 반면,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물을 부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불법반출, 도출, 강탈 등의 온갖 수법을 동원하여 유통시켰다는 점이다.
       개스비가 일본과 서울의 일본인들에게서 샀던 고려자기들은 1937년 그가 일본을 떠나면서 간송 전형필이 되사들였다. '개스비 컬렉션'으로 불리는 그의 수집품들은 방대한 수량의 최우수 작품으로 이름이 높았고, 전형필은 일본에 있는 골동품 상인을 통해 그가 고려자기를 판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개스비 컬렉션이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개스비는 일본 안의 정치적인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머지 않아 패망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는 자신의 수집품을 모두 처분하고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곧바로 일본으로 달려가 개스비의 고려자기를 어마마한 거액을 주고 모두 되사들였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십 몇억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한다. 개스비는 훌륭한 한국의 유물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손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환영했다고 한다. 전형필이 되사들인 개스비 컬렉션에는 국보 '창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과 보물 '백자박산향로' 뿐만 아니라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청자오리청수적'(국보 제7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보물 제241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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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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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사 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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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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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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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유죽연로
원앙문정병>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

    해방 직후 일본인에게서 압수한 불상
       19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서울에 정착해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은 한 쌍의 완벽한 걸작 백제 유물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군정청으로부터 박물관장을 위촉받은 김재원은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어 백제불상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는 돈을 주고 사가라고 대답하였다. 김재원은 미군 헌병의 협조를 얻어 백제 불상을 되찾아 왔다.
백자철사포도문호(국보 제107호)

    일본 패망후에  일본으로 유출될 뻔한 문화재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7호 조선백자 철포도문항아리의 해방전 수장자는 조선철도 회사의 전무가된 시미즈라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쫒겨가게 되자, 그는 많은 수집품은 제쳐두고 '철사포도문항아리'만은 숨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는 한지를 한아름 사오게 해서 항아리의 안팍을 겹겹으로 싸 깨지지 않게 한 후 가져가려 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않자 한국인 친구에게 잘 보호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시미즈가 떠난 1년 후, 골동품 가게에 한국인 친구가 팔려고 내놓은 것을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이 사들였다. 결국 장택상 컬렉션으로 들어간 철사포도문호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별장에 있다가 우연히 그것을 보게된 김활란(당시 이화여대 총장)이 그때 돈 1500만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그 직후 국보 지정이 되었다.

      
청자상감포도동자문동채주자 및 승반

    일본인에게서 950원이란 거액으로 창덕궁박물관에서 사들인 도굴품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의 장물아비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창덕궁의 고종 황제를 정신적으로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창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을 한국 왕실에 고가로 팔아 이중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 한 점에 보통 5원, 비싸야 10원에서 20원 정도가 그 시절의 고려자기 값이었는데, 1908년 '청자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을 창덕궁 박물관에 950원이란 거액으로 팔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우리의 것을 불법으로 파헤쳐 그런 식의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일본에 지불토록 한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창덕궁 이왕가박물관(1969년 국립박물관에 흡수됨) 컬렉션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위와 같은 경위로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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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음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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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사포도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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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진사포도동자문
표형병>
 
 
 
 
청자거북형수주(보물 제452호)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왕에게 헌상했던 도굴품의 하나
        서울에 일제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이래, 일본인의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은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야케라는 일본인 변호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일본인은 별로 없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자기를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직되었다. 이토는 틈만 나면 닛타라는 자를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몽땅 사자' 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서 몽땅 고려자기를 사서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가 동이 난 적도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고분 파괴외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켰다. 이토가 통감 재임 2~3년동안 그를 믿고 무법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청자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여 도굴사태는 절정기를 이루었고, 일본인 사이에는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되었다. 청자거북형 수주는1965년에 일본으로부터 반환을 받았다.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

    일본 요리집 정원에서 되돌아온 보물
        1906년 일본인은 불국사에서 섬세한 조각의 사리탑 하나를 일본으로 반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사리탑은 일본 도쿄의 '정양헌'이라는 요리집의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한국으로부터 불법 반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세키노라는 일본인은 일본잡지에 공개하고 그 해설을 실었다. 그 후 사리탑은 요리집에서 팔려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1933년 사리탑은 도쿄의 제약회사의 사장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몇 달후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불국사의 원위치로 깨끗하게 반환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은 아직도 그 행방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 안에 얼마나 있는지 그 수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팔각원당형부도(보물 제351호)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려시대의 부도
       서울 이화여대 총장공관 정원에 있는 부도는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보물 제 3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초기의 우아한 양식으로 그 원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경기도 양평군의 보리사터 부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서울의 일본인 집에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양평의 보리사터에서 일본인이 불법 반출해 온 것은 분명하나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없어 그저 '석조부도'로 명명되어 왔다. 1956년 과거 일제 때 증권으로 치부했던 일본인의 집이 팔리면서 이 집의 석물과 나무를 구입하게 된 이화여대 측은 정원 한쪽 구석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끼낀 부도도 함께 사들였다. 그런데 이것이 총장공관 앞으로 옮겨 세워진 후, 관계전문가의 주목을 받아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몇몇 전문가는 이 유물이 1911년에 일본인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춘 보리사터의 부도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 현지조사에 착수하여, 확증은 없지만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었다.  총독부가 1917년 반출 경위 조사보고에 따르면, 일본인 3명이 1909년 이 부도탑을 거액 120원을 받고 팔았고, 그들은 다시 일본인에게 500원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대경대사현기탑비(보물 제361호)

    비운을 맞은 신라말 고승의 기념비
        현기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의 스승이었다. 왕건이 신라를 멸망시킨 후, 왕건은 그를 양평의 보리사에 가 있게 했다. 보리사에서 그를 기념하는 탑들이 세워졌는데 그후 절은 폐허가 되고 탑들만 남아 있었다. 1915년 총독부는 대경대사 현기탑비를 총독부박물관(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현재 경복궁에 있는 현기탑비가 본래의 절에서 이탈한 경위이다. 양평 보리사터의 현기탑이라는 거의 확실한 결론이 내려졌으나, 일제 밑에서 가장 전형적인 수난을 받은 문화재인 것이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값나갈 유물을 위협과 공갈, 그리고 약간의 돈으로 매수하여 아무데서나 그것을 불법 유통시켜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 일본의 악질적인 고물상들의 행패를 역력히 알 수 있는 우리의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

     반출경위를 알 수 없는 고려 초기의 중요 유물
        해방전까지 서울 남대문 시장 근처에 살았던 일본인 와다가 자신의 정원에 가져다 놓고 즐겼던 고려 초기의 중요한 유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위치인 강원도 원성군 거돈사터에서 언제 어떻게 서울로 반출해 왔고, 또 어떤 경로로 와다의 집에 팔려갔는지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즉, 반출경위와 증거가 완전히 인멸된 것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은 1948년경 미군정청 미술고적 담당고문으로 와 있던 채핀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그 행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채핀은 과거에 총독부가 지정한 문화재의 소재지를 재확인하던 중 와다가 살던 집에 가보았으나 유물이 없어진 것을 알 게 되었다. 해방 후 누군가가 그것을 실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연구원들이 사라진 승묘탑의 행방을 추적하여 한국인의 별장에 실어간 것을 되찾아 와서 경복궁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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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거북형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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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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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원당형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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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대사 현기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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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불법반출의 위기 직전에 화를 면한 석탑
        1910년대에 인천 부회의원(시의원)으로 있던 일본인 고노는 충남 보령군 대천면의 폐사지에 서 있던 오층석탑을 불법 반출하여 자신의 마당에 가져다 놓았다. 그는 불법 반출 방법으로 조선인 하나를 돈으로 매수하여 그가 절터의 땅임자에게 가서 석탑을 사 오도록 시켰다. 그리고는 조선인에게 다시 사는 수법으로 무사히 인천 자신의 집까지 실어온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그 사실을 알고 보령군수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요구하자 고노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오층석탑은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노가 시의원이란 신분을 이용한 것이다. 오층석탑은 원위치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박물관으로도 오지 않았다. 그 탑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 수 없다.
       이 무렵 고노는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의 성주사터의 석탑에도 반출의 손길을 뻗쳤다. 그것은 인천으로 불법반출된 석탑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잡힌 또 다른 음모였다. 다행히도 성주사터의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성주사터의 오층석탑은 보물 제 19호로, 그리고 삼층석탑 둘은 보물 제 20호와 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57호)

    일본인 철도관리의 관사에 있던 석탑
       1968년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문화재대관'에 따르면 1924년에 원위치인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현위치인 경복궁으로 이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912~1913년에 일본인 조사가 세키노가 발표한 논문 '조선의 석파탑'에는 그전에 벌써 칠곡 절터에서 불법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후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일제의 파괴공작에서 살아남은 왜군 섬멸 기념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연합군의 반격으로 패색이 짙어가자, 조선총독부는 항일민족의식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를 모조리 파괴하려고 계획했다.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대첩비'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순신의 전승 기록을 새긴 '명량대첩비'를 말살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파괴 대상 기념비 목록을 작성하고, 도경찰부장이 임의로 철거시켜도 좋다는 비밀문서를 내려보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역사적인 항일기념유적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스런 일을 겪게 되었다. 황산대첩비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의 기념비는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었다. '명량대첩비'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타루비'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격파 기념비를 남김없이 파괴하도록 지시를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그것을 총독부에서 서울로 운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해남과 여수의 지방유지들이 알아본 결과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충무공의 대첩비들은 경복궁의 근정전 앞뜰에 깊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졌다.

     
굴불사지 사면석불(보물 제121호)

    파괴와 오욕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석불
        경주시 굴불사터의 자연암 사면석불은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부분과 오른쪽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진 불완전한 석불이다. 곧 '완전무법과 약탈의 시대'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사의 상징인 셈이다.
        1910년대에 반쯤 땅에 묻혀있던 것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온 무법자들에 의해 석가여래의 두상과 협시보살 전신상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자나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묵인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도 누구 하나 그 부분에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간송 전형필과 이홍직, 황수영 일행은 경주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지의 사면석불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때 간송의 지적으로 세밀하게 조사한 결과, 석불을 정으로 쪼아 떼어간 것을 확인하였다. 몇 해 후 일본으로 간 황수영은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 찍은 사면석불의 사진원판을 보고, 당시의 피해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일본인 무법자들이 떼어간 본존의 두상과 협시보살상이 어디에 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관덕동 삼층석탑돌사자(보물 제202호)

     한 쌍을 약탈당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진귀한 새끼사자 조각상
        경북 의성군 관덕동의 삼층석탑(보물 제188호)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마멸이 심한 암수 한쌍의 돌사자가 있다. 암놈의 높이는 52cm, 수놈은 35cm이다. 특히 암사자상에는 배밑 앞편과 앞발 사이로 들어가 젖을 빨고 있는 세 마리의 새끼사자가 귀엽게 곁들여져 있는데, 이런 표현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내 유일의 진귀한 조각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양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신대의 유물로 일찍부터 일본의 전문가들도 감탄했다. 1934년 네 마리의 돌사자를 조사했던 일본인 전문가 후지시마는 "동양에서 새끼사자의 조각품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이다"라는 감탄의 글을 일본의 건축잡지에 실을 정도였다. 문제는 1939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관덕동 삼층석탑을 분명히 장식하고 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들 중에서 산태가 양호한 한쌍이 일본인들에 의해 감쪽같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이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중 마멸이 심한 한 마리를 남겨놓고 나머지 세 마리를 가져간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탑을 해체한 후 탑재를 모조리 실어내가려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살기등등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고, 탑재는 주민들에 의해 원위치로 옮겨져 예전처럼 복원되었었다. 그러나 사자들은 그로부터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본인에 의해 한 쌍이 약탈당한 것이다. 총독부는 뒤늦게 관덕동 삼층석탑을 고적유물로 등록시키고, 한 쌍만 남은 돌사자를 현지 보존이 어렵다는 이유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도난당한 한 쌍의 돌사자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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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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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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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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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불사지 사면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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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동 삼층석탑돌사자>
 
 
 
 
 
 
 
 
보신각종(보물 제2호)

    일제 병기창에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수저, 밥그릇부터 사찰과 교회의 동종, 청동, 철불, 기타 금속류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서울 종로의 보신각종도 일제 병기창에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조선총독부의 앞잡이들이 앞장서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1944년 8월 총독부 앞잡이 단체였던 국민총력 경성연맹 회장이 전체 조선연맹 회장 앞으로 다음과 같이 보신각종의 공출을 건의했다. "결전하에서 금속회수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차제에 일반대중은 정신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가의 보신각 대종, 총독부 내의 동상 등이 아직 그대로 놓여져 있음은 당국의 진두수범상 일고를 요함. (중략) 그것들을 즉각 공출 처치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
       그러나 이 종은 총독부가 1934년에 보물로 지정하여 건드릴 수 없었다. 민족적인 민심을 크게 자극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더구나 원래의 보신각종은 임진왜란에 왜병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종각만 남은 터에 세조 13년(1468)에 주조되어 돈의문에 걸려있던 것을 임진왜란 후 가져다가 걸은 것이었다. 결국 보신각종은 병기창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가가스로 모면한 채 해방을 맞이했고, 오늘날에는 보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인비구주성 동종(보물 제11호)

    프랑스 함대가 가져가려던 동종
       강화군의 강화면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되어 온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프랑스로 실어 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까지 굴려 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괴산외사리 석조부도(보물 제579호)

    밀반출 직전에 구입한 부도
       부도의 원 위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이지만, 1930년대 말 인천으로 옮겨졌고 이어서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직전 전형필이 막대한 액수를 지불하고 구입,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이 있는 숲 속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때 쓰러져 있던 것을 1954년 2월 3일 전형필의 대상을 기념해 고고미술동인회(현 한국미술사학회)가 복원했다.
       삼층석탑은 기록 미상의 고려 시대 유물로서 역시 일본으로 밀반출돼 경매에 붙여지자 전형필이 당시 일본 재벌과 경쟁한 끝에 낙찰시켜 보화각 뒤뜰로 이전했다. 이 때의 정확한 액수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제박산향로(보물 제238호)

    영국인의 손에서 다시 돌아온 걸작
        소장자는 도쿄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였다. 그는 고려청자에 안목있는 수집가로서 꾸준히 작품을 모았다. 개스비가 서울의 골동품상으로부터 일본인 고관이 처분하려는 고려시대의 걸작을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엽 영·미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처분을 결심하게 된다. 처분을 예측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은 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급이 5~6점이나 포함되어 있던 개스비 컬렉션 전부를 인수받는다. 전형필은 이를 위해 공주 지방에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농장을 급히 처분했다고 한다.

     
금동관음보살입상(보물 제927호)

     해방 직후 일본인에게서 압수한 불상
       19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서울에 정착해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은 한 쌍의 완벽한 걸작 백제 유물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군정청으로부터 박물관장을 위촉받은 김재원은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어 백제불상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는 돈을 주고 사가라고 대답하였다. 김재원은 미군 헌병의 협조를 얻어 백제 불상을 되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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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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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비구주성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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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리 석조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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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박산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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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음보살입상>
  
 
석굴암 오층석탑

          
   석굴암에서 사라져 버린 오층탑
       1909년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를 방문하여 석굴암에 들린 이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석탑이 온데간데 없이 증발했다. 소네가 개인적으로 빼돌렸거나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 소네는 재임기간이 체 1년이 안되는 동안, 옛 책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일본 왕실에 헌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석굴암의 오층석탑도 같은 방법으로 갈취하였으리라 짐작한다. 소네가 가져간 한국의 귀중한 서적들은 1965년까지 일본 궁내청 서릉요(서고)에서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 하여 은밀히 보관되다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반환문화재의 일부로 돌아와 현재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경주의 미술에 대해 연구한 나카무라의 저서에 의하면 소네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불타의 뒤쪽 9면 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다. 쓸쓸히 대리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석굴암은 석탑을 약탈당한 이후,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석굴암의 오층소탑은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해방 후 국내 관계전문가들이 일본 안의 목적지를 백방으로 탐색해보았으나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석굴암 내부에 있던 10개의 감실에 안치되어 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이 도난당했으며, 복장유물을 찾기 위해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하기도 했다. 
다보탑 상층기단의 돌사자
             돌사자 네 개중 세 개를 약탈당한 비운의 돌사자
       석굴암의 오층석탑이 약탈당할 즈음, 일본인들은 불국사에서도 석조물을 약탈했다. 다보탑의 상층기단의 네 귀퉁이에 놓여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네 개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고 달아난 것이다. 당시 불국사에는 몇 명의 중들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을 위협하고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소네 통감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람 안내를 맡은 기무라는 1924년 '조선에서 늙으며'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경주에 내가 부임을 전후하여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을 주고 빼앗음)되어 일본 본토로 반출되어 있는 석굴 불상 2구와 불국사 다보탑 사자 3구와 등롱(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  기무라에 따르면 소네 통감은 석굴암의 보수, 보존을 핑게로 모조리 해체하여 서울로 운반하려고 계획했다는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
     
상원사 동종
    국보 해제 당한 가짜 동종
        1906년 일제침략의 일환으로 남산 기슭에 일본 불교 법당을 지은 일본인들은 아름다운 형태와 신비로운 음색의 한국종을 찾아내 가져올 흉계를 꾸몄다. 상원사는 의병들을 추격하던 일본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종각에 동종 하나만 걸려 있었다. 그들은 임시법당을 짓고 절터를 지키고 있는 중과 매매계약을 성립시켜, 마침내 1908년 서울의 일본절에 그것을 가져다 걸었다. 약 1.5m의 높이에 무게가 400관이나 나가는 육중한 대형 동종이었다. 그들은 동종을 가져오는 과정에서도 한국인의 방해로 세 번이나 운반이 중단되었던 것을 일본 헌병의 협조로 한강 수로를 돌아 남산으로 가져온 것이다. 총독부는 그것을 통일신라말기 또는 고려초기의 유물이라는 결론을 내려 보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해방 후 남산 본원사가 가지고 있던 상원사 동종은 조계사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일제의 평가가 그대로 존중되어 국보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2년 문교부 문화재위원회는 '그 종은 한국 것이 아니며 오랜 작품도 아니다. 일본의 악당들이 계획적으로 일본에서 급조한 것을 배로 싣고와서 한강에서 진짜 상원사동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한 가짜 상원사동종으로 추리된다'는 결론에 따라 정식으로 국보 해제를 선언했다. 현재 서울 조계사에 걸려 있는 가짜 상원사종과 바꿔치기한 진짜 상원사동종은 일본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선림사지 신라동종

    한국전쟁 중에 녹아 없어진 국보급 동종
      1948년 강원도 오대산의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국보급 신라동종이었다. 신라 애장왕 5년(804)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있던 이 동종은 '상원사동종(현재 국보 제36호)'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종으로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삼엄한 전투지구여서 접근이 불가능했다. 군의 협조를 얻어 월정사로 옮겨왔다. 그것은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종으로 종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현장 조사에서 출토지가 선림사터란 밝혀졌을 뿐 수수께끼의 이 동종은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무참히 녹아 버리고 말았다.

철채백화당초문매병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국보 도자기
         해방이 되자 일본인의 소장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장아무개라는 사람이 일본인 아가와 소유의 '철채백화당초문매병'을 입수했다. 징이무개는 미군정 말기에 수량과 내막을 알 수 없는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시키고 자신도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가 죽은 골동상인이었다. 과거의 지정문화재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국립박물관측은 그 고려자기가 유출되지 않았으나, 소유자인 장아무개는 일본에 가있고 물건만 박태식이란 사람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는 박태식에게 돈을 빌리고 담보로 약 50점의 고미술품을 맡겨주었는데, 그 중에 국보 고려자기(당시 국보372호)가 들어 있었다. 박물관 측은 장아무개의 허락을 받고 그 국보 도자기를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했고, 전시기간이 끝난 후 장아무개 측은 박씨에게 담보로 잡혔던 물건들을 도로 찾아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보 도자기는 영원히 사라졌다. 장아무개가 일본으로 반출시켰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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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1910년대의 석굴암>
 
오층석탑 하단대리석
<탑신을 약탈당한 것으로 알려진 석굴암 오층석탑 하단대리석>


다보탑 돌사자

<하나만 남은 다보탑 상층기단의 돌사자>
  
 
 
 
 
 
 
 
 
 
 

 
선림사지 동종

< 한국전쟁때 월정사에서 불타 녹아 버린 선림사지 출토 신라동종>

 
철채백화당초문매병
<한국전쟁때 행방불명된 철채백화당초문매병, 당시 국보 372호>
 
증심사 금동불상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한 쌍의 신라 불상
      무등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에 전해내려 오는 당시 국보 제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제212호의 '금동보살입상'이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현으로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었다. 1933년 증심사 오층석탑에 발견된 신라불이었다. 경찰서장은 금고 속에 석가불들을 모셔두고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경찰서장은 작전 임무를 수행하느라 금고속의 국보 불상 보호엔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그후 어떤 경위로 국보 불상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증심사 불상의 행방불명은 어떤 책임 추궁도 없이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고, 10년 후에는 국보재지정에서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건봉사의 국보들

           폭격에 불탄 고려시대 유물들
     지금은 휴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지만 한국전쟁 전가지는 38선 이북에 있던 강원도 간성의 건봉사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둘있었다. 일제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니금니엄화경' 권 46(당시 국보 제412호)과 정호 2년명(1214)의 '동제은상감향로'(당시 국보 제419호)가 그것인데,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 되었다. 화엄경은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졌고, 향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서 외금강 신계사의 유물수집소로 이전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당시 어떤 증언자의 말에 의하면, 향로도 한국전쟁 때까지 그대로 건봉사에 보관되어 있었고 절이 불탈 때 누군가가 밖으로 굴려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확실치는 않다.
보림사 대웅전

    한국전쟁 때 포탄에 맞아 불타 버린 건축물
     전남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소실된 것도 한국전쟁이 남긴 참화 중의 하나였다. 2층 팔작지붕에 속속들이 웅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던 조선 초기의 이 대웅전 건물은 당시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