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잃어버린 문화재

일본속의 우리문화재

고양도깨비 2006. 12. 12. 18:13
 
 
   ◈일본의 수월관음도◈


  고려시대에서 문화의 정수라고 일컫는 청자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불화다.

 
  호화롭고 정교하며 귀족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고려문화의 경향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그 당시 불화는 숭불정책의 영향으로 호국성의 비호아래 매우 화려하게 발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달한 불화는 이웃 중국에서 주문을 의뢰해 오기도 하였고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허나 이러한 국보급 문화재의 다수가 국내에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수월관음도 역시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회화작품으로 섬세한 기법과 우아한 색채..

 
  그리고 금니와 은니의 적당한 사용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살갗이 드러나게 흘러내리는 투명한 옷자락 사이로 관음보살의 자태를 짐작할 수 있으며..

 
  부드럽게 왼쪽 다리를 올리고 유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에서..

 
  문양 하나하나에 쏟아 부은 정교함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정면이 아닌 약간 왼편을 향하여 우아하게 앉은 자태와..

 
  연꽃 위에 올린 오른발 아래에 위치한 동자승을 쳐다보는 그윽한 눈빛이 한없이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 불화는 4미터가 넘는 높이를 가진 초대형 규모라는 점에서도 압도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림 자체에서 배어 나오는 아름다움에 저절로 고개가 올라간다.


 
(연대:1310년, 크기;419.5 x 254.2cm, 비단채색, 일본 경신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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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조선초기 최대 화가인 안견이 그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의 풍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안견은 단 3일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당시의 일반적인 화풍과는 달리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대각선을 따라..

 
  현실 세계와 꿈속 세계를 절묘하게 대비하였다. 


   


  그림은 커다랗게 네 개의 무리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번째 무리는 나지막한 야산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이며..

 
  나머지는 꿈속 장면으로, 도원의 바깥쪽 입구와 안쪽 입구..

 
  그리고 그림의 핵심인 도원의 경치를 보여준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듯한 풍경들이 조화롭게 하나의 총체적인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평평한 곳과 산이 험한 곳을 대비하여 산세의 웅장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또한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만 조감도법을 사용하여 넓게 펼쳐진 도원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또 세부 표현도 매우 뛰어나 붓이 세밀하고 정갈하며..

 
  지금은 떨어져나가 흔적만 살펴볼 수 있는 복사꽃 꽃술의 금가루를 제외하고는..

 
  변함없는 화려함과 영롱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 그림에 감탄해서 안평대군이 발문을 붙였고, 세종 때의 대표적 인물 21명이 찬시를 썼다.


 
  몽유도원도는 1592년 일본이 한국에 침략해서 빼앗아 간 것이다.

 
  그들은 매우 야만적이었는데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우리가 몽유도원도를 빼앗긴지도 어느덧 400년이 넘었다.

 
  그 동안 우리 것을 돌려달라고 말 한번 못 꺼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의 문화재들을 되찾아와야 할 것이다.


 
  (1447년, 비단 채색, 38.6 cm X 10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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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외규장각◈


 
  1886년 병인양요,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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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직지심체절요◈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수선오도(선정을 수행하여 불도를 깨달음)의 명귀에서 따온 것으로..

 
  쉽게 풀이하면 수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보다 70여년 앞선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의 간행에 조언한 문인은 석찬과 달담이고, 시주한 사람은 비구니 묘덕이다.


 
  1877년 주한 프랑스 공사로 서울에 부임한 바 있던 꼴랭드 드 쁠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이다.

 
  문헌에만 전해지고 있는 고려 금속활자본중 현존하는 유일한 책인 「직지」는..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를 창안 발전시킨 슬기로운 민족임을 실증해 준..

 
  일류문화의 유산인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