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세상

제 신장을 20대 청년에게 떼어줬습니다.

고양도깨비 2007. 6. 17. 11:24

제 신장을 20대 청년에게 떼어줬습니다

[오마이뉴스 조호진 기자]
 
▲ 새 결혼을 앞두고 김정명 목사님을 방문했다. 목사님께서는 아내에게 “부족한 사람이니 잘 거두어 달라”고 당부했다. 왼쪽부터 아내, 사모님, 목사님
"목사님 저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왜에… 어디 아파?"

"신장 기증 수술 날짜가 잡혔습니다. 오는 5월 31일 아침에 수술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래 잘했어. 그래도 아프긴 할 거야… 하나님께 기도할게. 편안히 수술 받아."


수술을 이틀 앞두고 김정명(58·여수은현교회) 목사님께 전화 드렸다. 늘 그렇듯이 몇 말씀 하지 않으셨다. 1년 반 전에도 신장 기증 의사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절차를 밟았지만 고지혈증 등 건강과 회사 문제로 중단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말씀 드렸을 때도 "그랬어?"라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신장 기증을 다짐한 것은 7년여 전이다. 당시는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며 떠넘겨진 억대의 빚에 시달리는 등 매우 곤궁하고 참담한 처지의 시기였다. 강퍅한 내가 무릎 끓고 기도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과 함께 '이분 곁에서라면 예수 믿을 만하다'는 오만한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이 절망의 늪에서 꺼내달라고, 그리하면 신장을 기증하겠노라고….

신장 기증을 마음에 새기는 데는 목사님의 영향이 가장 컸다. 목사님은 지난 1997년 6월 만성신부전을 앓던 어떤 분(20대 여성이라고 들은 적이 있음)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장기를 떼어낸 그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청빈'을 넘어 '무소유'를 꿈꾸는 목회자다. 재직 교인이 1천명 훌쩍 넘는 제법 큰 교회의 담임목사이면서도 교회가 제공한 고급 승용차를 거부하고 대신 고무신을 즐겨 신는다. 그 고무신을 신고 교회 곳곳에 켜두고 간 전등 스위치를 끄러 다닌다. 한 겨울에도 연료비를 아끼려고 목회실에 난방하지 않은 채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이렇듯 꼽꼽쟁이인 그는 독거노인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챙겨드리고, 매월 금식한 돈을 모아 북한 어린이를 돕고, 몽골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그는 교회가 대형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변의 작은 교회 교인들이 등록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교인은 늘어난다. 그러면 100~200명씩 떼어 교회까지 지어서 부교역자들을 독립시켜준다. 목사직 세습과 정년 연장과 번복 등으로 망신살 뻗친 한국교회에서 그는 60세에 조기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가난한 은퇴 목사들을 도우며, 젊은 목회자들을 올곧게 가르치는 수도원 생활이 여생의 소망이라고 했다.

7년 전 여수를 떠나 전남 광양, 서울 등지에 살게 되면서 그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 나눔과 정직을 강조하는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간혹 바늘처럼 찌르곤 했지만 그렇게 살진 못했다. 부끄럽게 살다가 7년 전의 약속을 뒤늦게나마 이행하게 됐다고 고백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다.

스스로 걸어 들어왔듯이 그렇게 귀가했으면...

▲ 수술 직후 병실에 옮겨진 상태.
다음은 지난 5월 28일부터 6월 6일까지 신장 이식 수술을 위해 서울 아산병원에 열흘간 입원했던 기간에 쓴 일지에다 첨삭한 글이다.

5월 29일 입원 둘째 날 CT촬영 때문에 어제(28일) 밤부터 금식했다. CT촬영을 위해 조영제가 투입되면서 온 몸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간호사가 사전 설명한 대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고통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러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촬영은 20여분만에 끝난 것 같았다. CT촬영을 시작으로 신장 이식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병원에 오니 상상으로 엄습해오는 것들이 있다. 수술하는 장면 속에서 피와 장기의 엉킴이었다. 떼어낸 신장을 갈비뼈 틈새로 빼내 다른 이에게 붙여주는 것이 신장이식 수술이라는 것을 언뜻 알았기 때문인가 보다. 같은 병실 옆 침대의 환자(형에게 간을 이식했다는 50대 기증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만만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위급한 앰뷸런스 실려, 들 것에 의해 병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걸어 들어와 입원 했듯이 평안한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귀가했으면 좋겠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굴뚝같다.

5월 30일 입원 셋째 날 홀가분하다. 휴가 온 기분이랄까? 병원 도서실(교양실이라고 함)에서 허영만의 <사랑해>,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 김동화의 <엄마> 등의 만화를 빌려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밥도 아주 잘 먹었다. 입이 궁금해 양갱과 과자, 요플레 등을 사다 먹을 정도로 식성은 좋았고 마음은 편했다. 신장 기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친 몸에 휴식을 충전하기 위해 입원한 것 같았다.

이날 오후 1시께 병실을 동관 83동 39호실로 옮겼다. 수술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저녁이 되면서 상황이 바빠졌다. 처치실에 불려간 나는 시트에 눕혀졌고 수술 부위에 대한 면도와 관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피 검사가 두 차례 있었다. 하나의 피 검사는 수술 과정에서 있을지 모를 과다 출혈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밤 9시 40분쯤 수술·마취 동의서 작성을 위한 설명이 있었다. 젊은 의사는 "환자의 신장 두 개 중 기능이 좋은 것은 놔두고 덜 좋은 것을 떼어내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환자의 신장은 양쪽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 혈관이 긴 왼쪽 신장이 수술하기 쉬워 그쪽을 떼어내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15cm(수술 이후에 보니 20cm 가량이었음) 가량 배를 가를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신장 하나를 떼어주면 두 개의 신장이 하던 일을 혼자 남은 신장이 해야 됨에 따라 급성신부전 증세가 있을 수도 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신장이 손상돼선 안 되므로 신장이 부상당하면 안 된다, 금연 등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수술 과정에서 흉막, 비장, 장 등이 손상을 입을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기증자가 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등 만일의 가능성과 주의사항에 대해 덧붙여 설명했다.

두려움을 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어지는 언어였다. 한가함과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긴장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수술 과정은 이렇다고 했다. 내일(31일) 오전 7시 15분 병실에서 수술실로 이동, 8시 15분께 마취, 8시 30분께 수술 시작, 12시경 수술완료. 신장 받게 되는 분은 광주에 거주하는 79년생 청년이라고 한다. 아내는 귀가했고 병실에 혼자 남아 수술 전야의 심경을 적었다.

신장 기증으로 인해 아내와 자식, 목사님, 교인 등에게 과분한 기도와 칭송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너무 고통스러우면 후회할 수도 있다. 고통은 나의 허약한 믿음을 흔들 수도 있다. 서원과 신장 기증 이행이 거짓되거나 우습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약한 인간은 결코 선할 수 없으며, 생명과 사랑을 온전히 나누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과연 칭찬받을 만한 일일까?

 
▲ 호흡 연습하고 있는 모습
5월 31일 수술 당일 새벽 5시에 깨어 온 몸을 씻었다. 성경을 펼쳐 놓고 잠시 묵상했다. 비참한 인생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자가 새 가정을 꾸려 자식을 잘 키우며 살게 됐다면 그래서, 신체의 일부를 내놓게 됐다면 그게 칭찬받을 만한 일일까? 지난 10년 동안의 굴곡 많던 삶이 회한처럼 스쳤다. 건강한 몸을 주시고 이날을 계획해주신 그분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아내는 고3, 중3 두 아들의 아침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수술실에 들어간 이후인 오전 9시경에 올 예정이다. 누구의 배웅도 없이 혼자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는 게 마땅치 않았는데 김해성 목사님(외국인노동자의집 대표)과 내가 다니는 교회의 정언용 목사님(하름교회),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정봉실 팀장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주었다. 위로와 기도의 참 맑은 목소리, 안타까운 눈빛과 격려의 손짓 등… 참 감사한 마음뿐이다.

새벽 6시가 넘어서자 의사가 코에 호스를 꽂으러 왔다. 점막을 잘못 건드렸는지 한쪽 코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렸고 숨쉬기가 거북했다. 난생 처음의 입원과 수술, 시간이 다가오면서 두 손이 모아졌다. 병실에서 이동 시트를 타고 수술실로 옮겨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누워 실려가면서 보는 병원의 불빛과 말소리 등 묘한 기분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두 목사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배웅한다.

수술 대기실은 웅성거렸다. 짙은 초록빛 수술 가운을 입은 간호사와 의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나 외에도 다른 환자의 수술이 준비되는 것 같았다. 간호사인지 아니면 의사인지 키 작은 여성이 '조호진씨'하고 호명한다. 환자의 동일인 여부를 최종 묻는 지문 확인이 있었다. 과거에 장기 매매에 의한 환자 바꿔치기가 있었고,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뒤로 환자 확인이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마취가 시작됐는지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6월 1일 수술 이틀 째 성한 배를 갈랐으니 육신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이가 주는 사랑과 위로는 육신의 고통을 갚음하고도 남았다. 사랑 받는다는 것, 어떠한 부담도 없는. 이렇게 평안한 사랑은 난생 처음이다.

그럼에도 통증은 괴롭힌다. 웬만한 고통은 호흡법으로 해결했지만 그래도 못 참겠으면 무통제 스위치를 사용했다. 나흘 치 무통 주사액을 이틀만에 사용해 버렸다. 무엇보다 소변보는 게 이렇게 힘겨운 일인 줄 몰랐다. 신부전증 환자들의 소변보지 못하는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꼈다. 소변은 보고 싶은데 통증 때문에 여러 차례 실패하고 잔뇨로 남겨야 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수혜자의 상태가 매우 좋다는 소식이었다. 같은 AB형인 그 청년과 나의 조직이 아주 잘 맞아 수술 상태가 좋다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신부전 때문에 고통이 컸다고 했다. 그보다는 동생이 신부전을 먼저 앓았는데 다행히도 어머니가 이식해주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기증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 동안 기증자 연결 기회가 세 번 있었는데 번번이 무산되면서 낙심이 컸던 차에 나와 연결됐다고 했다.

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가 와서 전해준다. 그의 어머니가 나를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부모도 주지 못했는데 전혀 모르는 남이 어떻게 신장을 떼어줄 수 있느냐,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심정을 전해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했지만 그래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대신 서로의 마음을 편지로 나누자고 했다.

가래 뱉기와 가스 배출에 성공

▲ 교회 식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수술과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6월 2일 수술 사흘 째 간밤엔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수술 직후보다 줄긴 했지만 몸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은 여전하다. 두 달 동안은 통증이 있을 것이라고 의사 선생께서 귀띔해준다. 무엇보다 가래를 뱉어내는 일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가래를 뱉어내려면 기침을 해야 하는데 수술 부위가 아파서 일렁이는 기침을 브레이크 밟듯이 억지로 중지시켰다. 그러나 가래를 뱉어내지 않으면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한다고 하니 어떻게 하든 처리해야 한다.

2일 밤 9시 넘어 진통주사를 맞은 뒤 가래 뱉기를 다시 시도했다. 수술 부위인 옆구리가 역시 아팠지만 그 곳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서너 차례 기침 끝에 시커먼 가래 덩어리를 뱉어냈다. 이날은 큰 일(?)을 해낸 날이다. 이날 오후 6시 21분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스가 배출됐다. 한마디로 방귀가 나온 것이다. 이제 미음이나 죽이 아니라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수술 이후 식사도 잘했고, 운동도 열심히 했고, 마음도 평온했기에 모든 게 잘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날 밤 의사가 전해준 말은 사뭇 긴장하게 했다. 신장의 정상 유무를 알 수 있는 크레아틴 검사의 정상 수치는 1.4인데 수술 직후 나의 신장 수치는 이보다 높은 1.7이라는 것이다. 수술 전에 설명했던 대로 급성신부전 징후가 보인다는 것이다. 홀로 남겨진 신장이 두 개의 신장이 해왔던 역할을 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아내에게 전화로 통보하니 의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6월 5일 수술 엿새 째 5일 새벽 4시 15분쯤 간호사가 수액을 떼어냈다. 수액을 떼어낸 것은 신장 기능이 정상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재차 강조했다. 수술 직후 정상수치를 벗어났던 신장이 어제 피검사 결과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오늘 피검사를 다시 해서 확인한 뒤 문제가 없으면 내일 퇴원하기로 했다.

월요일(6월 4일)인 어제는 하루 종일 잠만 자다시피 했다. 주일인 그제(6월 3일)와 토요일인 엊그제(6월 2일) 병문안 온 분들이 많아 휴식을 취할 틈이 많지 않았다. 그로 인한 피곤 때문이지 아니면 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입술은 부르트고, 눈은 충혈됐다.

퇴근 후 병실에 온 아내는 사흘째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진짜 환자 같다고 농을 걸며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 셔터를 여러 차례 눌렀다. 화장실 거울로 비춰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텁수룩한 수염과 초췌한 얼굴 표정 등을 보니 중병 든 환자 같았다.

아내도 감기 몸살에 걸렸다. 아침식사는 내가 담당해왔는데 수술 때문에 아내가 대신해야 했다. 아이들 아침식사 챙겨주랴, 남편 간병하랴, 회사업무 신경 쓰는 등 2중, 3중의 일에 지쳤던 것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몸살을 지독하게 앓았고, 급기야 목감기로 번지면서 말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를 일찍 귀가 조치했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직후인 밤 10시 넘어서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뭐 병원이라고? 어떻게 된 거야, 자네 몸이라고 자네 마음대로 수술을 해, 그래 그 몸 가지고 식구들 먹여 살릴 수 있겠어…" 등등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고 장인, 장모께는 이 일에 대해 일체 말씀드리지 않았다. 장모께서 전화했는데 내외가 집에 없자 어디 갔냐고 물었고, 큰아이는 별다른 생각 없이 '신장 기증 수술 때문에 병원에 갔다'고 말씀드리면서 사단이 나고 만 것이다.

민국이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께 축복과 평안이 내려지기를...

▲ 민국이 청년 어머니가 건네준 편지. 가족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6월 6일 퇴원하는 날 아내와 두 아들이 와서 병실을 정리한다. 열흘 간 묵었던 자리엔 방문객들이 가져온 꽃과 음료수 등이 남았다. 퇴원절차를 모두 마치고 나니 정오가 다 됐다. 40대 후반의 아주머니 한 분이 멈칫거리며 병실로 들어왔다. 신장을 이식 받았다는 '민국이' 청년의 어머니였다. 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가 '민국이 어머니가 꼭 뵙고 싶다고 하니 잠시 만난 뒤 퇴원했으면 좋겠다'고 기별해온 차였다.

신부전 환자였던 두 자식으로 인해 얼마나 애가 탔던지 그 아픔이 얼굴에 스며 있었다. 민국이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죄인 같은 심정입니다", "부모도 못 주었는데 어떻게 남이…."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민국이 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국이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다 잘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고 위로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얼굴도 성도 모르지만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10여 분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다음은 민국이 청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고생 많으셨죠! 이제 영원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두 사람을 맺게 하시고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아들을 위해 눈물 흘리신 어머님께! 가족을 위해 수고하신 아버님께! 형제께!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이 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 2007년 6월 6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눈 사람

다음은 민국이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의 일부이다.

제 아들에게 새 생명과 새 희망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너무나 미안하고 죄인 같아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어떻게 해도 표현하기 힘들고 갚을 수도 없다는 걸압니다.

님의 사랑이 저희 가족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웃고 살렵니다. 기증자 분을 기다리는 그 많은 환우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하고 염치없지만 저희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님의 사랑을 절대 잊지 않으며 님에게 받은 만큼은 절대 못 미치겠지만 나누려고 노력하며 웃으며 살렵니다. - 민국 엄마


마흔 여덟, 환승역에서

5년 넘도록 일했던 <오마이뉴스>를 그만두었다. 시민기자로 활동하던 지난 2002년 1월 1일 상근기자로 계약 맺어 일하다가 5년 5개월만인 2007년 5월 23일 사직하면서 시민기자의 자리로 원대복귀 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무대였던 만큼 떠남이 아쉬웠지만 마침 전환의 시점이어서 미련이 발목 붙잡진 않았다. 이 기사는 시민기자로 원대 복귀한 뒤의 첫 뉴스이다.

오는 7월 1일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선교단체이자 인권단체인 곳으로 출근해 일할 예정이다. 마흔 여덟의 세상사는 동안 버려진 자의 삶과 나그네의 피곤한 삶을 살기도 했으니 외국인노동자의 고단함과 억울함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아픔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그러한 마음을 시 한 편에 담아보았다.

나 이제 그만 가려네

내 지친 육신과 가난한 영혼까지 파먹고도

더 내놓으라고 더 내놓으라고

채찍질하는 탐욕의 이 세상

미련도 없이 서러움도 없이

나 이제 그 사내 따라 가려네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그 사내

제 교도 제 형제에게 여전히 쫓겨 다니는 그 사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도 떡을 달라면 떡을 주고

남루한 속옷마저 벗기었는데도 용서 하마

배신의 채찍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면서도 사랑 하마

머리 둘 곳 없어 외로움을 베고 누운 그 사내

어디를 가시는지 아직도 맨발인 그 사내

나 이제 그 사내 따라 가려네

- 졸시 '마흔 여덟, 환승역에서' 전문





덧붙이는 글
입원 기간 동안 친절하게 대해 준 서울 아산병원 간호사와 수술과 치료로 수고해준 의사 등 병원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간병인 아주머니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