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엇이든 다 만든다 / 위조

고양도깨비 2007. 3. 14. 19:12

“각종 증명서 다 만들어 드립니다!”

 

지난 17일 오후 2시, 중국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에 자리 잡은 하이디엔루 들머리. 10여명 사람들이 도로 양쪽 보도에서 행인들에게 다가가 ‘증명서 만들어 줍니다’라는 말을 낮은 목소리로 건네고 있었다. 한눈에 ‘증명서 위조 브로커’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때 30대 후반의 중국인 2명이 한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 브로커에게 다가가 영수증 크기의 종이를 내보였다. 물품 구입 영수증이었다. 이들은 브로커에게 “(위조 영수증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잠시 흥정이 오간 뒤, 380위안(4만6000원)에 가격이 정해졌다.

 

 

17일 중국 베이징 중관춘에 증명서 위조사업자들이 모여 있다.

 

이 브로커에게 다가가, “대학 학생증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길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학생증 정도는 정말 간단하다. 어느 대학 학생증이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대학 학생증은 카드형과 수첩형을 모두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수첩형 학생증은 50위안(6100원)을 요구했다가, 30위안(4000원)으로 가격을 낮췄다.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이 도입한 카드형 학생증도 위조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위조) 카드로 도서관과 식당을 출입하는 데 아무 문제없다”면서 “카드는 (위조가) 쉽지 않아서 300위안(3만9000원)을 받아야 하지만 200위안(2만6000원)에 해주겠다”고 말했다. 카드형 학생증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하루.

 

이어 그는 “졸업증명서는 안 필요하냐”면서 “어느 대학 졸업증명서든 말만 하면 다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인터넷에서 학위번호와 이름 검색이 되는 졸업증명서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졸업증명서는 위조 과정이 어려워 이틀이 걸리고 1만5000위안(195만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선심 쓰듯 8000위안(104만원)까지 깎아주겠다고 말했다. 일반 종이 졸업증명서의 경우, 하루 만에 만들 수 있고 300위안을 깎아 200위안(2만4000원)에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이 브로커는 외국인들도 중국 ‘주민신분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중국인의 명의를 도용해 만드는 방법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금액은 60위안(7000원) 정도.

 

그는 “나는 증명서 제조, 인쇄업자와 직접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가격을 가장 싸게 받는다”고 자랑하고는 “이곳에서만 9년째 일을 하고 있는데 백인, 흑인, 동양인 가리지 않고 모두 자주 이곳에 와서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그는 연락처를 적어 주면서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 “모든 증명서 위조 가능”, 위조단 활개 = ‘짝퉁 천국’인 중국에서 위조 증명서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각종 증명서를 쉽게 위조할 수 있고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있는 것.

 

전국 각지의 대도시에서는 증명서 위조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고, 도로 옆 보도블록과 공중전화부스, 광고판에는 증명서 위조관련 스티커가 어지럽게 붙어있거나 펜으로 씌어져 있다.

 

 

 

 

 

 

17일 중관춘 근처 광고판, 길바닥, 전봇대, 육교 난간 등에 위조증명서 발급 업자들의 연락처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최근 중국인들 가운데는 범죄나 도피를 위해 신분증이나 여권을 위조하는 것을 비롯해, 사업·취업 기회와 높은 경제적 수입을 노리고 학력증명서, 변호사증·회계사증, 제품합격증, 상장 등을 위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게 중국 언론의 분석이다.

 

위조, 매매되는 증명서도 다양하다. 주민신분증을 비롯해 출생, 결혼, 이혼, 학력, 독생자녀, 회사사직, 운전면허, 외국어능력 및 각종 전문직종 증명서까지 종류도 엄청나다. 게다가 위조수법도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버젓이 회사 간판까지 내걸고 하는 기업형 위조단도 늘고 있다. 이달 16일 중국 동북부 창춘시에서는 최근 몇 년 이내 가장 규모가 큰 증명서 위조 범죄단이 공안에 붙잡혔다.

 

‘동남아증명서’라는 간판을 내건 이들이 가장 많이 위조 해 준 증명서는 주민신분증과 영어4급증서. 아울러 박사학위 증서와 홍콩 신분증, 결혼증, 출생증 등도 만들어 줬고, 운전면허증, 차량번호판, 차량 통행증 등 자동차 관련 일체의 서류를 위조했다. 전국 각지 학교의 졸업증서 위조도 들어있었다.

 

기자증과 공안증 위조도 끊이지 않고 있다. 3월 초에는 ‘중국경제 모 신문사’의 위조된 기자증을 소지하고 기자 행세를 하던 남자가 공안들에게 붙잡혔다. 이 남자는 위조 기자증을 200위안에 주고 산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가짜 증명서가 활개를 치는 데는 중국 내에서 일부 증명서들이 각 성(省)별로 다르고,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해서 적발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그동안 중국에서 가짜 신분증을 제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규정이 없었던데다, 증명서 위조 비용이 싼 것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덕분에 증명서 위조업자들은 단단히 한몫을 챙기고 있다. 이달 초 베이징에서 위조 증명서 제조 혐의로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힌 진모 씨는 “장사가 잘 될 때는 하루 200여 건에 달하고, 연간 수입이 많을 때는 수백만 위안을 벌었다”고 말했다고 중국 언론이 보도했다.

 

이 같은 중국 내 증명서 위조는 한국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학, 결혼, 방문과 관련하여 한국에 오는 중국인들 가운데 가짜 서류를 제출해 비자를 받으려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것.

 

실제로 이달 초 대전과 충남지역 대학에 지원한 중국인 유학생과 어학연수생 600여명 가운데 100여명이 가짜 학력 증명서와 위조된 은행잔고 증명서를 이용해 한국 유학비자를 신청한 것이 법무부 대전출입국관리소에 적발되기도 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가짜 학생증’을 만드는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다. 주로 대학의 도서관, 체육시설을 이용하고, 베이징내 주요 관광지의 입장요금을 할인 받기 위해서다.

 

한국인들도 자주 찾는 자금성(고궁), 이화원, 만리장성, 민족공원 등 관광명소는 학생증 소지자들에게 입장 요금(30~90위안)의 절반까지 할인해 주고 있어서 일부 한국인들이 ‘위조 학생증’ 구입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증명서 위조가 기승을 부리자, 중국 공안 당국은 관련 법규에 위조 사범에 대한 처벌규정을 마련하는 등 단속과 처벌을 강화키로 했다. 이를 위해 최근 위조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을 담은 ‘치안관리처벌법’을 마련하고 이달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최근까지만 해도 증명서 위조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규정이 없어서 단속과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치안관리처벌법’에 따르면, 국가기관, 기업, 사업단위, 기타 조직의 공문, 증명서를 매매, 위조, 변조할 경우 구류(10~15일)나 1000위안(13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중국 교육부와 공안부는 올해 1월 전국적으로 치러진 2006년도 대학원 입시부터 처음으로 신분증 진위 여부를 감별할 수 있는 전자기기를 도입했다.

 

특히 중국 공안부는 주민신분증 위조 방지를 강화하기 위해 6월까지 기존 신분증 발급을 중단하고, ID카드 형태의 새로운 신분증을 16세 이상인 5억여 명의 국민들에게 2008년까지 발급할 예정이라고 이달 17일 발표했다. 이로써 올해 말까지 3억 명 이상이 새로운 신분증을 받게 된다.

 

◆ ‘가짜 신분증’을 만든 중국 수험생 = 중국인들이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목적이 신분증이 없거나 범죄에 사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진본이 있으면서도,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야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올해 칭화대학 대학원 입시에 지원했던 리우양(가명·여)이 대표적인 경우.

 

그는 지난 1월 14일 가짜 주민신분증을 가지고 칭화대학 대학원 입시장에 들어갔다가 적발돼 수험생 자격을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는 한국 기자와 만나 “위조 신분증을 만든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신분증 진본이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중국 칭화대학 대학원생의 주민신분증 진본과 리우 양의 사태를 보도하는 일간지 신징바오.

 

실제로 그가 보여준 주민신분증(제1대) 진본은 왼쪽 상단의 얼굴 사진 두상과 이름, 신분증 번호를 빼고, 성별, 민족, 출생 시기, 주소 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주민신분증을 자신의 호적 소재지에 있는 공안기관에서 만들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도 몇 해 전 자신의 고향인 장쑤성 리양시에서 신분증을 만들었다. 하지만 코팅을 한 신분증은 발급 당시부터 선명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 그는 대학원 입시를 한 달 앞두고 신분증을 꺼내 봤다. 사진과 신상명세가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입시 때 소지해야 하는 신분증의 상태가 안 좋아서 고시장 입장 자체가 안 될까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당장 본적지인 고향에 내려가서 신분증을 재발급 받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고향까지 내려가서 신분증 재발급을 신청하고 받기까지 최장 3개월이 걸리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결국 그는 지난해 12월 그는 베이징 중관춘에 가서 100위안(1만3000원)을 주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진본과 내용이 똑같으면서도 훨씬 선명했다.

 

리우 양은 입시 당일 시험감독관에게 가짜 신분증을 보여주고 고시장에 들어갔다. 오후 영어 시험 때 수험생들의 신분증을 검사하던 시험감독관들에게 그는 진본과 위조 신분증을 모두 보여 주고 자세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수험표를 압수당하고 수험생 자격도 취소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그는 “두 개 신분증을 다 가지고 고시장에 가서 자발적으로 사정을 설명했는데, 처벌이 너무 과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신분증을 발급 받기 위해서는 증명 사진도 지정된 사진관에서 촬영해야 하는 등 발급 과정이 번거롭고 효율성이 없는데다, 내 신분증의 경우처럼 오히려 위조 신분증보다 상태가 못한 때가 많다”며 불합리한 신분증 발급 실태를 꼬집었다.

 

리우 양 케이스를 취재해 첫 보도한 베이징 유력 일간신문인 ‘신징바오’의 한 기자도 비슷한 이유로 가짜 신분증을 만든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한편 리우 양의 사례는 신징바오, 중국칭니앤바오, 화샤시보 및 중국 중앙방송(CCTV) 등 중국 내 주요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하면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언론들은 “칭화대학 측과 입시 기관의 처벌이 부적절했다”면서 “리우 양을 구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