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 및 안스러운 이야기

대한항공 /KAL 007기 추락사고

고양도깨비 2007. 3. 8. 13:19
KAL 007, 풀리지 않는 의혹들
-1983년 대한항공 007기 추락과 생존자들에 관한 이야기
 
버트 슐로스버그 지음/홍종락 옮김
A5신변형/248면/8,500원
 
 
 
 
 
 
 
'KAL 007 추락 미스터리' -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1983년 8월 3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한 대한항공 007기는 목적지 김포공항에 도착하지 못했다. 비행기는 구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공중폭발했고,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자 269명 전원은 사망했다.
이것이 이 사건에 관한 공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양한 자료와 인터뷰 등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다!
 
“KAL 007은 불시착에 성공했으며, 생존자가 있었을 것이다. 소련 정부는 그간 극악한 거짓말을 해 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생존해 있을 승객들 귀환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절실하다” -CIA/공화당 의원 연구보고서
 
    - 이제껏 알려진 공중 폭발이나 해상 추락한 여객기들과 달리, 해상에 떠다니는 시체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 공중 폭발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불에 탄 자국이 회수된 비행기 잔해나 잠수부가 바다에서 본 잔해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잠수부들은 기내에서나 가라앉은 여객기 주변 어디에도 시체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이를 보고했다(그러나 어떤 잠수부는 목이 없는 몸통을 봤다고 보고했다. 잠수부들의 모든 보고를 통틀어도 시체 파편과  ‘마주친’ 횟수는 열 번 정도에 그친다).
    - 앵커리지 공항 관제소의 관제사는 그날 밤 다른 항공기 위치는 다 기록했으면서, 왜 규정을 어기고 KAL 007(과 연달아 출발한 KAL 015)이 케언 산 지상점에서 이미 6.6마일 항로 이탈한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 왜 KAL 007 조종사들은 항법 보조 장치들(관성항법시스템, VORTAC, 수평위치지시계)을 보고도 점점 더 항로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 캄차카 반도 연안 바로 근처에 있었던 RC-135(정찰기)는 긴급 주파수 송신으로 교신할 수 있었는데도 왜 KAL 007에게 경고하지 않았을까? 왜 RC-135는 앵커리지 공항의 항공 관제소에 KAL 007의 소련 완충 지대 진입을 경고하지 않았을까?
    - 뉴언햄 곶과 로만조프 곶에 있는 미 공군 레이더 기지 담당자들은 규정과 달리 왜 앵커리지 항공 관제소나 다른 관제소에 KAL 007의 항로 이탈을 경고하지 않았을까?
 
KAL 007 탑승자 유가족 가운데 한 사람인 저자는 《KAL 007, 풀리지 않는 의혹들》을 통해 이 의문에 조목조목 답하고 있다. 진실로, 이 사건은 구소련 전투기의 단순 오인 공격이며 공중폭발로 인해 생존자 전원이 사망했을까? “신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도서 12:14).
 
"……아침 뉴스에서 우리는 끔찍한 사실을 접했다. KAL 007기가 소련 공군에 격추당했으며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였다. 뉴스에서 슐츠 국무장관이 사건 전말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똑똑히 기억난다. '여객기는 소련 미사일에 요격당해 고도 3만 피트(9,144미터) 상에서 12분 만에 추락했습니다.' 12분이라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도라면 떨어지는 데 1분도 안 걸릴 텐데. 의아했지만 그때는 '내가 뭘 알겠는가' 하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제대로 알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벤 토리/‘KAL 007 생존자 구조 협회’ 미국 대표
 
"이 사실을 책으로 출간하려 했지만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정부(나라)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슐로스버그 신부는 이것을 영적인 문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와서 보았느니라'의 사건이며, 또한 영적 전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이 사실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며 보통 사람들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거의 19년째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 있는데, 13년 동안 민간항공기구(CAO)가 이 사실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무 죄 없는 이 사람들을 풀어 준다거나 아니면 이들의 끔찍한 상황을 알리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아무 조처도 취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아들 벤이 POW/MIA(전쟁 포로와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던 군인들의 모임)와 함께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벤에게 묻는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고 대천덕 신부/예수원 설립자
 
 
[차례]
추천의 글/머리말/프롤로그
01 이스라엘 커넥션
02 미사일 폭발 후 104초
03 모네론 섬 상공에서 사라지다
04 바다 속에서
05 구조, 은폐 그리고 그 이후
에필로그
부록A : '0'이 빠진 경위
부록B : KAL 007 '추락' 현장에 대한 소련의 기만
부록C : 합동 수색 구조 작전에 대한 소련의 방해
부록D : 007은 어떻게 항로를 잃었을까?
부록E : 최후 순간 비교
부록F : 헬름스 의원의 서신
부록G : 도표, 지도, 그림
부록H : 아브라함 쉬프린, KAL 007 피격 사건 추적자
부록 I : 가족을 위한 기념비
 
 
      [저자의 말]
      "1983년 9월 1일, 비운의 대한항공 007기에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모두 사라졌다. 그 비행기에는 나의 장인어른도 타고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파고들었고, 그 과정에서 수수께끼의 핵심 내용이 분명해졌다.
      소련군이 격추시킨 그 제트기는 군용기가 아니라 민간 여객기였다. 소련군 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Nicolay Ogarkov) 원수는 사고 나흘 후에 이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사고 첫 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행기에 타고 있던 260명이 넘는 사람들은 생사 여부를 떠나 물 속에서건 물 위에서건 분명히 발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소련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자 KAL 007 인양 작전의 사령관이었던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시도로프에 따르면, KAL 007이 ‘추락’한지 27분만에 현장에 도착한 소련 선박들은 시체이든 생존자이든 해수면에서 단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승객과 승무원은 그들의 무덤이 되어 버린 침몰 비행기의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발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KAL 007의 수중 잔해 속에도 시체가 전혀 없었다면, 소련 당국의 지시로 현장에 잠수했던 소련 민간 잠수부들이 KAL 007 사고 8년 후 당시의 당혹스러웠던 기억을 되살리며 밝혔던 것처럼 그것은 반드시 풀어야 할 참으로 엄청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KAL 007기의 승객과 승무원들은 어디에 있을까?" - ‘머리말’에서
       
       
[저자 소개_버트 슐로스버그 Bert Schlossberg]
1983년 구소련 공군기의 공대공 미사일에 격추된 것으로 알려진 KAL 007기 승객 중 한 명의 유가족(사위)인 버트 슐로스버그 목사는, 지난 20여 년간 KAL 007기 피격 사건에 얽힌 미스터리가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러시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승객 구출과 그들의 생존 여부 문제를 헌신적으로 추적·조사해 오고 있다.
슐로스버그는 ‘러시아 교도소·정신교도소·강제노동수용소 연구센터’ 소장인 아브라함 쉬프린의 도움을 받아 KAL 007기의 착륙과 승객들의 생존에 대해 면밀하게 추적했으며, 최근 이스라엘 시민이 된 구소련의 군 인사를 통해 다양한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히브리어?그리스어·아람어·시리아어를 공부한 성서학자로서, 텍스트를 연구하는 그의 학문적 이력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히고 선별되지 않은 채 널려 있던 KAL 007 관련 자료들을 통일된 하나의 텍스트로 풀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슐로스버그는 브루클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뉴욕 대학교에서 근동학 석사학위를 마쳤다. 뉴욕에 있는 세라 로렌스 대학과 C. W. 포스트 대학에서 신구약 성경과 근동언어 및 문학 분야를 가르쳤고, 1988년 이스라엘로 이민한 뒤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지금은 이스라엘 성경대학에서 아람어와 시리아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KAL 007 생존자 구출을 위한 국제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고,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필리핀인들을 돕기 위한 ‘희망의 문-주 이스라엘 필리핀센터’를 이끌고 있다. 그는 현재 아내 엑시와 네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초판 발행일: 2003년 9월 9일
 
[사람들] KAL 007기 격추 소련 전투기 조종사 인터뷰
[조선일보 2003-10-17 18:15]
"여객기로 확인했다면 사격 거부했을 것"
[조선일보] “당시로선 민간기라고 식별하기가 어려웠지요. 여객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상부의 격추 명령을 거부했을 겁니다.”
“조종사인 나에게 직접 발포권은 없어요.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했지요.”
“7년 동안 사할린 기지에서 근무하며 500차례 이상 미국 정찰기의 소련 영공 침범을 막기 위해 출격, 경계 비행을 했습니다.”
“KAL기 최후의 모습은 화염에 싸여 폭발했습니다. 내가 정말 여객기를 격추했다면 한국민과 유가족에게 진실로 사과합니다.”
지난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당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KAL)007기(機) 피격사건이 발생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KAL기를 격추시켰던 소련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59)가 한국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인터뷰 기사 전문은 18일 발매되는 월간조선 11월호 게재). KAL 007기는 정상 항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에 진입했다가,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객 269명 전원이 희생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 흑해(黑海)에서 멀지 않은 크라스노다르시(市)에서 약 150㎞ 떨어진 ‘마이코프’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약 50여채의 시골 가옥이 늘어선 이 마을에서 그는 부인 류드밀라와 둘이서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평범한 농부였다. 오시포비치는 백발이 성성했다.
그는 하루 동안 조선일보 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심경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피해 당사국인 한국 기자를 만나, 지난 20년 동안 간직해 온 악령과 가슴앓이를 다 씻어내듯,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슬픔에 잠기면서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오시포비치는 아직도 그날에 대한 악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사건이 내 인생을 바꿔버렸어요. 마음은 오랫동안 짓눌렸고… 하루에 보드카를 2병 이상 마시고 담배를 2갑 이상 피우는 등 괴로운 나날이었죠.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고.”
그는 군인으로서 명령을 받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사건은 일파만파(一波萬波)가 됐더군요. 세상이 온통 난리가 났더라고요. KAL기를 격추한 지 5일 만에 전출 명령을 받고 야반도주하듯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무작정 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오시포비치의 인생도 바뀐 것이다.
“사건 발생일 전투조종사복과 군화를 신고 근무 대기 중이었지요. 자정이 좀 넘었을 겁니다. 8500m 상공에서 전방 30㎞ 지점에 비행물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육안으로 확인했지요. 비행기는 점멸등을 깜빡거렸어요. 구름이 좀 끼었지만 확인이 가능했죠. 기내 창이 보였지만 창 내로 움직이는 물체가 식별되지는 않았지요. 통상 여객기에 부착되는 점멸등이 깜빡거린다고 통제소에 보고했고요.”
그러나 그는 당시 미국 정찰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군부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다며, 사할린 주변 상공은 미국이 소련 방공망과 지상 레이더 기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어요. 내가 근무하는 7년 동안 미군 정찰기를 감시하고 영공에서 경계 비행을 한 것만도 500차례 이상 됩니다.”
오시포비치는 여객기 격추 지시가 1차 취소되고, 유도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서 여객기에 300m까지 근접, KAL 007기와 같은 고도로 날아가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며 날개 쪽에 달린 경고 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신호를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행기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어요. 지상 관제소로부터 소형 조명탄 미사일을 발사해보라는 명령을 받고 4차례 발사했지요. 250여발의 산탄이 발사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객기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도를 상승시키자 관제소에서 격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전투기 속도를 바짝 내 비행기 앞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회전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지요. 처음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후폭풍과 같은 폭발음과 섬광 때문에 눈이 절로 감겼지요, 약 0.5초의 순간이었습니다. 2차 미사일을 발사한 뒤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폭발하는 KAL기 최후의 모습을 본 뒤 ‘소콜 기지’로 귀환했습니다.”
오시포비치는 “솔직히 나는 탑승객들이 있다는 인식도 못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가 격추시킨 비행기는 점멸등이 깜빡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투기와 당시 KAL기와의 간격과 미사일, 발사과정 전체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또 “여객기가 추락한 지점에서 발견된 시신 부분도 겨우 6~7명 정도의 것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며 “도대체 200여명의 시신들이 어디에 있는거냐”고 반문했다.
그는 “격추 전 마지막 순간에 교신을 시도해 보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며 “교신하려면 주파수도 동일해야 하고, 언어가 통해야 하는데,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여서 결국 교신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격추시킨 비행기 꼬리 부분에 스포트라이트도 켜져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을 것이며 격추 명령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일 최종 명령은 모스크바에서 하달된 것”이라고 공개했다.
그는 “이 인터뷰로 한국인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보여 후회가 없고, 제발 진실을 믿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격추시킨 비행기가 정말 269명을 태운 KAL 여객기였다면 유족들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한다는 친필 사죄 편지를 썼다.
오시포비치는 “냉전 체제가 붕괴된 지금 러시아(사건 발생 당시 소련)가 비밀정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측이 그날 관련 정보를 모두 만천하에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