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 및 안스러운 이야기

대한항공 858기 실종사고

고양도깨비 2007. 3. 8. 12:14
 


87년
11월29일 KAL858기 사건 발생. 29일 오후 2시1분 인도양 상공에서 KAL858기 실종,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실종된 것으로 보고. 바그다드 아부다비 방콕 서울(8시 40분 도착 예정) 승객 115명의 생존 미확인.
11월30일오전 정무 외무부 제2차관보 등 현지조사반 급파. 바레인측은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수색, 육상수색작업 진전 없음. 관계당국 및 KAL858기 측 인도양과 뱅골만 상공에서 공중폭파 가능성 시사. 당시 홍콩측은 기체내부 문제로 추락가능성 시사, 미국측 역시 추락가능성 시사.
12월1일 아랍 에미레이트 주재 한국대사관, 남한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 2명이 바그다드에서 탑승하여 아부다비에서 내렸다고 정부에 보고, 검거.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마유미’ 연행 후 조사 중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발표.수색구조반은 추락지점인 밀림을 수색하였으나 수색작업 진전 없음.
12월2일 당시 청와대 비행기에서 내린 2명의 추정인물이 북한계로 추정언급, 대북한 안보체제 강화와 선거방해 책동에 대한 엄단 지시. 정부 재판관할권과 신병인도 요청. (보통 국제범죄의 경우 범인 체포나라, 피해국의 순으로 재판관할권이 부여. 따라서 당신 신병인도는 바레인과 일본이 자신들의 관할권을 포기해야만 가능.)
12월3일 ‘하치야 신이치’는 북한 스파이의 중요관계자로서 ‘미야모토 아키라’와 동일인일 가능성 시사. 이에 일본경찰은 ‘신이치’와 ‘아키라’는 다른 인물임을 확인.
12월4일 마유미 회복
12월5일 3명의 수사요원 파견, 바레인 수사 간접지원 및 정확한 신원과 행적 등 수사방향과 범인 인도 합의. 치안본부는 ‘미야모토 아키라’를 배후인물로 추정.
12월7일 바레인에서 사실상 수사 종결, 정부는 북한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으로 사건 분석.
12월9일 정부, 현지조사단 철수 결정(KAL858기는 실종 처리) 당시 KAL858기 유족,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침묵시위.
12월11일 KAL858기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방콕측은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반박.
12월15일 ‘하치야 마유미’ 신병인도. 일본측 음성조사결과 ‘하치야 마유미’는 북경어권 출신. 즉, 조선족일 가능성 시사. 미국방성은 발견된 잔해추정물체가 KAL858기의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12월16일 대통령 선거 실시.‘하치야 마유미’ 신상확인 조사 본격착수(안기부 주관), 북한 테러공작임을 확증적으로 표현.

88년
1월15일 ‘하치야 마유미’, 김현희라는 이름으로 TV기자회견. 본인이 KAL858기 폭파범이며 북한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 선거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목적으로 KAL858기를 폭파했다고 발표.
1월21일 미국, 대북한 제재조치로 테러국으로 단정. 북한외교관과의 교류지침 철회, 북한인의 미입국 제한 강화, 세계의 규탄유도를 위한 상징적 대응 발표.
2월4일 일본 조청련, 김현희의 자필선서문은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기자회견. 미국, 88올림픽 개최시기에 맞추어 팀스리리트 훈련 실시에 대해 협의.
2월11일 한·일 정부 UN안전보장이사회 소집 요구, KAL858기 폭파사건 북한 규탄 논의. 2월17일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거부
2월22일 북, IOC위원 경질.

89년
2월3일 서울지검, 김현희에 대해 6차례 조사(88.12.2~89.1.23) 결과 발표.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적용하여 불구속 기소.

90년
3월27일 대법원 사형선고
4월12일 김현희 극히 이례적인 특별 사면 조치

91년
6월2일 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발간, 사건당시 진술과 80여곳 엇갈리는 내용

97년
12월28일 김현희 전직 안기부 요원과 결혼, 개명. 행방묘연.

98년
10월14일 안기부 KAL858기 사건을 '북풍 의혹' 사건으로 거론

2001년
10월  현준희씨(전 감사원 직원)<내외저널>10월호에 KAL858기 사건 조작 의혹제기
11월 26일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준) 결성

 

2002년
1월 정부기록보존소, 김현희 공판기록 일부인 1심, 항소심, 상고심 판결문 공개
3월21일 가족회 차옥정 회장 등, 서울지방검찰청 상대 KAL 858기 사건 수사와 재판기록 정보공개 청구소송 제기
4월13일 서울지방검찰청, 수사기록 비공개 결정
5월13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의 정보공개 청구 받아들여 김승일 부검감정서 공개
7월 가족회 차옥정 회장 등 3인, 서울지방검찰청 상대 정보공개청구 거부처분 취소 소송 제기
9월21일 김현희 KAL기 사건 전면재조사를 위한 국회 청원

 

2003년
5월 서현우 씨, KAL858기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배후> 출간 (창해 출판사 刊)
11월3일 김현희 KAL858기 조작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115인 선언
11월21일 국정원, 소설 <배후>의 작가와 출판사에 대해 2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및 명예훼손 고소
11월29일 16주기 추모제 및 국정원에 공개질의서 제출

 

2004년
2월3일 서울행정법원, KAL858기 사건 수사,재판기록 공개 판결
2월26일 검찰, 정보공개 판결 불복 항소
3월15일 노다 미네오 씨의 <파괴공작> 한글번역본 출간 (창해 출판사)
3월15일 국정원, 가족회 앞으로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 발송.
3월23일 국정원, <파괴공작> 출판사 「창해」대표에 10억원 손해배상 청구소 제기
5월22일,23일 <KBS스폐셜 - KAL858기의 미스터리>를 통해, KAL858기의 것이라는 동체조각과 부유물에 폭발흔적 없음과 김현희의 평양 출발이 거짓임이 밝혀짐.
6월3일 KAL858기 가족회, KAL858기 위령탑 거부선언
6월25일 대법원, 진상규명 요구하는 KAL858기 가족들을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김정일 프락치'라고 비방했던 이철승 자유민족회의 이사장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 명령 최종 판결.
6월28일 법원, 국정원의 <파괴공작> 판매금지 등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 'KAL기 폭파산건은 역사적 사실로서 그 진상이 반드시 규명되어져야 할 사안'이라고 판결문에 명시
7월1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 토론회 - 이제는 전면재조사다' 개최.
7월4일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 KAL858기 사건 재조사 천명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115명의 탑승객을 태운 KAL858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안기부는 이 사건을 폭파로 규정했으며, 이에 다라 115명의 탑승객을 일괄적으로 사망 처리했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오늘 KAL858기 사건에 대해 근본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시체 한 구, 유품 하나, 블랙박스 조차도 발견되지 못한 사건은 세계 여객기 사고사상 유례없는 일이라며 이는 분명 ‘폭파’가 아니라 ‘실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


유해 또는 유품은 못 찾고, 발견 확률 1/40000인 기체는 2년 반만에 찾아낸 KAL858기

안기부는 사건 발생 2년 반만에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안기부는 이 잔해에 남아있는 88올림픽 표기 및 태극마크 표시로 보아 폭파된 KAL기 잔해가 틀림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비해 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115명이나 되는 탑승객의 유해 또는 유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세계 여객기 사고사상 탑승객의 유품 또는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생 2년 반만에 찾았다는 잔해는 발견 확률이 불과 1/40000밖에 되지 않는 부위다.(발견된 잔해는 OFFICIAL이라는 단어가 나뉘어 씌어진 동강난 두 조각. 해상에 떠도는 수만 개의 파편 중 꼭 맞는 두 조각을 찾을 가능성은 1/40000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안기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KAL기 사고 직후 탑승객 가족들은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안기부에 질의했으며, 이에 대해 안기부는 안다만 해역에 식인상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김현희가 KAL기에 놓고내렸다던 폭탄은 어디에 있는가?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사건 당일 김현희 일행은 폭탄은 비닐 쇼핑백에 넣어 기내 선반에 놓고 내렸다고 한다.
또한 사건발생 1주일 후 국내 일간지들은 김현희 일행의 소지품에서 화약 반응이 나왔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김현희 일행을 기내에서 목격한 KAL 박길영 사무장은 남자는 짐이 없었고, 여자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고 진술했다.(87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 즉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안기부의 발표에서 나온 비닐 쇼핑백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88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현희 일행의 소지품을 화학적 시험법 등 정밀감정을 한 결과 화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88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

미사일 격추에도 12분간 버티는 KAL기가 두부 크기의 폭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88년 1월 안기부 수사 발표에 의하면 KAL기에 사용된 폭탄은 콤포지션 350g과 PLX액체 폭탄 700cc. 안기부는 정상고도를 비행하고 있던 KAL기가 이 폭탄이 터지자마자 산산조각이 나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89년 2월 검찰공소에 따르면 안기부가 발표한 폭탄은 확인되지 않은 추정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일본과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KAL기에 사용된 폭탄은 겨우 두부 크기 정도로서 덩치 큰 비행기를 공중분해 시킬 수 없다고 한다. 즉, 폭탄이 비행기 내부에서 터진다 해도 적어도 수 분간 활공 후 폭파되기 때문에 구조신호 발신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83년 사할린에서 KAL007편은 미사일에 격추되었으나 약 12분간 활공하면서 긴급 구조신호를 보냈다.


▲의문투성이 구명보트의 겉모습 엉뚱한 데서 발견된 겉은 멀쩡한 구명보트.

안기부는 사고 발생 15일만에 육지근처 근해에서 25인승 구명보트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안기부는 ‘구명보트에 있는 공기압축펌프가 높은 열을 받아 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중폭발 가능성이 크다’는 미얀마 내무성의 추정과 함께 발견사실을 발표했다.

우선 구명보트의 발견지점이 엉뚱하다. 당시 미해군이 작성한 안다만 해역의 해류도에 의하면 사고 발생 15일 후 구명보트는 육지근처 근해가 아니라 서쪽 대양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또한 당시 발견된 구명보트는 바람이 안 들어간 개어진 슬리핑백 형태로서 공기압축펌프 외 비상식량, 약품, 조명탄 등 49점의 물품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명보트는 인조피혁 외 나머지 물품은 멀쩡한데 펌프만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폭파된 비행기 안에서 외부는 물론 펌프만을 제외한 나머지가 멀쩡한 구명보트가 발견될 수 있는가.
 
KAL858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직후, 일본 국적의 북한 테러리스트 김현희(마유미)라는 여인이 대선 하루를 앞두고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 비행기에서 내린 김현희는 곧이어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을 본 뒤 많은 것을 느꼈다’며 ‘사죄하기 위해 진실을 밝힌다’고 침통한 표정으로 사건 내역을 밝혔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지금은 전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여 신분을 바꾼 채 살고 있는 김현희. 그러나 그녀는 북한에서 치밀하게 교육받은 테러리스트치고는 너무나도 헛점이 많았다.

안기부가 증거물로 제출한 사진 속 화동은 과연 김현희인가?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임을 입증하는 사진 3장을 발표했다. 하나는 7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 남측대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평양의 화동 사진, 두 번재는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72년 평양주재 당시 찍은 사진속의 화동, 세 번째는 평양에서 꽃다발 증정대기 중인 화동 사진이다.
세 장의 사진은 오로지 김현희의 진술에 의해 ‘김현희’임이 확인되었다.

3장의 사진은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사진에 나온 화동의 귀는 동그란 모양의 귀인데 비해 김현희의 귀는 세모꼴 모양, 속칭 칼귀이다. 그런데 성형외과 전문의들의 견해에 다르면 사람의 귀는 지문과 같아서 레슬링과 같은 과격한 운동 또는 성형에 의하지 않고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 신체부위라고 한다. 결국 안기부가 제시한 첫 번째 사진이 김현희라는 사실은 전문적인 견해에 의해 인정되기 어렵다.
두 번재 공개된 사진은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사진 속의 화동이 김현희가 확실하다고 주장한데 이어 김현희 역시 자신임을 자백한 것이다. 그러나 사진 공개 이후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인이 사진 속의 화동이 자신임을 주장, 이에 하기와라 기자 역시 김현희라는 주장을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안기부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진은 결정적이다. 세 번째 사진은 이미 72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사진으로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진에 대해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원회’사진이 아니라 ‘개성에서 개최된 적십자회담’사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앙골라에는 김현희의 아버지가 없었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의 아버지인 김원석은 앙골라 주재 북한외교관이라고 밝혔다.

안기부 발표 직후 일본 아사히 신문이 앙골라를 겸해서 관장하고 있는 짐바브웨 주재 일본 대사관을 통해 전화로 확인한 결과, 앙골라 주재 외교관 리스트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보도했다.
또한 안기부 역시 문예춘춘 1988년 3월호에서 현재 확인 중에 있다는 입장만을 발표한 채 지금껏 명확한 결과를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김현희의 파트너 김승일은 70세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에 불과했다.

안기부는 당시 음독자살했다는 김승일을 김현희와 같은 2인 1조 테러팀이라고 지목하면서 김승일에 대해 영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전자기술 전문의 정예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김승일이 음독자살을 한 이후 사체부검을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김승일은 위의 거의 대부분이 수술로 절제된 70세 중환자 노인이었다. 또한 일본 기자들이 추적한 바에 의하면 김승일은 4개 국어는커녕 영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김현희는 음독한 사실이 없었다.

안기부 발표에 다르면 김현희 일행은 사고 발생 2일 후인 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을 탈출하려다 검문을 받자 음독, 김승일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김현희는 치사량 미달로 살아남았다.

당시 김현희의 응급처치를 담당한 바레인의 야로시아 응급부장에 따르면 김현희는 음독한 바가 없다고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했다.

이동한 곳마다 증거를?남겨놓은 헛점투성이 테러리스트, 김현희

당시 발표에 다르면 김현희는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댔으며 바레인에 묵었던 호텔방에는 무려 400여 점이나 되는 소지품을 남겼다.

정예공작원이라면 자신의 흔적을 철저히 감추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김현희는 온 유럽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댔다. 더욱 의심스러운 점은 바레인에서 묵은 호텔에 무려 400여점이나 되는 소지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표지판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찍은 것처럼 보인다. '정예공작원'이 거사를 앞두고 증거물을 뿌리고 다녔다.


김현희의 수기는 당시 안기부 발표와 무려 80여군데나 다르다.

사건 당시 김현희의 진술에 따른 발표에 의하면 공산권에서 오스트리아로 입국하는 가운데 빈의 남역에 도착, 암파크링 호텔 603호에 투숙했다고 되어 있다.

91년에 발간된 김현희의 수기는 이와 다르다. 사건 직후 일본에서는 김현희의 행적을 수년간 추적한 결과 오스트리아 입국시 빈의 ‘남역’이 아니라 ‘서역’임을 밝혔으며 당시 투숙한 방은 603호가 아니라 302호로 밝혀냈다.
김현희는 이와 달리 수기에서 일본측의 추적 내용대로 인정함으로서 자동적으로 자신의 진술 및 안기부 발표를 부인했다. 이렇듯 수기에서 처음 진술과 엇갈리는 곳은 무려 80여곳에 이른다.
북이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힌 것은 바로 KAL858기 사건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KAL858기가 폭파된 증거나 김현희가 테러리스트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듯, 북의 지령에 의한 사건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UN안보이사회 역시 증거 불충분으로 대북한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었으며, 우리 역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지금껏 왔다.


김정일의 친필지령, 그 물증은 어디에 있는가?

당시 안기부는 KAL기 사건이 김정일의 친필지령으로 자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테러동기는 88올림픽 방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88년 1월 15일 수사발표 당일 안기부 수사관은 소위 ‘친필지령’ 문제에 대해 ‘실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는 ‘친필지령’에 대해 친필지령 사실은 상부기관에 의해 구두로만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즉, 김정일의 ‘친필지령’은 한번도 사실로 확인된 바가 없었다.
또한 북의 테러동기라고 밝힌 88올림픽 방해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은 부정적이다. 당시 일본 언론보도에 의하면 북은 남한과 합의한 88올림픽 분산개최를 위해 경기장을 새롭게 건설하고 선수촌, 아파트, 도로, 비행장 등 부대시설 건설이 한창이었다. 이를 두고 국내언론들은 북이 부대시설을 건축하는 것은 88올림픽 때문이 아니라 89년에 있은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서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축전을 위해 선수촌과 경기장을 짓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일본 침투 북괴간첩 이경우는 이미 2년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김현희 일행에 일본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사람은 일본에 침투한 북괴간첩인 ‘이경우’라고 소개하고 있다.

88년 1월26일자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일본 공안당국은 ‘이경우’라는 자가 KAL858기 사건 발생 2년 전인 85년 간암으로 사망했을 것이 유력하다고 추정했다.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은 술집종업원?

당시 안기부는 북이 일본에서 ‘이은혜’라는 여성을 납치하여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은혜’라고 불리우는 여성은 일본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종사했던 여자로 이 ‘이은혜’ 납치사건은 현재 북일수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북에 입장에서 보면 일본인과 다름없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조총련계 동포들이 한마디로 널려있다. 일본어 교육을 시키기 위해 술집 종업원을 납치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극약 앰플은 북에서만 사용하는 행동수법이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 일행이 바레인에서 극약 앰플을 사용하여 음독했다면서 이는 종전의 북한 간첩이 사용했던 행동수법과 동일하다고 발표했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김현희가 음독했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극약 앰플로 자살을 시도했으므로 북의 소행이라는 식의 논리는 억지에 가깝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72년 5월 북에 밀사로 파견된 이후락 정보부장도 극약 앰플을 소지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115명의 탑승객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정부는 KAL858기 탑승객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여당출신 대통령 후보자는 200만에 이르는 표를 확보했다.


엉뚱한 장소에서 수색작업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어디스에 최종 교신 후 사라진 KAL858기의 추락예상지역에서 인명구조 및 기체 수색작업에 만전을 기했다고 발표했다.

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최종교신지점이 어디스에서 서쪽으로 403km떨어진 토리스 상공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는 어딧해역을 추락예상지역이라고 보고 수색작업에 만전을 기했다고 발표했다.


사고 발생 10일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정부는 기체나 탑승객의 유품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 발생 단 10일만에 현지 조사단을 철수시키고 수색작업을 중단했다.

KAL858기가 추락되기 하루 전인 87년 11월 28일 인도양의 모리셔스 해역에서 추락한 남아공의 점보기는 수심 4,000M에서 잔해가 발견되었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007기의 경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단 10일만에 수색작업을 중단했다.


가장 중요한 블랙박스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블랙박스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블랙박스 발신음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필요하다. 정부는 보잉사에 이 기계를 요청해야 했지만 정작 필요한 장비는 갖추지 않고 수색을 했다. 낚시바늘도 없이 고기를 낚겠다고 나선 셈이다. 이는 정부가 KAL858기의 수색작업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현희 압송은 대선 하루 전날이었다.

당시 정부는 대선 하루 전날 김현희를 압송한 것에 의혹이 제기되자 바레인측 사정에 의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96년 4월7일자에 의하면 당시 압송책임자로 바레인에 파견되었던 정부관리는 바레인 수사당국을 상대로 떼를 쓰다시피 대선 전날로 압송시간을 맞추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둔시점에서 KAL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가족 동의 없이 사망처리 강행

정부는 KAL858 사건 발생 후 실종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일괄적으로 실종자들을 사망처리했다. 심지어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희생자 가족 중 일부는 이에 항의하여 실종신고 심판청구 재판을 제기하여 97년 7월 21일 서울 가정법원으로부터 정식 실종신고를 받아냈다. 이들은 유품 하나라도 발견되면 ‘사망’ 처리에 동의하겠다고 울면서 호소하고 있다.


A. 안기부의 거짓 수사발표 (29가지)

A-1. 북한인 신원 관련

1. 김현희가 어릴 적 평양에서 찍었다는 꽃 주는 소녀(화동花童) 사진 - 김현희는 두 차례나 자신이 아닌 화동소녀를 자신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국정원은 최근 김현희가 꽃을 준 사람은 이동복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 또한 거짓말이다.

2. 김현희가 진술한 존재하지 않은 평양 주소 - 김현희가 1987년 12월 수사과정에서 밝힌 자신의 평양주소 ‘평양시 문수구역’은 83년 3월에 없어진 주소로 밝혀졌다.

3.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무역대표부의 수산대표라는 사실 - 그런 직책과 근무자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국정원도 이를 시인했다.

A-2 모스크바 행적 관련

4. 김승일, 김현희의 평양-모스크바 비행기편 - 김현희가 1987년 11월 12일 이용했다고 밝힌 평양발 모스크바행 비행기편은 직항기였으나, 김현희는 이르츠크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다고 진술했다. 이 비행기편은 1987년 이전에 있었던 비행기편 이었다.

5. 김승일, 김현희의 모스크바-부다페스트 비행기편 - 김승일, 김현희가 탔다는 비행기편은 확인 결과 없었다.


A-3 헝가리 부다페스트 행적

6. 87.11.28 진술서에서 김현희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니 이미 모스크바에서 연락이 있었으므로 주재 지도원이마중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했으나, <고백록>에서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7. 김승일, 김현희가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인 1987년 11월 13일은 금요일로 평일이었다. 그러나 김현희는 <고백록>에서 “그 날은 토요일이어서 주변에 있는 고기집도 우체국도 모두 문을 닫은 채 휴업이었다”라고 기술했다.

8. 부다페스트의 비밀 아지트 전화번호라고 안기부가 발표했던 ‘164635’ 전화번호는 비밀 아지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유치원의 전화번호였다.

A-4 오스트리아 빈 행적

9.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역이 ‘서역’이었는데, ‘남역’에 도착했다고 거짓 진술했다.

10. 빈에서 묵은 호텔의 방 번호가 암 파클링 호텔 322호실 이었는데, 603호라고 틀리게 발표했다.


A-5 유고 베오그라드 행적

11. 김승일, 김현희는 베오그라드에서 ‘메트로폴 호텔 806호’-폭탄을 건네 받았다는 방-에 묵었으나, 안기부는 ‘메트로폴리탄 호텔 811호’에 묵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 수사발표(88.1.15)전에 이미 신문지상에 806호에 묵었다고 보도(87.12.4)됐으나,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안기부는 811호에 묵었다고 발표했다.

12.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예약 없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김현희는 <고백록>에서 예약을 하고 왔다고 거짓 기술을 했다.

13. 베오그라드에서 <로마-비엔나> 항공권을 예약할 당시, <고백록>에는 예약을 한 오스트리아 항공사 바로 옆에 알이탈리아 항공사가 있는 것처럼 돼있으나, 실제로 두 항공사는 약 50미터 떨어진 별개의 빌딩에 있으며, 있는 층수도 서로 다르다.

14. 베오그라드의 비밀 아지트 전화번호라고 안기부 발표한 ‘625646’은 역시 비밀 아지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조르카(ZORKA)’라는 화학, 야금회사로 밝혀졌다.

A-6 아부다비 공항에서의 행적

15. 아부다비에서 암만으로 가지 않고 바레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진술 - 김현희는 아부다비에서 새벽2시45분경에 도착해서, 원래 오후2시45분에 떠나기로 돼있던 비행기를 앞당겨, 아침9시에 바레인으로 갔다. 아침9시 이전에도 김현희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를 떠나 유럽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A-7 바레인에서의 행적

16. 김현희가 바레인에 도착한 날이 휴일이었다는 진술 - 바레인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 그러나 이슬람권이 바레인에서 일요일은 휴일이 아니다. 그런데 김현희는 도착한 날이 일요일 즉 휴일이라 다른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며칠 바레인에 묵었다고 했다.

17. 바레인에서 더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가 없었다는 진술 - 김승일과 김현희가 실제로 바레인을 떠나려고 했던 87년12월1일 아침 8시30분 비행기보다 일찍 바레인을 떠나는 비행기편들이 있었다.

18. 바레인에서 김현희가 음독했다는 발표 - 김현희는 음독하지 않았음이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 의사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19. 바레인에 도착한 뒤, 김승일과 김현희는 첫날 ‘휴식’, 둘째날 ‘관광-쇼핑-비행기표 예약’의 순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진술서에서 밝혔으나, <고백록>에는 첫날은 일요일이어서 항공사가 휴무여서 어쩔 수 없이 쉬고(거짓임), 둘째날 ‘비행기표 예약-관광’을 했다고 말을 바꿨다.

A-7 KAL858기의 잔해물 관련

20. KAL858기의 부유물이라고 발표한 고무구명보트 - 고무구명보트는 김현희가 폭탄을 놔뒀다는 곳 근처에 설치돼있던 것이었는데, 발견 당시 몇 군데 찢어진 흔적 말고는 외상이 거의 없었고, 다만 둘둘 말린 상태의 구명보트 안에서 발견된 수동펌프만이 불에 그을려 파괴된 상태로 발견됐다. 국정원은 비행기 파편이 구명보트를 뚫고 들어가 수동펌프를 부순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그 수동펌프는 압축에 의한 파손이라고 밝혀졌으며, 구명보트에는 파편이 뚫고 지나간 구멍이 발견되지 않았다. 국정원은 국과수의 감정을 은폐했던 것이다.

21. 90년 3월에 발견된 안기부가 주장하는 KAL858기의 동체조각 - 사고발생 2년4개월여 만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동체조각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미국 MIT 박사가 분석한 결과, 폭발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조각들 가운데는 김현희가 폭탄을 설치했다고 한 좌석 근처의 것도 있었다. 더구나 안기부는 그 동체조각들을 폐기처분했다.

A-8 폭탄, 폭발 발표 관련

22. ‘KAL858기 폭파’에 사용됐다는 폭약의 종류와 양 - 안기부는 콤포지션C-4폭약 350g을 라디오에 넣어서 폭탄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으나, 라디오에는 폭약 350g이 들어갈 수 없고, 안기부도 임의로 폭약의 종류와 양을 추정했음을 시인했다.

23. 김승일과 김현희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TNT 화약 성분 - 김승일의 허리띠와 김현희의 옷에서 TNT화약 성분이 검출됐으나 안기부는 수사발표시 이 사실을 은폐했다.

24. 비행기가 ‘산산조각 폭발’돼서 잔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발표 - 안기부가 수사발표를 한 88년1월15일 보다 약 한달 전인 87년12월 중순, 버마에서는 비행기의 추락 사실에 대한 보고가 이미 접수됐던 상태였고, 이 내용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기재돼있다.

25. 수심이 2천~3천미터 이고, 상어 떼가 득실거려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한 발표 - 버마가 사고조사보고서에 밝힌 추락지점의 수심은 70미터 정도에 불과하고, 상어가 득실거리는 지역도 아니다.

26. 사고지점이 특정되지 않아 블랙박스 탐지장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발표. - 87년 12월 중순 - 블랙박스가 아직 신호를 보내고 있을 시점 - 경 이미 KAL858기의 추락지점에 대한 좌표까지 보고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해저수색이나 블랙박스 수색을 하지 않았다.

27. 폭파장치 세팅시간 - 안기부와 김현희는 폭파장치 세팅시간을 수시로 바꾸면서 자꾸 앞당기고 있다.


A-9 김승일 신원 관련

28. 1987년 KAL858기에 탑승했던 김승일이 1984년에도 김현희와 동행을 했다는 발표. - 1984년 김승일이 남겼다는 필체와 1987년 남긴 필체를 비교해 본 결과, 이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필체임이 을 통해 밝혀졌다.

29. 김승일의 신원 - 안기부는 1989년 <월간조선> 취재 시 김승일이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월북했다고 발표했으나, 2004년에는 김승일이 황해도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한 김일선(金一善)이라고 번복했다.



B. 풀리지 않은 의문점 (73가지)

1. 안기부와 김현희는 왜 상기한 28가지의 거짓말을 했는가?

2. 김현희가 음독(?)을 저지한 사람은 누구인가? - 바레인수사보고서, 김현희, 안기부는 공항의 여자경찰관이 저지했다고 주장 -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관은 바레인경찰서장 핸더슨이 저지했다고 주장. 핸더슨은 김현희를 저지하려다가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까지 있다고 함.

3. 안기부가 얘기한 사고지점과 버마가 작성한 사고조사보고서 상의 사고지점은 약200Km의 거리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 KAL858기는 미국에서 수리 받고 나온 지 85시간 만에 사고를 당했고, 88년2월이면 퇴역할 비행기였음. 이런 노후기종을 바로 해외편에 운항시키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임.

5. 김승일과 김현희는 1984년 8월 해외적응훈련 당시 비자 없이 일본 여권만으로, 부다페스트에서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에 입국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11월 공작 여행 당시에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표현했다. 더구나 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열차를 이용할 수 없다며, 자동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에 입국을 했다고 했다. 이런 모순은 왜 생겼는가?

6.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김현희는 3명의 동양남자를 혼자 만나 가방을 주고받았고, 목격 자들도 있는데, 이에 대한 진술은 전혀 없음.

7. 베오그라드에서 관광객처럼 보이기위해 사진 찍은 날이 진술서에서는 11월24일이었던 것이, <고백록>에는 12월 25일로 바뀌어져 있다.

8. 베오그라드에서 <로마-비엔나>표를 구입한 것이 진술서에서는 11월24일이라고 했으나 <고백록>에서는 11월 26일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9. 김승일과 김현희는 1984년 8월 해외적응훈련 당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5박6일을 보내며 거리를 익히고, 여행사에 가서 항공권도 구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1987년 11월 다시 오스트리아의 빈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가본 적이 있는 여행사를 가면 서도 마치 낯선 곳에 처음 온 듯 헤메고 다녔다고 <고백록>에 기술돼 있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10. 바그다드 공항에서 공항 검색원이 김승일과 김현희가 갖고 있던 밧데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는데, 공항에서 검색원이 안전을 위해 승객의 물건을 보관했다가 나중에 돌려주는 경우는 있어도, 버려버리는 경우는 없다.

11. 밧데리를 공항 검색원에게 빼앗긴 김승일이 검색원에게 일본어로 강하게 항의를 해서, 바그다드의 공항 검색원이 밧데리를 가져가도록 묵인을 했다고 김현희는 진술을 했으나, 항의한다고 보안에 걸리는 물품을 허용하는 검색원-하물며 전쟁 중인 국가의 공항에서- 이 있을 것이며, 바그다드 공항에는 일본어를 이해하는 검색원도 없었다.

12. 결국 김승일은 밧데리를 비행기내에 갖고 들어가기 위해, 복대에 밧데리를 숨기고 검색 대를 통과했다고 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보안검색이 어느 공항보다도 철저한 곳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13. 김승일과 김현희가 라디오 밧데리를 비행기 안에 갖고 타기위해 검색과정에서 대단한 소란이 있었던 것처럼 안기부가 발표했으나, 바그다드 경찰이 보내온 공문에는 밧데리로 인한 소란 얘기는 하나도 없다.

14. 김승일과 김현희를 접대했던 KAL858기 스튜어디스 박은미는 폭탄을 놔뒀다는 비닐쇼핑백이 없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는데, 김현희는 쇼핑백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15. 김현희는 자신의 옆자리에 30대 중반의 서구여인이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당시 같이 탑승했던 대한항공의 승무원은 김현희 옆자리가 아랍인이라고 했으며, 앞 쪽 좌석에 여자 승객은 김현희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김현희가 말하는 서구 여성은 누구인가?

16. <고백록>을 보면, '폭파될 시간을 계산해 보니 아부다비 시간으로 새벽 6시쯤 되었기 때문에’라고 기술돼 있다. 그러나 <고백록>에서의 주장대로 만약 폭파장치 세팅을 바그다드에서 전날 22시4분에 9시간 뒤 폭발하도록 했다면 비행기 폭발은 아부다비 시간으로 아침8시 40분(바그다드 시간 아침 7시40분)이 된다. 이런 모순은 왜 생긴 것인가?

17. 김승일과 김현희는 자신들의 도주가 예정에서 벗어나고, 추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만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흔적들을 전혀 폐기처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8. 바레인에서 김승일과 김현희가 묵고 있던 호텔방에 걸려온 전화들의 진실은 무엇인가? - 김현희의 자술서에는 4회, <고백록>에는 3회, 그리고 당시 기사에는 대한항공의 직원이 직접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19. 김현희의 일본어 교관이라는 리은혜가 납북 일본인 다쿠치 야에코라는 주장은 김현희와 안기부의 주장일 뿐이다. - 납치할 인물의 선정 기준 - 중산층, 교양있는 인물- 에 다쿠치 야에코는 적합지 않음. 다쿠치 야에코는 도쿄에서 캬바레 호스테스 였음. 또한 김현희가 일본인어 교육을 마친 1983년 3월 이후인 1984년 9월 다쿠치 야에코가 방콕의 호스테스로 활동하면서 찍힌 사진이 있음. 이는 다쿠치 야에코가 북한의 교관이 아니라 술집 호스테스이고, 김현희는 술집 호스테스인 다쿠치 야에코를 어딘가에서 만나, 그녀를 ‘리은혜’라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했을 가능성을 높게 하고 있음.

20. 다쿠치 야에코의 한국식 이름은 ‘고혜옥’이라고, 역시 납북됐던 요코다 메구미의 가족이 증언한 바 있다.

21. 다쿠치 야에코는 일본에서 종종 목격이 됐고, 다쿠치 야에코의 가족들은 다쿠치 야에코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지금도 송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22. 김현희가 평양의 동북리 초대소에서 훈련받은 기간이 안기부 수사보고서에는 81년 4월부터라고 했으나, <고백록>에는 81년 7월 부터라고 돼있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가?

23. KAL858기의 최종 교신지점 조작 가능성 있음. - 대한항공과 안기부 그리고 버마의 사고조사보고서는 최종 교신지점을 어디스(Urdis)라 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고 초기 일본 아사히 신문의 취재와 <파괴공작>의 저자 노다미네오 씨가 현지 관제소를 취재한 바에 의하면 KAL858기는 어디스(Urdis) 이전 위치 통보 포인트인 톨리스(Tolis)에서 최종 교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김현희가 자신의 고백록 <이제는 여자가 되고싶어요>에서 밝힌 내용을 봐도, KAL858기는 어디스에 도착하기 전 폭발되게 시한장치가 돼있었다.

24. 87년 12월10일에서 12월12일, 안다만해의 코코섬과 니콘담제도 근방에서 발견된 부유 물들은 왜 국과수에 감정의뢰를 하지 않았나? - 이 부유물들은 당시 해류와 발견지점으로 봤을 때, KAL858기의 것이었을 가능성이높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부유물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목록에 빠져있다. 안기부는 왜 이 부유물들을 감정에서 빠뜨렸는가?

25. 김승일과 김현희가 바레인으로 도망간 이유는? - 바레인은 남한과만 단독수교를 맺은 국가이고, 대한항공의 중동진출 거점있었으며, 80년 중동전쟁 때, 교민 철수의 거점으로 활용될 만큼 남한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였다. 남한 항공기를 폭파했다는 북괴공작원이 왜 북한대사관도 없는, 자신들에게는 극도로 불리한 지역으로 도망(?) 갔는가?

26. 김승일, 김현희가 신속히 도주하지 않은 이유는? - 김승일과 김현희는 아부다비에서 KAL858기에서 내린 뒤, 신속하게 북한을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레인의 호텔에 투숙하면서 12월2일까지 방을 예약했으며, 출국 가능한 모든 비행기를 모두 타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27. 김승일과 김현희의 소지품 가운데 암호수첩은 현지 정밀검사 때는 등장하지 않다가, 국내에 압송될 때 등장한다. 더구나 그 수첩에 기재된 암호들은 비밀아지트가 아니거나, 암호로 만들 이유가 없는 - 현지 전화번호부에도 기재돼 있는 - 북한대사관의 전화번호였다. 왜 그런 전화번호들을 암호로 만들어서 다녔는가?

28. 김승일과 김현희가 사용한 암호는 이미 검거된 남파간첩이 사용했던 암호와 같은 종류의 암호였는데, ‘KAL858기 폭파’와 같은 엄청난 공작에 이미 공개된 암호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29. 김승일의 여권을 위조해준 것으로 알려진 이경우(미야모토 아키라)는 이미 일본과 한국의 공안기관에 의해서 감시받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어떻게 이미 노출된 인물을 이용해‘KAL858기 폭파 사건’ 같은 공작을 꾸밀 수 있는가?

30. 거짓 부유물로 밝혀진 구명보트를 발견했던 버마 화물선 다곤1호는 우리나라의 해운공사 소속 배였다고 한다. (정형근 인터뷰) 어떻게 그 중요한 거짓 증거물이 하필 한국 국적선에 의해 - 그것도 버마 앞바다에 있는 한국 국적선에 의해 - 발견이 됐을까?

31. 구명보트가 발견됐다는 최초 발견 지점 발표와 이후 안기부가 발표한 구명보트 발견지점은 서로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32. 구명보트 안에서 발견된 부숴진 수동펌프에 대해서 안기부와 국정원은 왜 거짓말을 했는가?

33. 90년 3월에 발견된 KAL858기의 동체조각 이라는 것을 안기부는 왜 폐기했는가?

34. 과거 안기부는 KAL858기가 어디스(Urdis)을 지나, 4분정도 비행한 뒤 폭발됐다고 발표했었는데, 최근 국정원은 KAL858기의 추락지점을 바로 어디스(Uddis)로 발표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5. 버마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87년 12월 중순경 KAL858기의 추락에 대한 제보가 접수됐었는데, 왜 우리 정부는 추락지점에 대해서 제대로 수색을 하지도 않고, 블랙박스도 탐지하지 않았는가?

36. 김승일, 김현희의 여권에 일본 출입국 흔적이 분명히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37. 동경과 방콕에서 호스테스 생활을 했던 다쿠치 야에코를 김현희는 어떻게 알았는가?

38. 여권을 보면, 김현희와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84년8월25일 같은 날 도쿄에서 방콕으로 간 것으로 돼있는데, 이는 어찌된 일인가?

39.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라는 여자 행세를 하면서, ‘다카하시’라는 남자의 여권을 위조해 다녔다. 왜 그런 엉터리 위조를 했는가?

40. 북한의 최부장은 실존하지도 않는 하치야 마유미의 신상을 김현희에게 알려주면서, 마치 마유미가 실존 인물인양 신원내역을 암기하고 다니라고 했다. 왜 이런 엉터리 명령을 내렸는가?

41. 사건 당시 기사를 보면, 김현희는 ‘야카베 마유미’라는 또 다른 여인의 운전면허증을 갖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 운전면허증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또 왜 그것을 갖고 다녔는가?

42. 김현희의 재판 증거물 목록에 보면, 김현희가 ‘조선노동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정말로 김현희가 ‘조선노동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는가?

43. 김승일과 김현희가 실제로 갖고 다녔던 84년 8월25일~10월2일의 여권에 찍혀있는 출입국 도장과 재판 판결문에 적혀있는 행적의 내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44. 김승일의 84년 9월21일~26일 사이의 서울 행적에 대해서 왜 안기부의 초기 수사발표와 최종 수사발표 그리고 재판부의 판결문 내용이 서로 다른가?

45. 김승일과 김현희가 유럽에서 찍었다는 사진들은 왜 공개를 하지 않는가?

46. 공개된 김승일과 김현희의 사진 중 일부는, 누군가가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들이다. 그 사진은 누가 찍은 것인가?

47. 공개된 사진 가운데 김승일이 베오그라드에서 찍은 사진 속의 나무그림자와 김승일의 그림자가 서로 각도가 틀린 이유는 무엇인가?

48. 김현희는 <고백록>에서 김승일과 같이 베오그라드에서 사진을 찍은 날이 비가 오락가락하는 안좋은 날씨였다고 했다. 그러나 촬영된 당시 사진을 보면,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49. 김승일과 김현희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목격이 되었다. 그 젊은 남자는 누구인가?

50. 70살의 김승일 부검감정서에 붙어있던 40~50대로 보이는 남자 사진은 누구의 사진인가?

51. 실종유예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왜 정부는 서둘러 실종자들을 일괄 사망처리 했는가?

52. 90년3월27일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있기 한달여전부터, 갑자기 김현희의 화동사진이 등장(2.25) - 거짓으로 밝혀짐 - 하고, KAL858기의 동체조각이 기적적으로 발견(3월초) - 폭발흔적 없음 - 되더니, 최종판결 뒤에는,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위령탑이 기공되고(4.9), 바로 김현희를 사면(4.12)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것이 과연 우연인가?

53.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위해 살려 둔 김현희를 국정원은 왜 꼭꼭 숨겨두는가? - 노태우, 김영삼 정권 시절 안보강연, 신앙간증, 집필(?) 활동 그리고 방송출연 등 다양한 대중공개활동을 했던 김현희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공개활동을 갑자기 중단했다.

54. 김승일과 김현희의 행적을 사건 초기부터 미국의 국무성내 한국과, 국제테러담당실, CIA 등이 함께 추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안기부의 사건수사발표 당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발표된 이유는 무엇인가?

55. 북한에 대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소집한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북한이 “아부다 비에서 남한 외교관 11명이 KAL858기에서 내렸다”라고 주장하며 KAL기 실종이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을 때, 왜 남한은 당시 승객명단을 보여주며 반박을 하지 못했는가?

56. 대한항공에서 제시한 KAL858기에 탑승했다가 아부다비에서 내린 승객 명단 가운데, 국적이 표시 안 된 승객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57. 실종자 명단이 호외보도, 최종보도, 재판 판결문에서 다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58. 실종자 중에 몇 명은 주소가 서로 다르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59. 아부다비에서 내린 김승일과 김현희를 - 당시 신이치와 마유미 - 우리 정부와 대한항 공은 사건 초기 신속하게 추적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사실을 일본대사관 쪽에 바로 알리지 약 24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렸는가?

60. 김승일과 김현희가 바레인에 입국했을 때, 당시 아직 KAL858기의 실종이 보도되기도 전이고, 일본 대사관에서도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을 때, 두 사람이 투숙하고 호텔과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온 여성은 누구인가?

61. 대한항공사 직원이 바레인의 호텔방으로 김승일과 김현희를 찾아갔던 사실이, 김현희의 진술과 안기부 수사발표 내용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62. 안기부가 발표한 김승일과 김현희의 행적에는 동독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지품 가운데, 동독 동전과 동독에서 찍은 사진이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

63. 김승일은 죽고, 김현희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가운데, 사건 발생 사흘만에, 김승일 과 김현희 유럽 행적이 보도가 됐고, 그 정보는 안기부에서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안기부는 과연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는가?

64. 아직 김현희의 진술이 있기도 전에, 김현희가 폭약을 인계한 곳이 베오그라드 였음이 역시 신문에 보도가 됐는데, 그 정보의 제공자인 안기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사전에 알 수 있었는가?

65. 호외보도와 이후 보도에서 KAL858기의 바그다드 이륙시간과 방콕 도착예정시간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66. ‘9시간 뒤 폭파’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앙일보에 ‘9시간 뒤 폭파’가 보도된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67. ‘일본 여권 위조’로 일본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한 마유미가 아직 분명치도 않은 테러범죄의 혐의만을 갖고 한국으로 인계된 이유는 무엇인가?

68. 88년1월15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현희의 자필맹세문의 용지와 내용 중의 ‘규율’이, 다음날 신문에 용지도 바뀌고, ‘규률’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69. 88년3월경 이미 거짓말로 들통 난 김현희의 화동사진이 89년 3월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에 그대로 증거물로 채택된 이유는 무엇인가?

70. 검찰이 범행 입증자료로 제시한 증거물들은 모두 김현희의 폭파를 입증할 증거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김현희를 폭파범으로 단정해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는가?

71. 김현희의 거짓 진술로 밝혀진 ‘평양시 문수구역’이라는 주소가 대법원의 판결문에 까지 버젓이 기재될 정도의 엉터리 재판이 행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72. 안기부 수사보고서와 검찰 공소장 등에서 ‘공중 산산조각 폭발’로 표현했던 KAL858기 사건이 왜 최근 국정원의 답변에는 ‘추락’으로 바뀌는가?

73. 안기부가 1998년 10월 14일 안기부 KAL858기 사건을 ‘북풍 의혹’사건으로 거론한 근거는 무엇인가?

1. KAL 858기는 1987년 9. 2 김포공항에서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비상동체착륙을 하는 등 과거에도 두 번씩이나 기체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하였고 사고기 출항은 고장수리한 후 첫출항이었습니다. 실종소식이 전해지자 사고원인은 배제한 채 불순분자에 의해 폭파된 것으로 단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희생자 가족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도 무엇 때문에 그런 단정을 했습니까?

2. 우리 가족들은 김현희의 진술 이외 KAL 858기가 폭탄테러에 의한 공중폭발로 추락했다는데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증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3. 우리 가족들은 정부가 어떤 근거로 사고지점이 버마의 안다만 해역이라고 추정하는지 확실한 사고지점이 어딘지 밝혀주십시오.

4. 1988. 1. 13일자 태국 방콕에서 발간되는(데일리 뉴스)지 보도에 의하면 KAL 858기의 잔해가 버마의 카렌족 지역에 있다고 했는데 전문가의 말로는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고도 12,000m에서 파괴 비산되는 파편이 버마 안다만 해역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데 정확한 지점은 어느 곳인지요.

5. 인도양의 모리셔스해에서 추락한 남아프리카의 점보기는 1년에 걸쳐 항공기 잔해와 승객의 유품이 발견됐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 007기의 경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 됐는데, 사고 발생 단 10일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키고 탑승객의 유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작업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며 수색작업을 종결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6. 안기부가 이들이 범행에 사용했다고 밝힌 폭탄은 파나소닉 RF-082형 라디오를 개조한 것에 넣은 콘포지션 C4 350g과 술로 위장한 `PLX` 액체폭탄 700cc 뿐이라 했는데 `주간 산께이` 1988. 2. 4일자에서 일본의 군사평론가인 오가와 가주히사씨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이 정도의 폭약으로는 고도 1만m를 나는 비행기를 공중분해시킬 수는 있지만 폭발에서 공중분해까지는 약 5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폭발직후 KAL 858기가 사고발생 긴급발신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7. 바닷속에서 1천도의 온도와 중력의 1백배를 견디면서 30일 동안 반경 2마일에 계속 발신음을 블랙박스가 보낸다고 하는데, 사고원인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인 블랙박스는 어디에 있으며 왜 수색작업 초기에 블랙박스에 대한 언급과 수색에 소홀했는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며 사고 발생 초기에 블랙박스 수색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8. 1983년 소련 공군기의 미사일에 의해 요격 당한 KAL 007기의 경우에도 비행기의 동체를 포함한 잔해 및 승객의 유류품들이 발견됐는데 858기의 경우에는 동체를 비롯한 잔해가 KAL 858기의 잔해임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주요 물품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는 승객들의 유류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바 그 이유는 무엇인가?

9. 실종유예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이 종결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교통부가 희생자 가족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실종자들을 일괄 사망처리한 것에 의문을 가지며 황급히 사망자 처리를 해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누가 지시를 했는지 우리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10. 1차 수색이 실패로 끝난 직후인 12월 10일 안다만 코코 제도 부근에서 미군 정찰기에 의해 부유물이 발견되자 수색팀과 함께 수색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거절했는데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11. 아랍에미레이트 주재 한국대사관은 1987. 11. 30 하치야 마유미가 한국에 입국금지된 인물이라고 했지만 당시는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던 시점인데 정부가 어떻게 하치야 마유미가 입국금지의 요주의 인물인지를 확인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 이처럼 처음부터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를 추적한 이유는 무엇인가?

12. 1987. 11. 30 외무부가 바레인 정부에게 요청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의 출국금지요청의 요청사유는 무엇이었는가?

13. 1987. 12. 3 버마의 카렌족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는 있지만 수색결과가 어떠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수색결과에 대해 궁금하다.

14. 바레인 정보성에 의하면 음독을 했다는 마유미는 3일 후에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아사히저널 1988. 2. 26)고 하는데 안기부는 서울에 도착한 1987. 12. 15 까지도 음독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고 상반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어 가족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왜 이처럼 바레인 정보성의 발표와 안기부의 발표가 차이가 있는가?

15. 안기부의 발표에 의하면 김현희는 72년 11. 2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 제2차 회담에 참석한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장본인이라고 하며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고 있으나 우리 가족은 안기부가 제시하고 있는 사진에 나타난 인물의 귀를 봤을 때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부인하고 있으며 1988. 3. 25 `아사히 저널`에서도 김현희와 정희선 가운데 사진의 인물과는 정희선이 더 닮았다고 하는데 김현희가 잘알 것 아닙니까?

16. 안기부의 발표에 의하면 철저히 훈련받은 공산주의자인 김현희가 한국에 온 지 단8일만에 자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울시내 거리 여행과 TV시청 등을 통해 그 동안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 허구였다는 것을 느끼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음. 그러나 김현희는 84년 8월 15일부터 1개월간 빈-코펜하겐-프랑크푸르트-제네바-파리 등에서 자본주의 훈련을 받아 한국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뿐 아니라 체포 직전에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철저한 공작원이었다며 발표했는데, 어떻게 그런 공작원이 이처럼 쉽게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해외적응훈련까지 받은 김현희가 그토록 쉽게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17. 공작원이 공작지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공작원의 철칙이라고 했는데 7년 8개월간의 훈련을 받은 김현희가 공작지에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가지고 다닌 이유는 무엇이라고 조사됐으며 특히 체포될 때 결정적인 물증이 되는 김정일에게 맹세했다는 맹세문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조사됐는가?

18. 1987. 11. 30. 아랍에미레이트 주재 한국대사관측은 하치야 마유미는 한국에 입국금지된 요주의 인물이라고 발표했는데 당시까지 하치야 마유미의 신원에 대해서는 언급되지도 않고 있음에도 이처럼 마유미가 범인인 듯한 암시를 주는 이러한 발표를 한 이유는 무엇이며 특히 하치야 마유미가 한국에 입국금지된 요주의의 인물이라는 증거와 사유는 무엇인가?

19. 안기부가 김현희의 아버지인 김원석이 1987. 11월 현재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북한은 앙골라 주재 북한외교관 중 김원석이라는 사람은 아예 없을 뿐 아니라 앙골라에는 수산대표라는 직책도 없다고 하는데 안기부의 주장을 입증할 물증은 무엇인가?

20. 1988. 1. 15자 중앙일보에 발표된 맹세문과 다음날인 1. 16 조선일보에 발표된 맹세문은 종이에서도 백지와 편지지로 다를 뿐 아니라 `규율`이 `규률`로 바뀌는 등 단어도 다른데 이처럼 석간과 조간의 차이로 맹세문이 뒤바뀐 아유는 무엇인가?

21. 김현희가 쓴 자술서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닌 것이 약 1백개나 돼 김현희가 과연 북한사람인가에 대해 의문이 많다고 하는데 북한사람인 김현희가 북한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조사가 됐는가?(예를 들어 자술서에서 `녀안내원` `오뻬라`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실제로 북한에서는 사용하는 단어는 `녀성 접대원` `오페라` 혹은 `가극`이라고 함)

22. 안기부 발표에 의하면 김승일은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와 영어에 능숙하다고 했으나 KAL 바레인 지점 김영호 과장이 11. 29 하치야 신이치와 통화를 했을 때는 아주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고 진술(동아일보, 1988. 1. 19)했는데 누구의 주장이 사실인가?

23. 1987. 11. 30부터 한국정부를 비롯해 일본정부가 호텔로 전화를 거는 등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됐음을 알고 있음에도 하치야 부녀가 12. 1일까지 하루동안 계속 호텔에 머문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바 이들이 하루내내 추적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조사가 됐는가?

24. 김승일과 김현희가 아부다비에서 바레인에 도착한 11. 29일 오전 4시 34분부터 12. 1일 로마로 가기 직전 음독할 때까지 탈출하기에는 충분한 이틀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탈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의구심이 많은데 조사과정에서 탈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밝혀졌는가?

25. 안기부는 김승일과 김현희가 가지고 있었던 위조 일본여권은 `개인이나 테러단체에서는 제작할 수 없고 고도의 기술을 가진 정부기관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하며 북한이 만들었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바 이들의 위조여권을 북한이 만들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26. 공작원이 위장여권을 사용할 때는 다른 나라에서 전혀 의심하지 않도록 아무런 하자도 없는 사람의 것을 사용하는 법인데 김승일이 사용한 위장여권의 인물인 `하치야 신이치`는 이미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돼 있는 사람임. 이 점에 대해서도 가족들은 의구심이 많은데 북한이 이런 실수를 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조사됐는가?

27. 안기부는 김승일과 김현희가 소유한 위조여권은 개인이나 테러단체는 제작할 수 없고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부기관에서 만든 것이라 하여 대단히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발표하지만 마유미의 경우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 고유번호의 여권을 사용하는 등 위조여권임이 쉽게 확인될 정도로 조악했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28. 1987. 12. 9 대한항공이 작성한 수색활동보고에 의하면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858기의 부유물을 찾고자 인공위성을 통한 정밀촬영을 계속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아 우리 가족들은 결과에 대해 대단히 궁금해하고 있으며, 인공위성을 통한 수색결과는 어떠했고 15년째 가족들의 유해 유품조차 찾지 못해 슬픔에 빠져있는 우리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할 수는 없는지?

29. 백악관 대변인은 KAL 858기가 북한에 의해 폭파됐다는 것을 여권과 청산가리를 예로 들며 확증하면서도 다른 증거도 있지만 밝힐 수 없다고 했는데 밝힐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고 15년 된 지금도 다른 증거들을 밝힐 수 없는가?

30. 김현희가 음독후 최초로 진찰한 바레인 살마나야 병원의 야코비안 응급부장은 마유미에게서 위 세척을 해도 독극물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며 김의 음독설을 부인했는데 당시 야코비안 박사가 진찰한 기록을 제시할 수는 없는가?

31. 국제적인 범죄의 경우 범인을 체포한 국가에서 최우선적으로 범인에 대한 수사권이 있음에도 범인을 체포한지 불과 15일만에 수사권을 포기하고 범죄인 인도협정도 맺지 않은 한국에게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32. KAL 858기를 통해 아부다비 공항에 내린 15명 가운데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마유미, 교체 승무원(KAL 858) 등 4명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의 신원은 누구인가?

33. 실종된 승무원 권미경양의 어머니에게 아부다비에서 교체된 승무원인 박은미양이 KAL 858기에 기름이 새고 있다는 무선연락을 들었다고 이야기를 했고 그후 사고소식을 들었다며 미경양과 친구인 은미양이 연락을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