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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의 야화/애정비담/의협미담

고양도깨비 2007. 2. 14. 21:55

 <제 16 화>   愛情悲譚(애정비담)

                         
                                   斬首된 별아기
          
          
            신라 제 이십육대 진평왕(眞平王)이, 새로 쌓은 남산성 성문은 굳게

          닫히우고, 성벽도 높으니 불의의 외적에 의한 야중 피습의 염려는 거의

          없었으나, 그  거의 라는 것이,  전연 과 달라 번도는 군사의 수고로움만은

          아끼지 않았다.
          반달 빛이 푸른 으스름 밤이었다.
          성곽이 그림 같은데, 그 속에 움직이는 두 그림자가, 동쪽 담밑에서

          나타났다.
          여보게, 대야성(大耶城)에, 있을 때보다 외로워 못견디겠네 
          새로 축성(築城)한 곳이고 성주(城主)도 어리니 그런 마음이 드는거지 
          그들은 번(을)도는 두 군사였다.  얼마전까지, 대야성에 있다가,
          신축된 남산성으로 떨어져 온 오백 군졸중에 끼워진 사람들이다.
          인젠, 변경(邊境)살이 좀 그만 시켰으면 좋겠어--- 계집, 자식, 떨어져

          세해가 됐네 그래---  허--- 이사람, 세터로 온지 반년도 못 되어 어느덧

          실증이 나면 어쩌나, 변경살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저 꾹--- 참
          아야지 그런데 여보게, 우리 성주는 변경살이가 좋은가부지? 
          아-니, 우리처럼 말단 졸개들도 지긋지긋한데, 성주가 귀양살이나 진배

          없는걸 좋아 할리가 있나, 서울에 있어도 떳떳한 자리 하나는 차지 할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 말일세, 지금 성주는

          스스로 병부령(兵部令)께 품해서 떨어져 나왔다네 
          어---, 별일도 다 있군, 그거 왜 그럴까? 
          하여튼, 이상한 일이야, 내막은 전연 모르겠지만, 북으로는 고구려가

          가깝고 서에는 백제의 땅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곳을 자원하다니, --- 언제

          백제군의 말 발굽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곳을. 더구나 어린 나이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도 한 두가지 생각나네 그려,어떤 때는

          성문위에 올라 서서,  퍼렇게 떠 오른 백제의 산봉우리를, 언제까지나

          건너다 보고 계시던 것이라든지, 남산성에 오신뒤 단 한번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든지 두 군사는 창을 어깨에 멘채 사방을 살필 염도 내지

          않고, 알수없는 성주의 비밀을 지껄이며 걸었다.
          그들의 대화가 잠간 그쳤을 때다.오른 편으로 걷고 있던 군사가 별안간

          멈춰서며, 옆에 있는 군사의 소매를 웅켜(움켜?) 쥐었다.
          저기 저기---  나직한 소리였다.
          그러나 오른 편 군사가 가리킨 것을 왼편 군사는 벌써 보았다.
          성주의 처소 앞에 어렴푸시(어렴풋이?) 떠 오른 흰 그림자. 그것은 좀

          움직이는듯도 하고, 돌 부처처럼 서 있는 것도 같았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러면 성주를 해하려는 자객일까!
          두 군사는 창을 바로 잡았다.  그리곤 상당히 떨어져 발소리를
          죽이어 다가갔다.
          누구요! 
          오른 편에 서 있던 군사가, 어둠을 타고 오다 푸른 달빛 속으로 내달으며

          쏘았다.  동시에 왼편에 걷던 군사도 맞은 편으로 내달았다.  두 군사의

          창이 달빛을 받아 개똥불처럼 푸르게 번쩍이었다.
          성주 가선랑(加仙郞) 두 군사는 주춤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분(그사람)

 

          이 바로 좀전까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나이어린 성주임을 알았다.
          황송합니다 
          밤중에 수고들 하네,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군사들은 다시 성벽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성주 가선랑.
          그는 미남자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김유신,
          관창, 사다함, 검군똥이(?), 모두 국선도(國仙道) 출신의 미남 무
          사이 듯이, 그도 화랑도를 거쳐 나온 미남 무사였다.
            올해 나이 스물 하나.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귀양살이나 다름 없는, 변경 성주를 자
          원했으며, 남들이 잠든 밤에도, 이처럼 잠 못이루고 처소 밖을 거
          닐고 있을까?
            또, 때로는 진흥왕이래 실환하여 서로 침공의 기회만 노려보는
          적국 백제를 다정한 눈매로 건너다 보고, 한없이 넋을 뺏기기도
          할까?
          
                            *         *         *
          
            진평왕(眞平王)은, 신라를 흥륭케한 원동력이 된 진흥대왕의 손
          자 되시는 분이다.  왕께서는 제위 오십사년간, 문물 제도를 고치
          고 또, 불법을 숭상하여 멀리 황해 건너까지 구법승을 보내시기
          도 하였지만, 그런 무엇보다도 변경 수비의 업적이 컸다.  거반
          퇴폐하여 가는 여러 성을 개축했고, 이름있는 장군을 뽑아서 변
          경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왕께서는 이런 소극적인 정책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나아가, 이웃나라를 넘겨다 보시기까지 하였다.
            고구려는 워낙 크나큰 나라래서, 지금의 국력으로 어찌할 수없
          는 것을 잘 아셨지만 백제는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래서 맨먼저 착수하신 계략이 염탐군(꾼?) 파견이었던 것이
          다.  장래 백제를 무찌를 때, 각각 군사 이천이상을 거느릴만한
          인재를 열명 선발할 것을 병부령에 이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백
          제 전역을 십등분하여 한 구역에 한명씩 보내되, 도랑하나 언덕
          하나까지, 샅샅이 탐사할 것을 분부 하셨다.
            그때, 뽑힌 열명이 한결같이 낭도들 뿐이었다.  무사도(武士道)
          를 익히 닦고,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범할줄 모르는 씩씩한 낭도
          들이라면, 능히 중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을 상하가 모두 믿었다.
            낭도 가선랑도 이 열명틈에 끼일 영광을 부여 받았다.  그것이
          두해전 그러니까 가선랑의 나이 열 아홉 때다.
            고구려와 흡사한 백제의 의복으로 변장한 염탄군 열명은 국경
          에서부터 각기 맡은 구역을 향하여 헤어졌다.
             가선랑! 염탐이나 잘 하게, 괜히 백제 계집한테 혹하지 말구
             남 걱정 말고, 자기나 튼튼히 하라구
            그들이 헤여지는(헤어지는?) 자리에서 춘욱랑(春郁郞)과 가선랑
          은 이렇게 농치며, 잠시간의 이별이나마 퍽으로 애석해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갖 농담이 아니었음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
          다.
          
                            *         *         *
          
            가선랑에게 맡겨진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일대였다.  고국을
          떠나 어언 한삭반,  옥같이 하얀 발이 부르트고, 터져 망칙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지금도 고달프질 않았다.  아니, 그의 젊
          은 피는 굳굳한 가슴속에서 들끓기까지 하였다.  얼마 후에 신라
          의 준비가 갖추어지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질풍같은 군사를 이
          끌고 이땅을 휘몰아칠 것을 그려보니 꿈 많은 가슴이 잔잔할 리
          없었다.
            그때의 그 통쾌 무비할 감격!
            그는 마상에 높이 앉아, 번개처럼 내달린다.  그의 칼날이 번득
          이는 곳에 백제군은 초개같이 쓰러지고, 그는 이지방에 웅거한다.  
          그렇게되면 그동안 자기를 거처시켜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그의 상상은 이국의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퍼져 올라 가는 것이었다.
             여보, 젊으신네
            가선랑은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제 정신을 돌이켰
          다.  뒤에는 오십이 조이(적히?) 되었을듯한 노인이 초조한 모습
          으로 서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졌는데, 무슨 연유로 인가가 아득한 고개 밑에
          서 쉬시오?
            그는 그제서야, 동네를 빠져 아득히 걸어 왔으며 그 쉬고 있는
          곳이 운봉재 밑턱의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임을 깨달았다.  걷던
          발이 쓰라려 잠간 쉬려던 것이 이토록 늦은 것이었다.
             길 떠난지 오래되어 발은 부르트고, 몸은 피곤하여 잠간 쉰다
          는 것이 그만!
             그럼 젊으신네는 고개를 넘어 가오?
             글쎄요, 아무곳이나 인가 있는데로 가야 합지요
             허- 마침 잘 되었군, 우리집이 바로 고개 넘어요,  나는 꼭 이
          밤으로 집에 들어 가야만 할일이 있는데 어두운 고개를 혼자 넘
          을 생각을 하고 퍽 근심을 했더니 이렇게 만나 다행이군.  동행
          하자구!
            가선랑은 쓰라린 발을 꾹 참고 노인을 따라 일어 서면서 오늘
          밤은 이 노인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고개를 잡아 들어 몇걸음 올라 갔을 때는 어둠의 장막
          이 온 누리를 덮어 버렸다.  운봉재는 승강로가 십리는 훨씬 넘
          는 커다란 고개였다.
            사방은 온갖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연달아 드어차고 고갯길
          은 논두렁처럼 좁았다.  어둠은 각 일각 짙어오고, 어둠이 짙어
          올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무시무시해졌다.
            가선랑의 담대한 마음도, 금방 숲속에서 호랑이라도 뛰어 나올
          듯하여 움찔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노인이 무서워지기도 하였다.  
          엄연히 밤중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동행하여 고개를 넘자던 노인
          이 이상해졌다.  그는 애써 자기의 약하게 되는 마음을 가누려
          했다.
            (너는 화랑이 아니냐 !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낭도!  이제 백
          제의 커다란 강토를 휘감으려는 장부가 요까짓 고개길에 가슴을
          조이다니 ! )
            제가 저를 격려하고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침착해지는 듯도
          하였다.
            그들이 고개 마루턱에 올라섰을 때 활대같은 반달이 하늘에 떴
          다.  그때까지는 무사하였음에 안도의 긴숨을 내뿜고 막 내리막
          을 잡아 들었을 때다.  갑자기 노인은 꼳꼳해지며 가선랑의 오른
          팔에 매달렸다.  가선랑도 처음에는 눈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것
          도 잠시--- 화랑의 아랫배에서는 하늘이라도 뚫을듯한 용기가
          무럭 무럭 피어 올랐다.  그는 벌써 수백만의 적군을 앞에 놓은
          용감한 무장이었다.  우선 침착하게 노인의 손아귀를 풀고 허리
          속에 감춘 칼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칼을 빼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한 이십보 앞에 도사리고 앉은채, 눈
          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는 호랑이 한마리를 봤던 것이다.
            그의 단도는 공중에서 두어번 그네를 타더니 달빛을 가르고 유
          성처럼 흘렀다.  가선랑의 재주는 무서웠다.  칼은 호랑이의 콧등
          한복판에 꽂혀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단도 하나가 거대한 동물
          을 즉사시키기에는 너무도 약하였다.  운봉재가 흔들릴듯한 비명
          이 무섭더니 호랑이는 몸을 솟구치려 했다.  단지 솟구치려 했을
          뿐이다.  어느덧 두번째 칼이 정수리에 백여 주춤 물러 앉고 말
          았다.
            두군데나 급소를 얻어 맞은 호랑이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가선랑이 세번째 칼을 빼들고 겨우 한숨을 돌릴 때--- 그것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찬 바람이 휙--- 일더니 호랑이는 마지막
          정력을 다하여 그에게 덥쳤던 것이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가선랑은 밑에 깔리고 말았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앞 발톱은 그의 옷을 찢고 어깨에서 배까지
          깊숙한 상처를 파고야 말았다.  만일 이때 호랑이에게 손톱끝만
          한 힘이라도 남았었다면 가선랑은 영원히 못 일어나고 말았을 것
          이다.  다행히 호랑이는 마지막 발악을 남겨두고 그대로 굴러 떨
          어져 뻗었다.
            가선랑은 온몸에 피칠을 한채 노인에게 부축되어 삼경이 넘어
          서야 노인집에 이르러 아픔과 긴장 끝에 마친 피로로 인하여 잠
          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상처가 쓰라려 오고 갈증이 생겨 어렴푸시 의식을 회복한 그는
          누가 자기의 상처에 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가선랑은 실날같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는 천근같은 고개를 부루 잡으려 했다.  바로 자
          기 옆에 앉은 낭자(娘子).
            몽롱한 시야 속에도 꽃송이 같이 예쁜 낭자의 자태가 비쳤던
          것이다.
             움직이시면 안 되어요!
            가선랑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자 낭자는 급히 말했다.
             지금 막 칡 가루를 뿌렸으니 괴로우시지만 한참만 그대로 계
          셔요
            낙랑한 음성.  속이 후련히 터질듯이 시원한 성대였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히 노인 집일텐데, 노
          인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처녀만이--- )
            가선랑은 아직까지 젊은 낭자를 가까이 해 본일이 없었다.  낭
          도들을 일명 풍류도(風流道)라 부르고 무술을 익히는 반면 자연
          에 조화할 수 있도록 정서적인 심정도 만들어 줌이 도의 방침이
          었지만 여자만은 가까이 못하도록 했다.
            샛별같은 처녀의 향기는 그를 어지럽게 했다.
             노장은 안계시오?
             아버님 말씀이어요?
             그분이 아버님이 되시던가?
             예
            가선랑은 낭자한테서 그 노인이, 호랑이를 지고 오도록 동네
          젊은이에게 이르시고, 새벽을 타서 도루 고개너머로 가셨다는 것
          을 들었다.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문풍지를 물들였다.
             무슨 바쁜 일이기에 새벽에 도루 가셔야 되오?
             오늘까지 군덕솔(德率-군을 다스리는 관리) 사품(四品)께 헌신
          해야, 한다 하여요.  무슨 관직을 얻으실듯 하다고 하시며, 그 기
          쁜 소식을 이몸에게 이르시러 밤길을 타 오시다 그런 변을 당할
          뻔 하셨다고 해요.  이 젊은이 아니면 목숨을 잃을번(뻔?) 하였다
          고 정성껏 보살피라고 이르고 가셨어요
            가선랑은 그 낭자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도 들었
          다.  상처가 자꾸 쑤셔 왔다.
          
                            *         *         *
          
            낭자의 이름은 별애기라고 했다.
            가선랑의 상처는 두 부녀의 정성어린 간호에 나날이 괘차하여
          갔다.
            상처가 아물어 가면 갈수록 가선랑과 병애기 사이의 요화같은
          사랑은 점점 짙어갔다.
            생전 처음 대하는 따뜻한 여자의 정성과 아리따운 용모는 가선
          랑의 젊은 피를 끓일대로 끓여 놓았고, 별애기의 수줍은 마음속
          엔 어엿하고 용감하고 잘 생긴 가선랑의 영상이 시각마다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별애기!
             예?
             아버지가 혹시 그말을 입 밖에 내시지나 않을까?
             아이, 서방님도 별 생각을 다 하시네요.  이몸의 아버지도 서
          방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몰라 가슴 조리고 계시온데
          서방님의 몸에 해가 미치도록 하실라구요.  어서 몸이 쾌차하셔
          서 하루속히 신라로 가셔야---  
            별애기의 말끝은 흐려갔다.  가선랑이, 자기를 떨어져 신라로
          간다는 생각만 하여도 간장이 녹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낭도들은 신라에서도 으뜸되는 분들 뿐이라는데,  ---그리고
          신라에는 선녀같은 여자가 많고 그들은 한결같이 낭도들만 사모
          한다는데---)
            이런 생각이 잠시도 별애기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
          고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라여자에 대한 질투가 횃불같이 일
          어났다.
             별애기, 내가 어서 신라로 돌아가야 별애기 속이 편하겠소?
             아유 어쩌면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수
          록 이몸은 기뻐요.  언제까지든지 언제까지든지, 계시오면 이몸은
          더 바랄것이 없어요.  그러나 서방님은 가셔야할 몸, 한개의 계집
          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칠 수도 없는 귀하신 몸, 단지 어서 속히
          가셔서 이땅에 서방님의 우렁찬 호령소리가 들릴 때만 기다리겠
          어요
             별애긴 나라도 생각지 않고---  
             서방님, 계집에겐 나라 보다 지아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셔
          요?  나라걱정은 사내들이 할일이요, 계집은 지아비만 성심 성의
          섬기면 될줄 알아요
            별애기는 자기가 백제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까맣게 잊어 버
          렸다.
            나라는 백제면 어떻고 신라면 어떠리.  자기에겐 가선랑의 믿
          음직스러운 품만이 안식처가 아니냐!
             그럼 별애기도 이번에 나따라 신라로 갈까?
             서방님 그런 말씀이 어떻게 나옵니까?  나도 그런 마음을 서
          방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몇백번 먹어 왔어요.  그러
          나 안될 일.  만일 이몸이 서방님을 따라 신라로 가 보아요, 문무
          백관이 모-두 서방님을 비웃으실 뿐 아니라 이몸으로 인하여 어
          떤 화가 미칠지도 모를 일이 아니어요?  단지 한가지 길은 좀 전
          의 말처럼 어서 이땅에 신라군의 승전고가 울릴 때만 기다리는
          것 뿐이에요
            어째 별애기로서도 가선랑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랴!  
          그러나 그가 자기가 딴 나라 무사를 따라 감으로써 생길 일을 등
          불보듯 환히 알 수 있었다.
             별애기, 내 이런말 한다고 너무 섭섭해 마오
             ?
            별애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초조하게 쳐다 본다.
             신라를 떠나 벌써 석달.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한도 이달 그
          믐으로 마지막이요.  별애기를 생각하면 단 한발도 이곳을 떠나
          긴 싫지만--- 별애기 말처럼 사내에겐 나라가 중한것!  내일 아
          침에 이곳을 떠날까 하오
            별애기는 이어코 오고야 말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
          은 잔 물결처럼 가라 앉는것이었다.
             가셔야 하지요.  아직 기한을 넘기지 않으셨다니 무엇보다 다
          행입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름다운 신라여인네에게 묻혀서 이몸
          을 잊으시기나 하면---  
            별애기는 그 다음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지를 몰랐다.
            (이몸을 잊으시면 난 죽고 말테야요)
          할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느껴져 꿀꺽 삼
          키고 말았다.
             별애기, 별애긴 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 저 하늘에서 별빛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면 모르거니와 그전에 내 별애길 잊을듯
          싶소?  이제 신라로 가거던 상부에 소청해서 별애기가 살고 있는
          이땅이 보이는 곳에 성을 하나 신축하고 그곳 성주로 도임해 나
          오겠소.  그리곤 매일처럼 백제를 건너다 보며, 별애기의 안부를
          묻겠소.  밤이면 하늘에 뜬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이품에
          안아 보겠소.  그리다가 상감마마의 명령이 떨어지는날 바람처럼
          이땅에 쳐 들어 오겠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오
             우정 귀하신 자리를 내놓고 국경으로 오신다는 말씀.  정말이
          에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서방님이 이몸을 잊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믿을 테야요
             화랑은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것.  내 말에 거짓이 있
          다면 천지신명께 죄 받을 것이요
             서방님!
            별애기는 가선랑의 품에 쓰러졌다.
            아아!  뼈에 저리도록 고마우신 이 말씀!  가선랑이 그토록이
          나 자기를 사랑해 주고 계셨던가!  그는 가선랑이 이땅에 쳐 들
          어오는 날이 백년 뒤라도, 그리고 자기가 홀 몸므로, 흰머리를 뒤
          집어 쓰는 한이 있어도 가선랑을 위해서 이 집터에 기다리고 있
          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두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이다지
          영글게 익어 버렸던 것이다.
          
                            *         *         *
          
            염탐군(꾼) 열명이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진평왕은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일일히 그들을 위무하시
          고서 정세를 하문하시었다.
            사비성 일대를 맡았던 춘욱랑은 백제에서도 굉장한 군비를 갖
          추고 있더라고 정세의 녹녹치 않음을 아뢰었다.
            가선랑은 이 기회에 자기의 결심한 바를 아뢰고저 어전에 부복
          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고?
             상감마마 우리나라의 수비의 허술함을 보았읍니다.  성이 있
          어야 할 자리에 없음을 보았읍니다
            가선랑은 남산성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은 왕명으로
          하달되었다.
            물론 가선랑은 남들이 달갑게 생각지 않는 성주 자리를 자원했
          고 병부령은 그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즉석에서 허락되었다.
            가선랑은 그날부터 석공, 목공, 잡역부를 격려하면서 축성에 착
          수했고, 그것이 준공되던 날은 상감마마이하 집사성시중(執事省
          侍中)등 백관이 모-두 먼길을 행차하셨다.
            가선랑은 이런 중에도, 별애기를 끊임없이 그리었다.
            신변에 무슨 일이나 없을까?  그 동네로부터 자기에 대한 이상
          한 소문이 퍼지지나 않을까?
            성이 준공되는 날은 성문위에 올라서서 온 천지가 깜짝 놀랠듯
          이 외치고 싶었다.
             별애기.  나는 지금 훌륭히 그대와의 언약을 실행 했소 ---라
          고.
            성에 틀어 백이던 날부터 그는 단 십리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
          다.  매일처럼 성문위에 올라 서서는 백제 땅을 건너다 보며 자
          기 생각을 하고 있을 별애기를 그리워 했다.
            별애기---
            정말 별애기의 골수에 사모치는 간호가 없었다한들 자기가 그
          렇게 속히 완쾌되지는 않았으리라.
            엄연히 적국의 염탐군인줄을 알면서도 사랑을 송두리채 바쳐주
          던 별애기.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아버지의 은인이라는 것하고 간호를 전
          담해 줬다는 이유로써만 싹튼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더욱
          거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끓는 피의 혼
          류였다.
          
                            *         *         *
          
            별애기는 가선랑이 떠나가던 날, 종일을 울음으로 흘렸다.  아
          직도 집안 구석구석마다 남아 있는 가선랑의 향기!
            별애기는 그 향기를 맡으며 한없이 가선랑의 이름을 외웠다.  
          그는 어쩐지 이번의 헤어짐이 영원의 헤어짐인 것만 같았다.  다
          시는 가선랑의 얼굴도 못 보고 말소리도 못들을 것만 같았다.
            왜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까?
            그러나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뚜렷해
          지는 것이었다.
            별애기는 매일처럼 동녘하늘만 우러러 보며 안타까웠던 두 해
          를 억지로 넘겼다.
            그때 그에게 무서운 운명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백제 무왕(武王)이 운봉산에 사냥 나오셨다가 그의 아리따운
          자태를 본 것이다.
            아름다운 꽃은 누구의 눈에나 아름다운 법이다.  이천을 넘는
          궁녀를 발밑에 둔 무왕도 일개 촌처녀의 선녀같은 자태에는 가슴
          이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오!  아리따운 여인인지고---  
            무왕은 자기의 신하 한사람에게 환궁하실 때 같이 입궐하게 하
          라는 분부를 내리시고야 말았다.  덧붙여 천한 궁녀처럼 허술히
          대하지 말고 왕비의 예로 받들라고 이르시었다.  신하들이 혹시
          어떻게 할까 함이다.
            이 기쁜 소식은(?) 그 즉시 별애기 부녀에게 전해졌다.  이 소
          문을 들은 동네처녀와 처녀를 가진 부모들은 부러워 마지 않았
          다.  그집안의 영귀는 무엇보다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애기 부녀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가선랑과 딸의 사이를 잘 이해했고, 그로 인하
          여 그냥 딸을 늙어 죽이는 한이 있다 하드래도, 자기 생전에는
          결코 출가시키지 않으려 마음 먹었던 ㅌ였다.
            허지만 왕명임에랴!
            별애기는 연약한 여자의 마음을 조일대로 조였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어가를 따라 입궐할 마음속은 터럭끝만
          치도 없었다.
            무서운 악마처럼 환궁의 날은 가까워온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이런 모진 마음을 몇번이나 먹어 봤다.  
          그렇지만 죽으면 안된다.  만일 자기가 없어진 후 가선랑이 이
          땅에 쳐 들어오면 그 얼마나 애통해 하랴!  그는 전설로 들은 호
          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 있드래도 가선랑에
          게 호동왕자가 맛 본 슬픔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연약한 계집의 몸으로 너무나 벅찬 난관을 어떻
          게 무너뜨릴 것인가!
            별애기가 고민끝에 한가지 길이 있음을 찾았다.
            (그렇다.  오늘 밤으로 이곳을 빠져 신라로 가자!  분명히 가선
          랑은 이곳이 보이는 땅에 성을 지어 놓고, 자기를 생각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로 찾아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 졌다.  그의
          아버지도 자기에게 돌아 올 화는 생각지 않고 딸의 갸륵한 심정
          을 어루 만졌다.
            별애기는 그 밤으로 여로의 근심을 없애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국경을 향하여 낯선 밤길을 더듬었다.  그는 가선랑을 위하여 그
          밑에 종노릇도 달가웁게 받을 각오가 섰다.  남의 나라에 들어가
          버젓한 무관의 정부인이 될것은 아예 마음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그는 잘 알았다.
          
                            *         *         *
          
            그때는 봄이었다.
            아지랑이 속에 남산성도 하늘하늘 나부꼈다.  노고지리 소리가
          유달리 가선랑의 외로움에 겨운 마음을 흔들어 주는 날이었다.
            노고지리 소리도 귀찮았다.  마음만 흔들어 주는 노고지리임에
          --- 기화 요초도 다 싫었다.
            별애기!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별애기가 그 옆에 없는 한 온
          화한 봄의 정기도 그의 마음을 아득하게 하여 주질 못했다.  그
          의 마음은 엷게 퍼지는 백운과도 같았다.
            그때다.
             백제놈인듯한 염탐군을 하나 붙들었읍니다
            무장 유백(兪伯)이 그에게 고했다.
             염탐군?
             그러하오,  어느덧 새성이 구축되었다는 정보가 들어간 모양
          이요.  스물도 넘지 못한 듯한 젊은 놈입니다.  이곳에 성이 언제
          구축되었으며, 성주가 누구냐고 묻더라 하오.  우리 군졸중에 그
          런 비밀을 함부로 가르쳐 줄 놈은 하나도 없지만 염탐군인 것을
          눈치채고 잡을 놈은 얼마든지 있소이다.  허허허허---  
            가선랑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두해 동안에 더욱 피어 났을
          별애기를 머리속에 꽉 채우고 있는데 그까짓 염탐군 한놈쯤--- .
             염탄군 붙들은 것까지 뭐 일일히 말씀하오.  그대가 잘 알아
          처참(處斬)해 버릴 것이지---  
            염탐군 같으면 즉석에 목을 짜를 것이지 보고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그는 이다지 군무를 호홀히 할 정도로
          별래기를 흠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염탐군이라는게 별애기
          의 변장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가 알리가 없었다.  몰랐기 때문에
          유백에게 목을 짜르라고 하명해 버린 것이었다.
            살생유택이라 하지만 염탐군은 살려서 소득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에게는 마땅히 살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우장 유백이 성주에게 보고할 그 임시 별애기는 성문앞에 꼭꼭
          묶여 있었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 나라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
          고 왕명을 어기고 자기 몸에 부어질 영광을 박차고 수백리를 왔
          다가 염탐군으로 몰려 잡힌 것이었다.
            남산성 군졸들은 그를 염탐꾼으로 밖엔 볼 수없었다.  성이 언
          제 구축되었느냐?  성주가 누구냐?  그런 질문을 듣고, 염탐군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너 백제 놈이구나!
             예
            별애기는 물론 백제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가 없었다.
             못된놈!  염탐군 짓을 할 테면 똑똑히 할 것이지, 죽는 것도
          모르고 범의 굴에 뛰어 들어!
            별애기는 깜짝 놀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염탐군?  그런것은 당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처음에
          는 청천의 벽력같은 이 말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망서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라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부딪친 성이
          이곳이긴 하였다.
            그러나 염탐군으로 묶이게 된 별애기!
            (적국의 염탐군이라면 죽이는 것일까?  차라리 모든것을 실토
          해 버릴까?  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가선랑을 찾아 왔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온 신라에 퍼질 것이다.
            가선랑은 백제에 갔다가 염탐은 제쳐놓고 계집에게 혹해 있었
          다고 백성이 비웃을 뿐 아니라 조정의 신임까지 저버리지나 않을
          까?
            그렇게 되면 가선랑은 신라에서 매장되어 버리고 자기는?---
            자기는, ---혹은 동정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나 나라와
          육친을 버리고 남의 나라 무장을 홀린 여우같은 계집이라고 무섭
          게 비난하는 사람이 한층 많을 것이다.
            (만일 이대로 입을 다물어 처형되고 말면?)
            가선랑이 나의 죽음을 알면 미친듯 애태울 것이다.  그리고 신
          라까지 찾아온 나의 순정을 알면 그것에 어떤 위안을 느끼고 명
          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공명을 드날릴 것이다.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선랑을 위한 것이나 아닐까?
            별애기는 작정했다.  어떤 일이 닥치드라도 결코 가선랑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만일 가선랑을 입밖에 내가지고 자기가
          그의 성을 찾아온 연유를 밝히게 될 때는 그가 새로 축성한 참뜻
          이 나라를 위함보다도 하나의 여자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대로 가선랑이 있는 신라에 들어선 것만도
          그에게 출가한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해야 한다.
            별애기의 마음이 차디 차졌을 때 무장 유백이 성문으로 왔다.  
          별다른 심문도 없었다.  있어도 함구할 별애기였고.
             성주께서 목을 베이란다!
            별애기는 움찔했다.  마음은 작정되었다 해도 진작 무서운 선
          고를 듣고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혹은 가선랑의 동관일지도 모를 성주가--- (지금까진 유백을
          성주로 알았다)
            군졸은 그를 끌어 냈다.
            별애기는 그대로 아무말이든 해선 안된다고 혀를 깨물었다.  
          그이를 위해서- 가선랑을 위해서-
            시퍼런 칼이 공중에 번쩍했다.  그 칼이 막 내려치려 할때 유
          백이 큰소리로 외쳤다.
             죽기전에 그렇게 알고 싶던 성주의 이름이나 알고 가거라!  
          가선랑!
            가선랑이란 이름이 별애기의 귀에 들렸을 때 그리고 그가 입을
          움찔하며 할때는 미처 숨쉴 겨를도 없이 차디 찬 칼날이 그의 목
          에 꽂혔다.
            그밤도 가선랑은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품에 안아 보았
          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던 하나의 별빛이 영원히 꺼져 버린 것도
          모르고.
          < 끝 >

    <제 17 화>   義俠美譚(의협미담)

      

                 千里遠情
          
            지금으로부터 칠백여년전 고려 고종(高宗)때의 일이다.  북방으
          로부터 원나라 군사가 조선국내에 쳐들어와서 전국 각처에서 상
          하 인민이 화를 많이 받은 때 일이다.
          
            < 1 >    
            강원도 명주(溟州)땅 지금으로 치면 강릉(江陵) 땅에 김천(金
          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천이 자(字)를 해장(海莊)이라하고 인물이 출중하게 잘나고
          천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인근 사방에 유명하였다.
            그는 날때부터 얼굴이 비범하게 났다고 일문과 인근읍에 소문
          이 났기 때문에 수령방백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일부러 찾아 보는
          일까지 있었다.  귀가 유난히 크고 시커먼 눈섭이 붓으로 그은
          듯이 뚜렷하고 이마와 미간이 넓직하고 입이 또한 ㅋ큼직하여 거
          의 귀밑까지 올라가고 눈이 약간 들어간 것이 이상스럽께 광채가
          있고 정기가 있는데다가 웃을때면 말할 수 없이 정당운 맛이 있
          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장차 일국의 재상이 될 관상이라 하였다.  
          아무튼지 김천의 얼굴에 귀인다운 데와 사람을 끄는데 모퉁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나이 겨우 열살이 넘자 벌써 용모에 어른답고 귀공자다운 태도
          가 있어서 동무들하고 놀면 언제든지 괴수가 되어 여러 아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게다가 공부를 잘하여 그야말로 일람(一
          覽)첩기로 하나를 배우면 열은 몰라도 두셋은 알아서 벌써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특별히 풍월과 시부를 잘하여 가끔
          선생과 붐모를 놀라게 하였다.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철을
          따라서 시를 지어서 읊기를 좋아하며 이태백 소동파의 글을 어떤
          것은 잘했다 어떤 것은 못했다고 비평까지 하였다.  그래서 신동
          이라 하였다.
            나이 열다섯살에 글 잘하고 말 잘하고 게다가 풍채가 좋아서
          동무들 사이에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될 뿐아니라, 동네 처녀들
          이 가슴속에 그 뛰어나게 잘나고 사내답고도  정당한 용모를 그
          리고  남모륵게 사모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그 얼굴 생김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맑고도 우렁찬 목소리와 그 음전하고도 활발한
          걸음걸이며 옷입는 맵시 어느 한가지 사람의 마음을 끌지 아니하
          는데가 없었다.  
            게다가 부모에게 대한 효성이 지극하며 모든 예절이 깍듯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집안에서도 늘 귀염을 받는 중에 특별히 그
          모친 김씨의 총애를 받고, 김천도 모친을 극진히 사랑하여 어려
          서 부터 나올 때와 들어갈 때에 반드시
             어머니 다녀오겠읍니다
             어머니 다녀왔읍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조금이라도 모친이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우
          면 잠시도 그 베개머리를 떠나지 아니 하고 시약을 하고 평시에
          도 그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였다.
            모친은 호장(戶將) 김자룡의 딸로 천성이 너그럽고 현철하며
          사리에 밝아서 시부모와 지아비를 잘 섬기고 자녀를 잘 길러서
          과연 훌륭한 현모양처이었다.  모친은 역시 어려서부터 규중에서
          자라나면서 소학  효경 등을 배워서 상당히 유식할 뿐 아니라 삼
          국지 수호지 등 책을 읽어서 옛날의 성현인 군자의 교훈과 사적
          으로 일러주는 것은 물론이요, 본래 구변이 좋아서 여러가지 예
          날(신라 고구려 중국)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었다.
            어머니의 시원하고도 그럴듯한 이야기에는 해장과 동생들이 바
          싹 반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때는 아들 해장이 혹은
          동무하고 놀던 이야기 혹은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머니 아버
          지와 동생 앞에서 이야기를 우습게도 잘해서 온 집안에 웃음판이
          터지곤 하였다.
            집안은 과연 즐겁고 행복스러운 가정이었다.  그러한데는 첫째
          는 어머니의 현숙한 심덕과 효변의 힘이요, 둘째에 김천의 효성
          과 활발한 성품의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천의 조부
          때로 부터 전해오는 전장(田莊 : 자기가 소유한 논밭)으로 의식걱
          정은 없이 지내이기 때문에 누구나 김천의 화평스러운 생활을 부
          러워 하였다.  
          
            < 2 >
            김천의 위인이 잘나고 가문조차 상당하므로 명주땅 근경에서
          딸가진 사람은 저마다 사위를 삼으려고하여 사방에서 혼담이 나
          서 신부감을 고르고 고르다가 그중 인물곱고 얌전한 촉선땅 고진
          사의 작은 딸을 택하여 혼인을 정하고 오는 봄에 길일을 정하여
          잔치를 하게하고 미리붙터 준비를 하고 있던 때라 오느새 가을도
          지나고 눈이 펄펄 내리는 즈음에 김천의 집에는 청천벽력같은 변
          이 생겼다.
            모친 김씨가 작은아들 덕린(德麟)을 데리고 평창(平昌)땅 친정
          에 다녀오는 길에 마침 서울을 지나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재물 약탈과 부녀겁탈을 함부로 하던 원나라 군사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젊은 부녀와 아이들을 잡아다가 혹은 종을 삼고 혹은
          팔아먹을려고 돌아가는 길에 많이 잡아가지고 간 일이었다.
            그러나 가는 길에도 겁탈을 하고 몹시 일을 부려먹고 하는 일
          이 있어서 그 엄혹한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면 단번에 칼로 찔러
          죽이고 가버리고 그렇지 아니하고 요행히 목숨이 살아서 가던 사
          람들도 그해 겨울은 마침 몹시 추워서 얼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
          라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김천의 집에서는 김천의 모친과 동생이 돌아오
          지 아니하므로 문득 수심에 싸여서 오늘이나 돌아올까 내일이나
          무슨 소식이 있을까 하고 기다리며 온 집안은 눈물과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 아침은 이 소문을 듣고 온 집안은 방성통
          곡하고 김천은 모친과 동생은 꼭 죽은 줄로 알고 상을 발하여 모
          친의 몽상을 입었다.
            그러자 김천은 수심과 슬픔에 싸여서 만사에 뜻이 없고 무슨
          일에나 일이 손에 붙지를 아니하여 일절 출입을 폐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그럭저럭 하루 이틀을 지냈었다.  그후 몇해를 지나서
          야 김천이 대강 잔치를 하고 아내를 맞어 들였으나 김천의 아버
          지는 병객이고 김천이 아주 호주가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심한
          흉년이 들어서 추수가 변변치 아니하고 김천이 아버지가 무슨 장
          사를 하느라고 빚을 썼다가 그 빚값에 자기 소유의 전장까지 거
          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천의 집안은 그만 살기가 매
          우 어렵게 되었다.  어린 김천이 일가의 전 책임을 지고 해보지
          못한 농사도 짓고 혹은 장사도 하여서 간신간신히 지내갔다.
          
            < 3 >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어느새 십오년이 지났다.
            어머니가 죽은지 십오년이 된 가을이었다.
            마침 가을달이 몹시 밝아서 반공에서 고요히 내려 비쳤는데 남
          무잎이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가늘고 맑은 소리로 우는
          귀뚜라미 소리- 게다가 반공에 끼릭끼릭 울고가는 기러기 소리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을 원통하게 잃어버린 김천에게는 모두가
          속절없는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고요한 달밤에 김천은 지겟문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이면서 어
          머니 생각을 한다.
             어머니께서 정말 돌아가셨을까?
             지금도 어디서 살아 계셔서 고생을 하시면서 그리고 아들을
          그리며 애를 태우시지 아니하실까?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한잠을 들었다가 동네집 개짖는 소리에 잠을 깨이니 달은 여전
          히 밝은데 혼자 앉아서 꿈꾸던 생각을 한다.
             휀일일까 이상하도다.  어머니가 정말 살으셨나
          하고 중얼거렸다.
            꿈에 대문밖에 어머니가 남루한 옷을 입고 동생의 손목을 붙잡
          고 서서 집안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서
             해장아 해장아
          하고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는 늘 김천의 자를 불러서 해장이
          라 하였다) 얼른 대문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어머니와 동생은 간
          곳이 없었다.
            김천이 꿈이 하도 이상타 해서 벌떡 일어나서 정말 대문밖으로
          나가서 이리저리 어머니를 두루 찾아 보았으나 어머니의 그림자
          나 있으랴?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서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김천의 아내가
             지난밤에 당신이 밖에 나가셨소?
             그래
             왜?
             그렇지 않아도 내 그이야기를 하려던 차이요.  꿈에 어머니를
          보고 하도 수상해서 나가 보았지
          하고 꿈 이야기를 하였다.
             당신이 하도 어머님 생각을 간절히 하시니간 꿈에 늘 보이는
          것이 아니오
             아니오 아무래도 무슨 이상한 소식이 들릴려는가 봐
             기쁜 소식이나 들리면 안쫗겠소?  그러나 이제 십오년이나 되
          도록 소식이 없는데 웬걸 살아 오시겠어요
            내외가 앉아서 이렇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또 마침 뜰안
          의 뽕나무가지에서 까치가 요란스럽게 운다.
             참말 무슨 반가운 소식이 들릴려는가 봐요.  저렇게 까치가
          야단으로 우니
          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로 겸 말하였다.
             참말 기뿐 소식이 들리면 좋겠나?
          하고 김천은 웃으나 한숨을 쉬이면서 마침 장날이라 장으로 나갔
          다.
          
            < 4 >
            이러한 일이 있는 저녁이라 김천은 장에서 볼일을 보고 마악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던 차에 길에서 오래간만에 촉선골 친구 김
          순응(金順應)을 만났다.
            순응이 김천을 만나자마자 썩 반가운듯이 손을 턱 붙잡고
             마침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내 자네를 찾아가던 길일세
          하는 말에는 무슨 중대한 힐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무슨 일이 있나?  오래간만인데 집으로 가세
            그러나 김천은 무슨 큰 일이야 있으랴 하는듯이 무심한 태도로
          이렇게 말을 한즉
             일이 있네.  일이 있어.  자네 자당(慈堂)한테서 편지가 왔다
          네
             무어?  어머님한테서 편지가 왔어?  장난의 말이지?
            그말을 못믿겠다는 듯이 김천이 이렇게 말하자 순응은 정색을
          하면서 손을 잡아 끌며
             내가 언제 자네에게 장난하던가.  덮어놓고 가세
          하고 같이 가기를 재촉하였다.  가면서 순응의 말을 들으면 이러
          하다.
            순응이 볼일이 있어서 명주땅에 왔다가 어떤 주막에서 점심참
          을 하는데 원나라에서 왔다는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라는 사람
          을 만났다.  그런데 그 습성이라는 손님이 한두마디 이야기를 하
          던 끝에 이 명주고을에 김천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김천이란 사람은 내 친구인데 왜 찾느냐고 한즉 동경(원
          나라 서울)에 있는 김천의 모친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려고
          찾는 중인데 당신이 그 김천의 친구라니 마침 잘 되었소, 하면서
          편지를 내보이며 찾아 주기를 청하더란다.
            그래서 김천은 순응과 같이가서 원나라 손님 습성을 찾아가서
          습성을 친히 만났다.
            만난즉 과연 습성은 원나라에서 왔는데 김천의 어머니를 친히
          만납보았다고 하며 편지를 내어준다.
            김천은 꿈인가 생시인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위선(우선) 습
          성에게 어머니를 대한듯 절을 하고 두손으로 편지를 받아보니 과
          연 모친의 친필이라 글씨부터 반갑기 그지없다.  그 자리에서 팔
          을 들어 춤을 추고 싶은 것을 여러 사람이 있는 길거리라 그럴
          수는 없으나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다시피 하면서 편지 겉봉을
          뜯어 보았다.
            편지 사연에 하였으되  
             해장아 너는 내가 죽은줄만 알고 슬픔으로 냈으리라마는 죽지
          않고 살아서 동경에서 삼, 사십리 가량 되는 북주(북주)라는 곳에
          장모(張某)의 집에서 노비의 몸이 되어 지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천신만고한 것도 이루다 기록할 수 없거니와 이곳에서 지
          내는 정경은 불가형언(不可形言)이다.  이곳은 네 아다시피 본국
          에서 사, 오천리도 넘는 산 설고 물 설은 되땅이라 풍토가 다르
          고 온갖 습속이 달라 거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늙은 몸이
          남의 집 종의 신섹가 되었으니 주리되 먹지 못하고 목마르되 마
          시지 못하고 병나되 치료 못하고 누워서 앓지조차 못하며 낮에는
          김매고 밤에는 방아찧고 겨울에는 빨래와 다드미로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일을 하루도 쉴새없이 일만 하기에 나는 벌써 허리가 굽
          고 눈이 어둡고 몸은 수축하여 피골이 상접하였다.  만리이역(萬
          里異域)에서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외로운 몸이니 뉘라서 이 정
          경을 알아주랴.  오직 기나긴 세월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
          래되고 달이 깊어간다는 뜻으로 세월이 흘러 오래 될수록 자꾸
          더하여짐을 이르는 말)에 꽃피는 아침이나 달밝은 밤에나 바라느
          니 고국이요, 그리느니 내 아들이라 언제나 고국을 아니 생각하
          며 어느날 어느시에나 너 생각을 아니 하였으랴.  그러나 생각하
          면 생각할수록 운산만리(雲山萬里) 아득한 고국이라 흉중에 민망
          하고 초조한 마음 금할길 바이없어 밤마다 애달픈 꿈이요, 오직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로다.  그리던 즈음에 천만다행으로 고국
          에 돌아간다는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두어자 기록하노라.  그
          동안 너희 아버지는 기력 어떠하시며 네몸은 어떠한지 궁금한 마
          음이 비할길 없다.  모(母)는 비록 고생은 되나마 아직 목숨이 붙
          어 있고, 네 동생도 살아서 역시 남의 종노릇하는중 지내가는 형
          편은 또한 말할나위없다.  쌓이고 쌓인 사정을 다 기록하자면 몇
          권 서책을 이룰지라 어찌 끝이 있으랴.  단촉(短促)한 겨를에 이
          루 다 기록할 수 없어서 오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줄만 알기를
          바라며 천애지리(天涯지리)에 매인 몸된 모(母)는 밤이나 낮이나
          바라고 바라기는 하늘이 내려다 보시고 신명이 도우셔서 생전에
          내아들 너를 한번 만나 보기가 진정 소원이로다
                                   모월 모일    동경의 모서
                                   (某月 某日    東京의 母書)
            김천이 죽은줄 알았ㅅ던 모친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의
          친필을 받아보니 모친을 친히 대한듯 반가운 중에도 모친의 편지
          에 구구절절이 슬프고 기막히는 사연을 읽으매 김천은 흐득 흐득
          느껴 울기를 시작하고 마침내 눈물이 앞을 가리고 방울방울 편지
          를 못읽고 나중에 목ㄴ놓아 울었다.  김천의 아내는 물론이요, 친
          구되는 순응과 편지를 전해준 습성이며 이 소문을 듣고 찾아 왔
          던 동네 사람까지 모두 울었다.
            반가운 편지를 전해준 귀한 손님, 김천이 비록 가난하나 습성
          을 흰쌀을 구하고 씨암탉을 잡아서 극진히 대접해 보냈다.  
          
            < 5 >
            김천이 모친의 편지를 받아보고 기쁜 중에도 기막히는 것은 전
          같으면 염려가 없으련만 지금은 가세가 몹시 빈한하여 돈이 없은
          즉 머나먼 길을 갈 수도 없으니 하물며 모친을 속량해올 방책이
          있으랴.
            모친이 살아있는 줄을 번연히 알고 절절한 편지를 받고도 속수
          무책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모친의 소원과 자기의 소원을 이
          루지 못하니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아니하랴.  그러나 뉘게 구차
          한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아니하여 부지런히 일을 하고 먹지아니하
          고 돈을 모아가지고 가려고 해보았으나 그래서는 언제 갈 기약이
          막연하다.
            그래서 김천은 문중에 가까운 친척과 여러 친구며 부친의 친구
          되는 이들을 찾아서 모친에게서 온 편지를 보이고 일장 슬픈 사
          정으로 이야기를 하면 사정도 딱하거니와 김천이 본래 호변이라
          듣는 사람마다 동정을 하여 혹은 돈으로 혹은 미곡으로 보태 준
          것을 한 일년만에 겨우 백금의 돈이 되었다.
            그만하면 되었느니라 하고 우선 송도(松都=開城) 서울로 올라
          갔다.  명주서 송도도 상당히 먼길이지만 원나라 서울 동경을 갈
          사람이 송도나가는 것을 멀다 하랴.  달음질로 빨리 가서 원나라
          의 동경에, 가는 월국장(越國狀=지금의 여권)을 청하였다.
            아직 원나라와 국제관계가 평온치 못하던 때이라 조정에서는
          불허가로 퇴각을 당하였다.  나라에서 하는 일을 어찌하랴.  김천
          은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해를 지나 다음왕 충렬왕(忠烈王)때에 김천은 다시 여행권
          수속을 할차로 서울로 올라와서 애걸하는 글을 정부에 들여 원나
          라 가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원했으나 역시 불허가다.  그러나 김
          천은 굴하지 아니하고 기어이 그 뜻을 이루어볼 작정으로 이번에
          는 집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냥 서울에 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객지에 지내는 동안에 노자가 떨어지고 식량이 떨어져
          서 오도가도 못하고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지경에 빠졌다.
            이때에 김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객사에 홀로 누워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지내다가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효연(孝緣)이라는
          중을 만났다.
            효연은 당시 궁중에 출입하는 세력있는 중이요 인정이 많은 사
          람이라 부디 부디 동경에 가서 모친을 속량해 오도록 해달라는
          김천의 애걸하는 말에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어찌하든지 가도록
          주선해 주고 싶은데 마침 자기 형이 나라일로 동경가는 일이 있
          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천더러
             내 형님이 동경가시는 일이 있으니 따라가 보시오
          하고 자기 형님에게 말하여 김천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을 얻어서
          모든 일에 지장이 없이 주선을 해 주었다.  김천은 기쁨을 이기
          지 못하여 곧 길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벌써 습성의 편에 모친의 편지를 받아 본지가 육년이
          되었던 때다.  김천이 동경을 향하여 떠나고자 하는 것을 보고
          김천을 위하는 친구들은
             이제 자친의 편지를 받아 본지가 육년이 지났다니, 그 동안에
          자친께서 그냥 살아 계신지 불행히 돌아가셨는지도 모를 것이요,
          설혹 아직 살아 계시다 치더라도 가서 만날는지 알  수 없는 터
          이니 잊제 공연히 멀고 험한 길을 가다가 중로에 혹 도둑이라도
          만나면 아까운 재물 잃어버릴 것이니 차라리 그만 두는 것이 옳
          겠소
            이렇게 굳이 말리었다.  그리고 벼슬을 시켲줄 터이니 어디로
          구실이나 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김천은
             자식된 도리로 설혹 갔다가 못만나고 오더라도 가는 것이 옳
          지, 당장 부모가 사지에 계신줄을 알고 어찌 내 몸을 아껴서 안
          갈 수가 있소?
            이렇게 만류하는 말을 물리쳤다.
          
            < 6 >
            김천은 마침내 효연의 형 충연을 따라서 동경에 갔다.  동경에
          서 유모(柳某)의 집에 주인을 정하였다.  김천은 충연의 소개로
          그곳에 가있는 고려사람으로  역어  벼슬(지금의 통역관)로 있는
          별장(別將) 공명(孔明)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둘이같이 북주(北州)
          로 노채(老寨)라는 곳을 가서 모친을 찾았더니 마침 모친이 군졸
          (軍卒) 요좌(要左)의 집에 있는 줄을 조사해 알았다.
             어디서 오신 양반들이요?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옷은 여기저기 꿰어 매어 있고
          봉두난발(蓬頭難髮)에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수족에 때가
          더덕더덕 하였다.
            김천이야 설마 그것이 자기 어머닌줄 알았으랴마는 공명이 수
          상히 여겨져 노파더러 고려말로
             우리는 고려서 온 사람이요.  당신은 웬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이때 노파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말이
             저는 본래 고려국 명주땅 호장 김자릉의 딸로 호장 김종연에
          게 출가하여 아들을 둘을 낳았는데 하나는 김천인데 자를 해장이
          라고 부르고 하나는 덕린인데 나하고 같이 와서 나이 스무살이라
          오.  그 애는 지금 서변땅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노
          릇을 하며 삽니다.  오늘날 여기서 본국 양반들을 만날줄은 참말
          뜻밖이요
            이 말을 채마치기 전에 김천은
             어머니 이게 웬일이요, 제가 해장이올시다  
            노파의 발밑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모친은 두손으로 김천의 손을 붙잡고
             네가 참말로 내 아들이냐?
            두 사람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느껴 울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주인 장모가 없기 때문에 모친을 속량할 일을
          교섭할 형편이 못되어 김천은 잠시 작별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며칠후에 김천은 다시 공명을 졸라서 모친이 있는 주인집을 찾
          아갔다.
            주인을 만나서 모친을 속량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주인은 사
          정 없이 거절을 하였다.  김천은 준비하였던 돈 백량을 속량금으
          로 바쳤으나 주인은 백량돈을 집어서 뜰에 내던지면서
             뿌우야 뿌우야(일이 없다)
          를 연발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같이갔던 공명이 아무리
          여러말로 간청하여 보았으나 무가내로 듣지 아니 하였다.  그래
          서 할 수 없이 김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집으로 돌아오고 말
          았다.  장모가 모친의 속량을 거절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다른 까닭이 아니라 돈에 욕심을 내어서 그런것이니 돈만 더
          있으면 곧 모친을 구할 수 있을터인데 만리 타향의 외로운 손이
          어디서 돈을 구하랴-  이러한 그 기막히고 슬픈 사정을 뉘라서
          알아주랴.
            서변 천로의 집에 있는 아우 덕린도 찾아가서 반가이 만나는
          보았으나 역시 속량할 도리가 없어서 역시 다만 애달픈 작별을
          하고 있다.  모친이나 아우나 차라리 보지아니 하였으면 나을걸
          머나먼 길에 허덕허덕 애를 쓰고 찾아와서 만나보고 속량해 내지
          못하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천은 할 수 없이 주인집에 들어 앉아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
          물과 한숨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김천이 자리에 누워서 더운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곰곰히 생
          각하다가 하루는 단연히 기운을 차려 일어났다.  일어나서 지필
          을 준비하여 있는 재주와 심혈을 부어서 장문으로 진정서를 지었
          다.  스스로 읽어 보아도 상당히 명문이었다.  진정서를 동경 총
          관부(總管府 : 지금의 경찰국)에 들이고 그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김천이 동경에 온지도 어느새 석달이
          되었다.  김천이 본래 재주있고 구변이 좋은 까닭에 원나라말(곧
          동경말 = 지금의 북경말)을 대강은 수작을 하게 되었다.
            김천이 수심중에 잠을 들었다가 깨인즉 베개 머리에 편지 한장
          이 놓여 있었다.  김천이 얼른 편지를 뜯어 보매 그 편지 속에는
          돈 백금짜리 어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편지의 사연은 간단하
          였다.
             이 적은 돈을 당신의 효심을 다하시는 일에 써주시기를 바라
          옵니다
            겉봉에도 이름이 없고 속에도 이름이 없으니 누가 보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글씨는 썩 눈에 익은 글씨였
          다.  보고 다시 보고 하다가 김천은 마침내 이것이 주인의 딸 춘
          혜(春惠)의 글씨인 것을 발견하였다.
            김천의 유하는(머무르는) 주인 마부인은 동경장자 유모의 첩으
          로 심심소일거리고 여관을 경영하였는데 그 집에는 춘혜라는 딸
          이 있었는데 그는 유장자의 과부딸로서 모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었다.  들며 나는 동안에 김천의 눈에도 유심히 보였거니와 춘혜
          의 눈에는 김천의 남자답고 비범한 용모와 풍채가 깊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김천은 춘혜의 가슴에는 잠시도 사라지지 않
          는 그림자를 품고  있게 되었다.  
            처음에도 서로 멀리서 바라보고 웃음으로 바꾸고지내는 사이었
          으나 차차 날이 지나는 동안에 서로 수작말을 건느게 되고 서간
          (書簡)이 내왕하게 되고 조용한 틈을 타서 만나서 정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춘혜라 김천의 정지를 알아주고 백량짜리 어음을 돌려
          보낸 것이었다.  장자의 딸이라 그만한 돈은 마음대로 돌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또 마침 총관부에서 김천을 부르는 기별이 나왔다.  김
          천은 곧 총관부에 들어가서 관원이 묻는대로 눈물을 흘려가면서
          말하니 장모에게 내시를 하기로하고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리
          고 김천의 진정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노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고
          노자까지 약간 보태주고 역로관원에게 보호해 주라는 증명서까지
          주었다.
            김천은 곧 모친을 찾아가서 사연을 말하고 주인 장모를 만나서
          은한봉과 총관부  소개장을 들여 놓았더니 과연 주인은 이번에는
          얼른 허락을 하였다.
            은은 장모를 주고 돈은 노자로 쓰기로 하였다.  그길로 김천의
          모자는 서로 손을 잡고 동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마부인의 집을
          찾으니 마부인은 김천의 유숙을 거절하였다.
            춘혜의 부친 유장자가 자기 딸이 고려인 김천을 은근히 하고
          돈까지 주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자기 딸은 큰집으로 데
          려가고 김천을 마부인의 집에 유하는 것까지 금하게 한 것이다.
            김천은 춘혜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 마음
          도 앓는 부친을 위하여 모친을 위하여 억제하고 모친을 모시고
          어서 귀국하기로 하였다.
            김천은 모친을 모시고 아우 덕린이 있는 천로의 집을 찾아갔
          다.  작별하기 위하여 간 것이다.  천행으로 모친은 속량하였으나
          아우까지는 속량할 도리가 없고 돌아갈 노자도 부족한지라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형은 동생을 버리고 가는 심정은
          어떠하며 혼자 떨어지는 덕린의 심사는 어떠하랴.  세 사람은 서
          로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다.  그 중에도 김천의 모친은 덕
          린의 목을 끌어안고 땅바닥에 뒹굴기를 마지아니 하였다.
            그러나 덕린이 먼저 눈물을 거두고
             나는 대장부라 아무데 가서나 못살겠소.  어서 염려말고 늙으
          신 어머님이나 모시고 돌아가셔요.  아버님께서도 병중에 기다리
          실 터이니 하루 바삐 돌아가셔요
          하는 말에 어머니와 형은 더욱 슬프게 울었으나 울어야 끝이 없
          는줄 깨달은 김천은 모친을 강권하여 억지로 이끌고 동경으로 해
          서 두달만에 귀국하였다.  마침 본국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절도
          사 일행을 따라서 무사히 오게 되었다.
            부친 종연이 그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진부(珍富)라는
          역에까지 나와서 이십이년만에 젊어서 헤어졌다가 이제는 피차에
          노인이 되어 만나니 서로 눈물만 좍좍 흘리고 말을 못하는 그 정
          경을 보는 사람으로 울지 아니하는이 없었다.
          
            < 7 >
            김천의 모친은 돌아온 다음에는 멀리 외국에서 종노릇을 하는
          덕린을 잊을 날이 없어서 늘  눈물로  지내어 김천도 아우의 생
          각도 아니하는 바는 아니지만 춘혜의 정을 잊지 못하여 천리 만
          리 먼곳을 밤이나 낮이나 그리는 정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런지 다시 육년만에 명주 땅에는 몽고 옷입은 청년하고 예쁜
          색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두사람은 김천의 집을 찾아갔다.  청
          년은 김천의 아우 덕린이요, 젊은 부인은 천리원정(千里遠情)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찾아온 유춘혜이었다.  김천의 부모는 물론
          이요, 부인까지 춘혜를 대접을 잘하여 형제처럼 지냈다.
            김천은 후에 나라에 교섭하는 구실을 맡게 되고 동경에 내왕하
          는 사신의 중직을 봉행함에 춘혜의 내조가 많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