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 모습은 세계 스포츠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이다. 42 킬로미터를 거침없이 내달려온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을 들어오면서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승리에 대한 어떤 표시도 없이, 의연하게 돌진해 들어온다. 한 점 웃음기조차 없는 무표정한 얼굴의 우승자,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손기정 선수의 승리의 모습이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트랙의 마지막 바퀴를 도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에서는 조국을 빼앗긴 식민지 청년의 비애가 뚝뚝 묻어 떨어진다. 남승룡은 손기정의 금메달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와 3위를 한 남승룡 선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어진 묘목으로 자연스럽게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는 묘목을 받지 못했고,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없었기에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 묘목이 바로 서울 특별시 기념물 제5호로 중구 만리동 2가에 있습니다. 윗 사진은 바로 그 묘목이 자란 손기정 월계관수입니다. 손기정 때문에 세번 울었다는 백범 김구 선생님 “손기정 때문에 세 번 울었다. 한번은 올림픽 우승 소식에 감격해 울고, 또 한 번은 손기정이 일제에 의해 필리핀 전선에 끌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쌍해서 울고, 그리고 귀국해 건강한 손기정을 만나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반가워서 울었다.” 인터넷에 오른 어느 독일인의 글 - 스테판 뮐러씨로 밝혀 졌습니다. - 당신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지도를 펴기 바란다. 이야기는 이 조그만 나라의 어느 마라토너가 중심에 있다. 놀랍게도 2000년간 한번도 자주성을 잃어본 적이 없는 기적에 가까운 나라이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장의 사진때문에 나는 이 나라, 1936년 히틀러 통치 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윗 사진은 동아일보를 폐간하게 한 유명한 사진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진.... 당시 대부분의 불행한 식민지의 청년들은 깊은 고뇌와 번민에 그리고 달렸을 것이다. 달리는 내내 이 두 청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승리했고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조국 한국의 태극기 스탠드에 역시 이 핏빛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하의 과연 높은 정신적인 종교 유교의 민족답지 않은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1988년 수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이른다. 그리고 개막식, 노인이 되어버린 이 슬픈 마라토너는 어느 연출가가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극적이게도 한국인들의 종교 유교는 나는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기를 바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4년 후 경기장에 태극기가 올라가자 비극의 마라토너 '손' 에게 자신의 금메달을 선사하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그럼으로써 역사상 어느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도서관에 달려가라,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것이다. 2005년 10월28일 개관한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된 손기정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이 글을 쓰신 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도 깨 비 -
“내가 당신들을 위해서 승리의 노래 응원가를 불러주갔습네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악보를 꺼내더니 혼자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사내가 바로 안익태 선생이었고 그것이 애국가가 불리워진 최초의 기록이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안익태 선생은 객석에 앉아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운동장 한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식민지 청년 일곱 명 앞에서 한 사내가 구겨진 악보를 펴 들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을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목젖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참기가 어렵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황영조가 경기장에 들어오면서 화려하게 손 키스를 하는 동작을 관중들에게 보여 준 일을 두고, 손기정 할아버지는 꾸짖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마라톤 선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봉근 씨의 안방에 들어선 나는 난생 처음 태극기를 보았다. 선명한 색깔로 나뉜 음과 양, 그리고 태극을 감싼 괘. 저것이 태극기로구나. 저것이 우리 깃발이로구나. 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환영이었으나 분위기는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포 한 사람은 손기정 선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나는 손 군이 단순한 운동선수라고만 생각지는 않네. 오늘 일본인들의 축하 파티가 있음에도 이렇게 피를 나눈 동포들의 모임에 나와 주었으니, 이야말로 애국지사가 아닌가?”
안봉근 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손 선수나 남 선수가 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승리를 축하하는 즐거운 저녁식사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비장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배양하는 데에 애국가를 철저히 이용했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도 일어나 애국가를 들어야 했고, 길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면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어야 했던, 희극 같은 시절을 경험한 우리 세대는 애국가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민중가요가 단 한 곡도 없던 시절에 우리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박정희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길거리로 나갔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명동성당 농성을 지킨 사람들과 명동 부근 길거리를 메웠던 ‘넥타이 부대’를 하나로 이어준 것도 애국가였다.
앞으로는 애국가를 들을 때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얼굴 대신 베를린올림픽 대회장에서 7명의 조선인 선수들 앞에서 혼자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안익태 선생의 얼굴을 생각하기로 했다.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손기정 선수가 정말 부러웠었다고 합니다.
(서프 史랑 님의 글 중 일부..)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고
그곳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보일 것이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무력에 의존하는 나라 사이에서
그리고 이럴 경우 이 한국인들은 나라 대신에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한다.
아니 이 민족의 굉장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때 두 일본인이 1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독일인이었다.
헌데 시상대에 올라간 이 두 일본인 승리자들의 표정...
이것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이 두 승리자들을 이런 슬픈 모습으로 시상대에 서게 했는가...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가장 인간적인 유교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은
이웃한 일본인(죽음을 찬미하고 성에 탐닉하는)에 대해 '영리한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히도 이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하는 자부심 강한 민족이
이 원숭이들에게 '강간'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침략,
즉,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개인의 이상을 희생하고 말았고,
'손' 과 '남' 이라고 하는 두 청년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두 청년들은 달림으로써 아마도 자신들의 울분을 표출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두 청년들은 많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대부분의 나라의 국기는 혁명이라든가 투쟁이라든가 승리 또는 위대한 황제의 문양인데 비해 태극기라는 이 국기는 우주와 인간과 세상 모든 것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한다.)
대신에 핏빛 동그라미의 일장기가 있었고,
이때 이 두 청년의 표정이란....
그들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신문 eastasia(동아일보를 지칭하는 듯)는
이 사진 속의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만다.
이 유니크한 저항의 방법,,,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만다.
이 우습고도 단순하면서 무지하기까지 한 탄압의 방법이란...
마침내 이 민족은 해방되고 강요당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서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른 후,
한강의 기적 (한국인들은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이다)
을 통해 스페인보다도 포르투갈보다도 더 강력한 경제적 부를 이루고 만다.
불과 50년...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만 것이다.
성화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작고 여린 소녀 마라토너로 부터 성화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날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러웠던 승리자,
"손" (손기정)이었다.
성화를 손에 든 채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와 같이 훨훨 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가!!
역사란 이처럼 멋지고도 통쾌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나 보다.
이 때 한국인 모두가 이 노인에게,
아니 어쩌면 한국인 개개인이 서로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올림픽 도중에 일본 선수단은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소식....
인간, 심지어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예를 나타내는 종교이다.
이 종교의 보이지 않는 신이
인류 역사상 (예수나 석가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굉장한 이야기가 이대로 보존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념과 끈기, 그리고 폭력과 같은 단순함이 아닌)
놀라운 정신력으로 그들이 50년 전 잃어버렸던 금메달을 되찾고 만 것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이라고 하는 '손'
노인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의 젊은 마라토너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과 독일의 선수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축제의 월계관을 따내고 만 것이다.
이 '황' 은 기쁨의 눈물과 함께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탠드로 달려가
깊은 예의로서 존경을 표한다...
'황' 을 가슴에 포옹한 '손' 은 말이 없다.
인간에 대한 신뢰에 한없이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인간이란,
이 한국인 아니 이 한국 민족처럼
폭력과 거짓과 다툼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서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극적인 눈물로 시작된 역사일지라도
환희와 고귀한 기쁨의 눈물로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이 한국인 아니 한국 민족이 보여주지 않는가.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선 두 한국인의 사진을 찾아라...
당신은 그 순간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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