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기힘든 사진들

청학동 사람들

고양도깨비 2007. 1. 12. 22:51
댕기머리 청년, 갓을 쓴 백발노인…현대문명 속에서 전통을 고수하는 청학동 사람들의 모습을 25년간 사진으로 기록해온 류은규의 ‘청학동 이야기’전이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린다.


지게에 물통을 진 소년들이 잠시 다리쉼을 하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1960년대 초부터 경상도 하동 인근 지리산 자락에서 마을공동체를 일궈온 청학동 사람들. 이들은 흰 한복을 입고, 총각 시절에는 댕기머리를 유지하며, 결혼 후에는 갓을 썼다. 남자들은 서당에서만 공부했기에 군대를 가지 않았다. 그들만의 신앙인 ‘유불선합일갱정유도’를 엄격히 믿으며 문명을 거부하고 자급자족해온 청학동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신비의 마을’일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사진 찍는 걸 꺼려했던 부인들도 아들의 친구라는 생각에 선뜻 사진 모델이 되어준다.



보통교육 대신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던 청학동 소년들. 청학동을 찾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구가 현판 옆에 붙어있다.

1982년 당시 학생이었던 류은규 역시, 처음에는 사진학도의 호기심으로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 호남선 완행열차와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타고, 종점에 내려서도 산길을 3~4km 걸어 올라가야 청학동에 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청학동은 분명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공간이었다.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고, 민박 같은 곳도 없었지만 어느 집에 묵어도 돈을 받거나 하지 않았다. 


댕기머리가 귀여운 소년들. 딱히 놀이터가 없어도 산과 바위를 놀이기구 삼아 뛰어놀곤 했다.

한쪽 어깨엔 카메라 가방 메고, 다른 한 손엔 숙박비 대신 사온 쌀 다섯 말을 들고 산길을 오르며 청학동을 찾은 것이 1년에 서너 차례. 그렇게 청학동을 드나들며 사람들과 마음을 트고, 한 해 두 해 찍어온 사진이 어느덧 올해로 25년째다.

 


청학동에도 라면은 들어온다. 한때 유행했던 '해피 소고기'라면 상자가 눈에 띈다.

 

 1990년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 청학동 사진 30여 점을 전시한 적은 있지만, 청학동을 주제로 90여 점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한 대형 전시로는 이번 ‘청학동 이야기’전이 처음이다.

청년이었던 사진 속 주인공의 얼굴은 어느덧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으로 청학동에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삶에 매료되어 마을의 동년배들과 친구가 되고, 졸업한 뒤에도 직장생활을 하며 힘들고 답답할 때 청학동을 찾았다. 그에게 청학동은 ‘친구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이었던 셈이다.

 
결혼식날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풍습을 보여준다. 신랑의 당혹스런 표정과 친구들의 짖궂은 표정이 웃음을 자아낸다. 


청학동 사람들과 친구가 된 이후에는 그가 일부러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아도, 친구들이 “오늘은 사진 좀 찍지?” 하며 오히려 권하는 때도 있었다고. 사진 찍기를 꺼렸던 노인들이나 부인들도, 나중에는 ‘아들 친구’라는 생각에 마음을 열고 모델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가족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그에게 연락해 결혼식이나 장례식 사진을 찍을 수 있게끔 했다.


종교의식의 일부로 게양된 태극기를 보며 감탄하는 노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소년의 모습이 지극히 편안해 보인다. 무방비 상태의 모습을 저렇듯 내보일 수 있다는 건, 사진가와 쌓은 친밀함의 정도를 보여준다.

 

그렇게 류은규의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은 청학동 역사의 산 증거가 됐다. 청학동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인 1982년 찍은 사진에서 여덟 살짜리 꼬마였던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결혼을 해서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2006년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찍은 사진들은, 그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눈 시간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이다. 


1982년, 1990년, 1995년, 1998년, 2006년 다섯 차례에 걸쳐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찍었다. 


장례식날, 왼쪽에 '민주정의당 노태우'라고 적힌 화환이 눈길을 끈다.

 

그렇게 류은규가 소리 없이 믿음을, 세월을 쌓아가는 동안 청학동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 후반 모 야쿠르트 회사의 광고에 청학동이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청학동 역시 점차 현대화의 길을 걸었다. 구식 문물 취급을 받던 서당 교육이 인성교육, 한자교육 열풍에 휘말려 각광받는 한편, 도회지로 나가 사는 사람들도 생겼다. 심지어 롯데월드에서 사주관상을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평상시엔 편한 일상복을 입고 지내는 소녀와, 흰 한복을 입고 손님을 단정히 마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가끔 현대화된 청학동을 보고 “순수성이 사라졌다”고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류은규는 마음이 답답하다. 시대가 변하는데 청학동 사람들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불편함을 고수하며 살아야겠냐는 것이다. 청학동에 자동차, 세탁기, 냉장고조차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호기심에 잠시 이곳을 찾는 외부인들의 이기심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설명했다. 무엇보다 물질문명의 변화를 정신문명의 변화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위 사진의 소년과 아래 청년은 같은 사람이다. 청학동에서 작가가 보낸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다. 바로 청학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청학동이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변하지 않는 청학동은 마을 사람들이 믿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처럼 정신적인 힘 속에도 있고, 그들의 모습을 쭉 기록해온 류은규의 마음속에도 있다. 류은규는 그래서 자신의 작업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가 한 시대를 매듭짓는 회고전이 아니라, 중간 결산 과정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이 사진 역시 동일 인물을  세월이 흐른 후에 찍은 것이다.

 

중국 남경시각예술대학 사진대 학장이기도 한 류은규는 요즘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 머물고 있다. 중국에서는 청학동 사진 외에, 조선족 항일운동가 후손을 비롯한 조선족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 기록하고 관련 자료를 모으며 연작발표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