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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에 대하여

고양도깨비 2006. 12. 16. 02:48

+ 어둡고 낮은 곳에   희망의 등불을........

 

 

 

 

金  笠 - 김병연 (金炳淵)

1807(순조 7) 경기 양주~ 1863(철종 14) 전라 동복(同福)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 김삿갓

    그의 일생은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평안도농민전쟁 때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했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는〈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그 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해 처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자신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방랑했으며, 그의 아들이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다고 한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현의 어느 땅(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살았고, 그 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몰락양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당시 무너져가는 신분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풍자와 해학을 담은 한시의 희작(戱作)과 한시의 형식에 우리말의 음과 뜻을 교묘히 구사한 언문풍월이 특징이다. 구전되어오던 그의 시를 모은 〈김립시집〉이 있다.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강원도 영월에도 전국 시가비 동호회에서 시비를 세웠다.

 

 


       ~~ 無  題 ~~

                                   묽은 죽 한 그릇을 얻어먹으며 지은 시


       四脚松盤   粥一器 

                네 다리 소나무 소반에 주는 죽 한 그릇에

       天光雲影   共徘徊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배회 하도다


       主人莫道   無顔色 

                그러나 주인이여  안색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吾愛靑山   倒水來 

                나는 청산이 물에 거꾸러져 비치는 것을 사랑하노라

 

 

 

 

        ~   乞人死   ~

                                 걸인의 죽음을 보고 지은 시


       不知汝姓   不識名

                너의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何處靑山   子故鄕   

                어느 곳 푸른 청산이  자네의 고향이냐

       一尺短笻   身後物

                한 자되는 짧은 지팡이는  몸뒤에 물건이요

       數升殘米   乞時糧 

                두어 되 남은 쌀은  빌어서 먹을 때 양식이라

       蠅侵腐肉   喧朝日

                파리는 썩은 고기에 앉아  아침 날에 윙윙거리고

       烏喚孤魂   弔夕陽

                까마귀는 외로운 혼을 불러  저녁 날에 조상하더라

       寄語前村   諸子輩 

                앞마을 모든 사람에게 부쳐 말하노니

       携來一簣   掩風霜

                한소코리 흙을 끌어와 바람과 서리를 막아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