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세상

어느 청원경찰의 화려한 퇴임

고양도깨비 2006. 12. 14. 23:20

2006년 11월 15일 (수) 03:12   조선일보

어느 청원경찰의 화려한 퇴직

 

[조선일보 유태종기자]

“내 손으로 모신 군수만 열 아홉 분입니다. 그동안 수백명의 선배들을 떠나 보냈는데 이젠 내가 정든 군청을 떠날 차례가 됐네요.”

충북도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청 고용원과 청원경찰로 근무해온 ‘영원한 수문장’ 이응섭(李應燮·59)씨가 14일 퇴임식을 갖고 47년간 정들었던 옥천군청을 떠났다.

이씨는 이날 지역 기관·단체장과 후배 공직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퇴임식에서 그동안의 공직생활을 회고하는 간단한 퇴임사를 읽은 후 군수 전용차를 타고 군청과 고별했다. 군청 공무원들은 이씨에게 공로패와 행운의 열쇠를 전달했고, 청사 광장에 도열해 정든 직장을 떠나는 이씨를 정중하게 배웅했다.

이씨가 옥천군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만 열세 살 되던 1960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행정계장을 맡고 있던 친구 아버지의 소개로 군청에 들어왔다. 까까머리 꼬맹이 시절 사진이 붙은 그의 인사기록카드에 적힌 최초 직무는 문서 전달이나 잔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하는 ‘청부(廳夫)’. 이어 1985년 청원경찰로 정식 임명받아 정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됐다.

오랜 세월 근무하다 보니 여러 정권과 격랑의 세월을 거치면서 에피소드도 많을 수 밖에 없었다. 3공 시절 군청에 불쑥 들어서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신분 확인을 요구했다가 뺨을 얻어맞았고, 시위대가 던진 분뇨를 뒤집어 쓰기도 했다. 한 성질 급한 군수로부터는 미리 나와 거수경례를 붙이지 않았다고 호통을 들어야 했다. 행정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로부터 험한 욕설을 듣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초라하고 구석진 수위실에서 근무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친근한 ‘동네 아저씨’였다. 워낙 꼼꼼하고 성실한 탓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정문을 지켰고, 공무원은 물론 주민들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한용택 군수와 군청 직원들이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퇴임식을 준비한 것은 이씨의 이러한 공적 때문이다.

군청 관계자는 “이씨는 묵묵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공직사회의 모범을 보여줬다”며 “후배 공무원들에게 귀감을 보여주고 퇴직한 그를 후배들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태종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yo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