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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 광릉(光陵)

고양도깨비 2010. 9. 1. 09:07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 광릉(光陵)

 

광릉 - 세조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 사 적 : 제 197 호

 

 - 光陵의 특징


: 세조(이유 : 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王妃)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지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주위의 수목원을 떠올리면 되겠지요.

광릉 - 정희왕후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세조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石室)과 석곽(石槨)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灰隔: 관(棺)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石灰)로 다짐)으로 석실, 석곽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하다가 성종(成宗)이 먼저 건립한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 인해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됩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 명으로 중건된 세조의 명복을 빌었던 광릉의 원찰(願刹)입니다.

 

- 世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55

1년

11월, 춘추관 문종실록 13권 완성

1462

8년

5월, 신숙주 영의정이 됨

1456

2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6신{死六臣}이 상왕{단종} 복위 도모로 사형

1465

11년

4월, 한성에 원각사(圓覺寺) 창건

1467

13년

5월, 길주인(吉州人) 이시애(李施愛) 반란 8월에 진압

1457

3년

6월, 상왕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

9월, 왕세자(덕종) 죽음{1438- }

1468

14년

9월, 세조 승하{1417- }

10월, 노산군(魯山君) 승하{1441- }

 

 

 

 

- 뒷 이야기


: 세종의 차남으로 태어난 세조는 세종 27년(1445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됩니다. 세조는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1452년 단종(端宗) 즉위 후 단종을 보호했던 안평대군 이하 수십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455년[단종 3년]에 단종에게서 왕위(王位)을 받아 왕권(王權)을 쥐었고 52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하지만 재위 시절에는 평소 좋아하던 무술로 인해 조선군의 무력을 크게 강화해 두 차례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안으로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한 치적도 남겼습니다.

 정희왕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덕종(德宗), 예종(睿宗)의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장남 덕종이 요절(夭折)하고 차남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만에 승하하자 당일 덕종의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 : 成宗)을 즉위케 했습니다. 성종 역시 13세의 나이에 즉위했기에 정희왕후가 7년간 섭정(攝政)을 할 정도로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두 차례의 섭정 등에서 보듯이 성종 14년(1483년)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궁궐에 넘칠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