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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묘지,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고양도깨비 2007. 9. 7. 03:24

                                                                                                                                 2007년 9월 6일 (목) 06:00   연합뉴스

<무령왕 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日학자 "墓地구입 돈꾸러미 끼운 곳"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여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돼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다.

그것은 왕릉 안에서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묘지(墓誌.방형 판석)가 각각 1장, 그리고 죽은 무령왕이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여러 신(神)에게서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인 매지권(買地卷)이 왕비 묘지의 뒷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무덤방(玄室)으로 통하는 무덤길에서 동서쪽으로 나란히 놓인 채 발견된 두 묘지에는 모두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나아가 무령왕 묘지 뒷면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칭만 제외한 '십이간지(十二干支) 방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투르판 지역 고문서를 주로 연구하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 이후 30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의 미스터리인 묘지의 구멍과 십이간지 방위표에 얽힌 비밀을 마침내 풀어냈다.

시라스 교수는 미술사학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의 정년퇴임 논총에 투고한 논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ㆍ왕비 합장묘의 묘권(墓券.매지권)ㆍ묘지석(墓誌石)에 관한 한 제언'에서 묘지(석)의 구멍은 무령왕이 지하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시라스 교수는 무령왕 묘지 뒷면에 새긴 '십이간지 방위표'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하는 亥ㆍ壬ㆍ子ㆍ癸ㆍ丑, 동쪽에 해당하는 寅ㆍ甲ㆍ卯ㆍ乙ㆍ辰, 그리고 남쪽을 지칭하는 巳ㆍ丙ㆍ午ㆍ丁ㆍ未를 표시하고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들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을 뺀 것은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무령왕릉 출토된 그의 묘지와 매지권에 의하면 523년 62세로 사망한 무령왕은 525년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으며, 토왕(土王)과 토백(土伯)을 비롯한 각종 지하세계 신들에게 '돈 1만문'(錢一萬文)을 주고 신지(神地), 즉 서쪽 땅을 매입했다.

시라스 교수에 의하면,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유독 서쪽 방위만 표시하지 않은 것은 매지권에서 밝힌 대로 무령왕이 바로 서쪽 땅을 사서 매입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령왕 묘지는 무덤길 오른쪽(동쪽), 그 왕비 묘지는 왼쪽(서쪽)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고대 동전 90여 개가 꾸러미 상태로 발견됐다. 왕과 왕비 묘지는 무덤방 바깥이 아니라 무덤방 안쪽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놓아 두었다.

시라스 교수는 이런 배치는 525년에 무령왕이 먼저 매장되고 나서, 나중에 죽은 그 왕비를 529년에 합장(合葬)할 때 일어난 현상이라면서 "따라서 당연히 무령왕이 처음 묻혔을 때는 그 왕비 묘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령왕만 묻었을 때는 '십이간지 방위표'를 뒷면에 새긴 무령왕 묘지 판석과 매지권을 새긴 다른 판석(나중에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새김)은 1971년 발견 상태와 같이 왼쪽-오른쪽에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포개 놓았었다"면서 "묘지나 매지권 등의 각종 문서 내용이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묘지가 위, 매지권이 아래에 놓였음이 분명하며, 두 판석 중앙에 난 구멍은 무령왕릉 발견 당시에 발견된 오수전 꾸러미를 꿴 끈을 끼운 공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참조)

이런 주장을 접한 고고학자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아무도 풀 수 없던 난제를 시라스 교수가 단칼에 풀었다"고 평가했으며, 돈황학 전공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은 "시라스 교수가 기존 한ㆍ일 고대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투르판지역 고문헌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쌓은 학자이기에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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