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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

고양도깨비 2007. 8. 8. 09:28

일제의 만행이 담긴 사진첩 입니다.



일제, 조선의 꽃을 짓밟다


▲ 상담하는 정신대 일본 정부는 전쟁이 확산되고 피해가 속출하자 여성정신대까지 동원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중학교를 보내주겠다”며 11~14세의 어린 여성을 미혹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않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나뉘었는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정신대 여성들에게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공개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했으며 신문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혜경 연구원(강제연행전공)은 “정신대를 지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신대 위안소


▲ 정신대 위안소 정신대 위안소는 일본군이 운영했다. 임시 건물은 이동식으로 조립돼, 좌우10칸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방은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일제는 한 사람의 여성에게 콘돔을 두 개 이상 지급하지 않았다. 위안부여성들은 사용한 콘돔을 세척해 다시 써야만 했다.(1935)

창씨개명 독려


▲ 창씨개명 독려 한국인의 성명에 관한 특명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역에서 창씨개명을 한 노인들에게 무료로 열차여행을 시켜주는 모습. 천막을 치고 창씨개명을 확인하는 일본관리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편지발송, 소송, 학교입학, 식량배급 등 생활전반에 걸쳐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

일본식 한국문화 교육


▲ 일본식 한국문화 교육 일본어로 한국 부채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며 교육을 통해 일종의 ‘의식화’를 꾀했다. 일제는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SP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1937)

상복 입은 고종황제


▲ 상복 입은 고종황제 흥선대원군 별세 때 상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운현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79세로 별세했다. 대원군은 임종 때 장남 재면을 통해 주상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고종은 아버지와의 상면을 거절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묵인했다고 여긴 고종은 대원군 빈소에 참배하지 않았다.(1898)

한일조약체결


한일조약을 맺고 찍은 기념사진 (1904)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


▲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순종황제는 이등박문을 대동하고 경성을 출발, 대구·부산·마산 등을 순시했다. 도로 주변에 서있는 시민들과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순종의 서도 순시를 촬영한 사진은 공개된 바 있지만 남도 순시는 이 사진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09. 1. 7)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일본인들은 이곳에 머물며 신발, 양복 등을 거래했다. 서양문물인 카페, 주점 등은 한국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인천 월미도


20세기 초반의 인천항 모습. 뒤편에 있는 섬이 월미도다. (1907)

백두산 천지에서 제를 지내는 일본인


◀ 백두산 천지에서 제를 지내는 일본인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쇠말뚝을 박고, 그 앞에 마련한 제단에서 무속인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천황(텐노)의 시조신이자 일본인의 조상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1943)*'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일본무속인들이 숭배 하는 신이다,

일장기 들고 만세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 앞에서 일장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일본군인(1943)

백두산 정상에서 합장하는 일본인들


일장기를 든 일본인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전쟁승리를 기원하며 합장을 하고 있다.(1943)이시기가 대동아 전쟁때라 한다 여기 사진속에는 일부 한국인도 ..., 있다고 하던데...,

융희학교 1회 졸업생


융희학교 1회 졸업생 1909년 유길준과 오세창이 설립한 융희학교의 1회 졸업기념사진. 유길준은 ‘우수한 교사를 통해 우수한 교육을 보급함으로써 문맹을 퇴치’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울릉도 강제 점거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군사적 목적으로 울릉도를 강탈,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도동항 앞에 일본 상선이 대기하고 있다.(1905)

용산 일본군 기지 공사


일제는 용산에 일본 거류지를 조성하고 2개 사령부를 주둔시켰다. 1916년에 제 19, 20사단을 두고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사용하게 된다.

전승기원 만세삼창


백두산에서 노래를 부른 뒤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1943)

일본도로 목을 치는 잔혹한 모습(순간 포착)


일본 군인이 처형 대상자의 목을 일본도로 자르고 있다. 처형된 사람은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있다. 독립군들은 신분위장을위해 중국인 복장을 입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복장으로만 보면 중국인의 구별이 쉽지 않다. 국민대 국사학과의 장석흥(한·일 근대사) 교수는 “사진의 각도가 다른것으로 봐, 3명 이상이 동시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고문을 했다면 모자가 벗겨졌어야 했을 것”이라며 “피해자가 독립군이라고 무조건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덕수궁 화재


1904년 4월 14일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 중화전(中和殿) 등의 건물이 불에 탔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화재현장을 조사하고 있는 일본인들. 사진 뒷편에 어렴풋이 인왕산이 보인다.(1904)

강화도 해안


일본은 상륙에 유리한 강화도 해안을 통해 한반도 진입을 꾀했다. 왼쪽에 진해루가 보인다.(1900년대 초반)

731부대 해부실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폭파시킨 해부실 내부의 잔해. 일본군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실험 대상자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군산역 개통식


군산역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아치형 기념탑(왼쪽)이 보인다 역 뒤편 야산에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토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1911. 3)

고종황제의 서거 직전 모습


1919년 1월 22일 갑자기 서거한 고종의 장례식은 3월 3일 애도속에서 거행됐다.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전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황제의 모습(1919)

고종의 마지막 행차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1919)

거문도 제철소


조선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인 거문도 제철소의 모습. 쇠붙이를 녹여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만들었고 칼·창 등의 병장기도 제작했다.(1885)

731부대 전경


불에 탄 731부대의 모습. 세균 전쟁을 위해 생체실험에 희생된 사람 수는 3000여명으로, 한국·중국·러시아인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948)

731부대 생체실험


일본 의사가 생체실험을 하기위해 손을 묶은 채 배를 갈라 내장을 만지고 있다. 마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실험 대상자의 눈알이 튀어나와 있다.(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