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딸들
왕과 왕의 아들들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왕의 딸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마침 좋은 자료가 있기에 여기에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왕의 딸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공주(公主)와 옹주(翁主)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호칭은 조선 초만 해도 제도가 미비하여 공주(公主), 왕녀(王女),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 여러 가지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또한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하였답니다.
그 뒤 성종 때에 문물제도가 정리되면서 그 명칭도 통일되었는데 『경국대전』「외명부」조(條)에 의하면, 왕의 정실부인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하였습니다.
공주는 존귀한 신분으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혼인도 국법에 따라 치렀고, 남편은 종1품 위(尉)인 광덕대부(廣德大夫),숭덕대부(崇德大夫)로 의빈(儀賓:駙馬都尉)에 정해져, 그에 따라 녹봉을 받았고 내명부·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왕비의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으며, 죽으면 예장도감(禮葬都監) 등을 설치하여 상을 치렀습니다.
옹주는 조선시대 왕의 후궁이 낳은 딸로, 공주와 마찬가지로 품계를 초월하여 외명부에 속하였고, 또 고려시대 내명부나 외명부에게 정1품의 품계와 함께 주던 봉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공주와 옹주는 품계가 없는 무품 작위로서 외명부에 속하는데 이는 궁중에서 자란 뒤에 궁 밖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이랍니다.
그 외에, 군주와 현주가 있는데 군주는 세자의 딸을 현주는 세자의 후궁에게서 난 딸을 지칭하나 이들은 무품작위가 아니라 군주는 정2품이며, 현주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됩니다.
이들 왕녀들은 대개 13살을 전후하여 결혼하고, 결혼 적령기가 되면 금혼령을 내린 뒤에 몇 명의 부마 후보를 택하여 왕과 왕비가 최종적으로 선택하였지만 대개 부마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통해 내정되었기 때문에 공주와 옹주는 정치 상황에 따라 그 처지가 급변하곤 했습니다. 왕녀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출가한 뒤에는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러나 왕녀들의 삶은 시가의 상황변화보다는 친정의 처지에 더 크게 좌우되었는데, 시가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더라도 왕녀들은 대체로 신분 보장이 되었지만 그러나 친정이 몰락하는 경우에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예로 성종의 서녀 공신옹주는 어머니 귀인 엄씨가 연산군의 생모를 내쫓는데 가담한 것에 연좌 되어서 죽임을 당했으며, 광해군과 연산군의 경우 왕이 폐위된 이후 그 딸들도 서인으로 전락하여 어렵게 살게 됩니다.
왕녀들도 남편의 축첩에 마음을 상하고, 무관심에 눈물을 흘리며 사는 일도 많았습니다. 왕녀들은 재가나 개가를 할 수 없었고 대개 조선 일반 민가의 아낙들에게 재혼과 개혼이 허락된 것에 비하면 왕녀들은 결혼생활의 폭이 좁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과 비교할 때, 왕녀들의 삶은 부유하고 호화로웠으며 평탄했습니다. 왕녀라는 신분덕분에 늘 특권을 누린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혜택을 누렸고, 웬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반역이나 불충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형벌을 받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공주와 옹주는 남편의 직책에 따라 경제적 녹봉과 토지를 받는데, 남편이 죽어도 살아 있을 당시의 남편 직책에 맞는 대접을 받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平岡公主), 그리고 서동요(薯童謠)에 나오는 무왕과 선화공주 등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구요. 여기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조선시대 왕의 딸들을 알아보겠습니다.
경순공주
?∼1407(태종 7). 조선 태조의 셋째딸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소생이자 무안대군 방번(撫安大君芳蕃)과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芳碩)의 동복누이입니다. 개국공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는데, 1398년(태조 7)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인 이제와 두 남동생 방번과 방석이 방원(芳遠:뒤에 태종)에 의해 죽게 되자, 다음해 태조가 친히 경순공주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였습니다.
정순공주
“女長貞順公主, 下嫁淸平府院君 李伯剛, 非一李也”
장녀는 정순공주이니 청평부원군 이백강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는 아니다.
《(太宗恭定大王實錄卷第三十六終【원전】 2 집 249 면》
1385(우왕11)∼1460(세조6). 조선 제3대왕 태종의 맏딸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입니다. 1399년(정종 1) 영의정 부사서원 부원군(領議政府事西原府院君)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인 사헌부감찰 백강(伯剛)에게 출가하였습니다. 1400년(태종 즉위년) 11월 태종의 즉위와 함께 정순공주에 봉해지고, 이후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두터운 은총을 받았으나, 1451년(문종 1)과 1455년(세조 1)에 남편과 사위를 연이어 여의는 고통을 당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슬하에 한산이씨 좌찬성 한산군(左贊成漢山君) 계린(季#인13)에게 출가한 1녀를 두었습니다.
의순공주
?∼1662(현종3). 조선 후기의 왕족 금림군(錦林君) 개윤(愷胤)의 딸입니다. 1650년(효종1)에 청의 황자(皇子) 구왕(九王)으로부터 조선의 공주를 얻어 결혼하겠다는 요청이 있자, 우리 조정에서는 그를 뽑아 공주로 봉한 다음 사신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청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탓으로 구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청으로 간 다음해에 구왕이 황제의 자리를 엿본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죄로 몰리면서 구왕의 부인들이 여러 왕족과 장수들에게 분배될 때, 그는 구왕의 부하장수에게 넘겨졌습니다. 그 뒤 그의 아버지인 금림군이 사신이 되어 청으로 들어갔을 때에 딸의 환국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1656년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정치적 이유로 불운한 인생을 보낸 전형적인 공주이기도 합니다.
정명공주
1603(선조 36)∼1685(숙종 11). 조선 선조의 첫째 공주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비(仁穆王妃)입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사사하고 계비 인목대비를 폐출시켜 서궁(西宮)에 감금할 때 공주도 폐서인(廢庶人)되어 서궁에 감금되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공주로 복권되고, 1623년(인조 1)에 동지중추부사 홍영(洪霙)의 아들인 주원(柱元)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죽은 뒤 궁중에서 백서(帛書)가 나왔는데, 그 내용이 무도하다고 하여 공주도 효종의 의심을 받아 영안위(永安尉)의 궁인이 고문을 받아 많이 죽기도 하였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종친으로서 후대를 받았습니다.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입니다.
영조의 7옹주
영조는 27명의 조선 군주 중 가장 오래 재위했던 임금으로 총 7명의 딸을 낳았는데, 모두 후궁의 몸에서 낳았으므로 옹주가 됩니다.
그중 정빈 이씨가 낳은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조선시대 왕가 여인 중 유일한 열녀입니다. 그녀는 현재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김한신(金漢藎)에게 출가했는데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은 바로 명필로 이름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입니다. 성품이 어질고 정숙한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가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자, 일절 곡기를 끊고 물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통곡하다가 결국 10여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고 말았습니다.
영조는 누차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일렀지만 끝내 자신의 명을 거부한 채 죽어간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추사고택에 남아 있는 열녀문은 영조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내린 것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영조 091 34/01/17 (갑진) 002 / 화순 옹주의 상에 왕림하다. 예조 판서 이익정이 정려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임금이 화순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여 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다. 임금이 환궁(還宮)한 뒤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 앉아서 자식의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거듭 타일러서 약을 먹기를 권하니, 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시니 어찌 억지로 마시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하고, 조금씩 두 차례 마시고는 곧 도로 토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을지라도 중심이 이미 정해졌으니, 차마 목에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하기로, 내가 그 고집을 알았으나, 본심이 연약하므로 사람들의 강권을 입어 점차로 마실 것을 바랐는데, 마침내 어버이의 뜻을 순종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이로써 운명(殞命)하였으니, 정절(貞節)은 있으나 효에는 모자란 듯하다. 그날 바로 죽었으면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마는, 열흘을 먹지 아니하니 내 마음에 괴로움이 많았다. 아까 예조 판서가 정려하는 은전을 실시하라고 청하였는데, 그 청함은 잘못이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뒤에 폐단됨이 없지 아니하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오나, 우뚝한 정절을 없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세(百世)에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정절에 있고 정려에 있지 아니한데, 내가 군사(軍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후세에 폐단을 끼치지 아니하려고 한다.”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왕림하였을 적에, 그가 시호(諡號)로써 그 지아비의 명칭을 바꾸고 싶어 하여 내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었는데, 시호를 내리던 날에 죽었으니, 시호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임종(臨終) 때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마음 아파하는 바이다.” 하였다.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德惠翁主)와 이혜원 옹주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특히 덕혜옹주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딸로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나 1989년 4월 21일 그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ㆍ유릉의 안쪽 산기슭에 묻혀있답니다.
참고 : 조선의 왕실과 외척, 박영규 지음
글쓴이: 문화재청 금곡지구관리소장 허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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