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주 사
운주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아배 한복판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 땅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도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절에는 탑 18기, 불상 70구가 남아 있는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앞에 자리잡은 이 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서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특이한 모양의 석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운주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아배 한복판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 땅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도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절에는 탑 18기, 불상 70구가 남아 있는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앞에 자리잡은 이 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서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특이한 모양의 석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양식이라 하겠다. 기단의 맨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多塔峰)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
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글자료출처:문화재정보지식센터, 천불천탑의성지 운주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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