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보니 핏덩이에 엉겨 붙은 것 같은 꽃나무가 슬쩍 지나갔다. 눈길 잠깐 스쳤는데 정신이 어질어질해 쓰러질 것 같았다. 흔하게 핀 들꽃들은 저 나름대로 고운 빛깔을 두루고 바람결에 술렁이고 있었지만 이 꽃나무는 전체가 붉은 숯불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김천에서 매곡으로 넘어오는 고갯마루 민가에서 만난 꽃나무, 나는 차를 빈 공터에 세우고 는 민가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배롱나무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그 많던 배롱나무들은 끝물이 들어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이 민가의 배롱나무만은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산골기온은 달랐다. 햇살은 따가운데도 바람은 뽀숭뽀숭했다. 바람 한번 불면 몸에 엉겨 붙었던 습기도 싹 달아났다. 초가을 문턱에 올라선 산골 기후는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할 만큼 배롱나무 꽃의 색감을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배롱나무는 지겹도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기간이 무려 백일이 된다하여 달리 목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꽃 하나가 백일을 피어있는 것이 아니다. 엉긴 꽃잎이 붉은 물감을 붓으로 찍어 뿌린 것 같지만 실은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여 백일동안 꽃을 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거리를 나가보면 배롱나무 꽃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관청의 앞마당은 물론 대로변의 꽃밭에까지 배롱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어 눈길이 닿을 때마다 기분이 아찔하다. 더구나 붉고 화사한 꽃빛만큼 나뭇가지도 희고 매끈하여 그 정갈함에 탄복을 한다. 그래서 충청도에서는 ‘간지럼나무’라고 불렀고 제주도에서는 ‘저금 타는 낭’ 이라고 불러 그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길을 닿는 곳마다 배롱나무가 붉은 꽃으로 나를 유혹하니 여간 행복한 게 아니다. 배롱나무를 찾아 인적이 드문 산을 찾을 필요도 없고 보고 싶으면 바로 눈앞에 화사한 자태로 뽐내고 있으니 배롱나무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목 백일홍으로 알았던 배롱나무, 담장을 덮어씌운 초록의 나무에서 매미소리 들려올 적마다 꽃빛이 더욱 붉어지는 기분이다. 더구나 빌딩으로 막힌 도심이라보니 배롱나무꽃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뇌쇄시키는 매혹의 빛깔, 마른 구름장이 하늘을 흘러가면 배롱나무는 따사로운 가을볕을 쐬며 백일동안 만발할 꿈을 꾼다.
그러나 이처럼 눈을 시리게 할 만큼 화사한 배롱나무에게도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떤 처녀가 육지에 사는 사룡과 정분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섬에 사는 이무기가 사룡과 처녀의 사랑에 훼방꾼으로 나타났다. 이에 격분한 사룡이 이무기와 결투를 벌이러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만약 결투에서 이기면 뱃전에 흰 깃발을 달고 오겠노라며 약속을 했다. 처녀는 매일 해변의 벼랑에 올라가 기도로 밤낮을 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사룡의 배가 수평선위에 나타났다. 처녀는 깃발부터 살폈다, 그런데 뱃전의 깃발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처녀는 낙담하여 곧장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자결을 했다. 잠시 후 육지에 도달한 사룡은 처녀가 자결한 이유를 알고 가슴을 쳤다. 뱃전에 걸린 붉은 깃발은 아무기가 요동칠 때 흘린 피였던 것이다. 사룡은 처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는데 이듬해 그 무덤에서 솟아오른 나무엣서 붉은 꽃이 피었다. 이 나무가 바로 배롱나무였다. 나무는 맺힌 한을 풀기라도 하듯 붉은 꽃이 피어나 오래도록 사룡의 곁에 머물렀다. 이것이 바로 배롱나무였던 것이다. 이런 슬픈 전설을 간직한 채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가 백일이 아니라 천일이라도 내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 같다.
꽃망울이 부풀어 붉은빛으로 물이 든 날
땅위에 찍힌 그림자에는 붉은 물이 들지 않았다
꽃물은 허공으로 달아나
서편 하늘의 노을로 걸리고
땅위의 그림자는 적막했다
한 여름 땡볕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꽃망울의 만개를
맨살 보숭한 가을볕이 도와주었다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툭툭 터지는 꽃망울들,
그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내 마음 속에도 붉은 물이 젖어들고 있었다
소낙비가 몰아쳐도
씻기지 않던 꽃물이
더 붉어진 물로 화르르 타오르는 걸 보았다
그때마다 매미소리 쩡쩡 울렸다
거의 한 달을 목이 쉰 채
폭염을 끓이듯 울어주던 매미들,
알고 보니 꽃망울은 매미소리에 맞춰 터지고 있었다
매미소리 더 높아질 때마다
배롱나무는 붉은 물이 든 꽃잎을
노을처럼 서편 하늘에 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