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金東煥) 창씨명 白山靑樹(1901∼?)
1940 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 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곰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붓는 어유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이 시는 파인(巴人) 김동환의 유명한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 제1부의 첫머리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시는 그를 우리 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올려 놓았다.
두만강 유역을 무대로 하여 소금을 밀수하는 남편의 월경(越境)을 걱정하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인용 부분은 망국민의 민족적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 전체에서 특히 절창을 이루는 부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서사시 양식을 최초로 도입한 공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그 밖에도 그는 민요시 창작을 통하여 향토성에 기반한 민족적 전통성의 계승에 기여한 점이 인정된다. 이러한 그의 문학세계의 이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민족주의'이다.
젊은 시절 그는 카프에도 잠시 참여하여 경향문학에 다소 경도되기도 했지만, 1927 년 경부터 민요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광수, 주요한과 함께 {삼인시가집}(1929)을 냄으로써 민족주의 문학노선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당시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던 문인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적극적인 친일로 나서게 된다. 아마도 그에게서 민족주의 이념의 실체가 김팔봉(金八峰)이 지적한 것처럼 소시민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던 때문일지도 모른다([조선문단의 현재수준], {신동아}, 1934.1). 그만큼 그의 민족주의 이념이 취약했던 것인데, 이광수에게서 잘 보여지듯이 그것은 민족주의의 개량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광수가 '민족을 위한 친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을 변명했듯이, 김동환 또한 그럴 여지를 적잖이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외쳐대
어쨌든 우선 김동환의 생애를 간단히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아명(兒名)이 삼룡(三龍)인 그는 1901 년 9 월 21 일 부 석구(錫龜), 모 마윤옥(馬允玉)의 6 남매 중 장남으로,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태어났다.
1913 년 경성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1921 년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동양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였으나, 1923 년 관동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계에 종사 하였으며, 1929 년 6 월 종합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경영하였다. 그의 문단활동은 {금성}(金星)지(1924. 5)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를 발표하면서 시작 되었는데, 시집으로는 서사시 {국경의 밤}(1925)과 {승천하는 청춘}(1925), {삼인시가집}, {해당화}(1939)가 있다.
그가 시인이었던 만큼 그의 친일시부터 살펴보자.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 11. 6)은 지원병으로 나가 전사한 이인석(李仁錫) 군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일제가 벌인 전쟁의 총알받이가 될 것을 강권하고 있다. "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은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라는 저주까지 덧붙여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외쳐댔다. 실제로 그는 1941 년 10 월 7 일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지원병보급혈전대강연회에서 '궐기하라, 나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대는 20 대 우리는 40 대
부자 이대 서로 나란히 서서 전장에 내닫세
다만 오늘은 그대 선진되고 내일날 우리 뒤따르리
안 나서면 무얼 하나
못쳐서 오륙십 살면 무얼하나
차라리 한 두 해도 번듯하게 살아버리지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 나라가 그 생사 맡아주심일레
그러면 살 제는 후하게 따뜻하게 뜻같게 하여주시고
죽을 젠 그 자리 거룩하고 높게 꾸며주시네
지금, 조국은 전쟁하는 때
살고 죽고를 더욱더 군국에 바칠 때일세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냐
[권군취천명]의 제1∼3연인데, 이쯤 되면 이는 시도 뭐도 아닌 것이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는 [일천병사의 숲](一千兵士の森), [우리들은 칠인(七人)],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이 더 있다. [고란사에서]는 부여신궁(扶餘神宮) 건설에 근로봉사하는 감격을 읊고 있으며, [비율빈 하늘 위에 일장기]나 [미영장송곡], [적국항복 받고지고] 등은 전쟁을 예찬하고 '지도민족', '조국일본 강토'를 외치면서 대동아공영의 이념을 합리화시켰다. 이런 친일적인 내용의 작품을 일일이 예거하면서 해설을 덧붙이는 것이 오히려 욕될 지경이다.
그의 친일 시국논설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신윤리의 수립]과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 등이 있다. 후자는 뒤에 설명 하겠거니와, '국방국가의 입장에서'라는 부제를 단 전자는 당시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문학'이 바탕하고 있는 정신적·논리적 저류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신체제론에 입각하여 "신체제하에 있을 문학이란 오직 국가 때문에 있고, 오직 신민의 길을 실천하여 나가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따라서 신체제의 문학은 성전에서 일제가 승리 하여야 하고 전후에도 동아경륜의 이상이 실현 되도록 애국심을 격려하는 문학이어야 하며, 그 문학적 주조(主潮)는 이상주의적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필활동보다 단체활동에서 더 두드러진 친일행각
그러나 그의 친일행각은 문필활동 쪽 보다는 단체활동 쪽이 훨씬 활발한 편이었다. 그는 수많은 부일단체에 주요 인사로 가담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뭐니뭐니 해도 자신이 직접 경영하던 {삼천리}라는 잡지를 이용해서 직접 '임전대책협의회'를 결성하고 나선 일이다. 1938 년 5 월호 {삼천리}에 여류인사들의 시국논설을 실은 것을 필두로, 1939 년 4 월에는 총독 미나미(南次 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新うしき東洋の建設) 등을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 하였다. 그가 친일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계기와 시기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때 쯤부터가 아닐까 싶다. 나아가 1942 년 5 월에는 잡지명을 {대동아}(大東亞)로 바꾸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부일협력에 나섰다.
삼천리사를 앞세워 김동환은 아주 적극적으로 친일매족의 선봉으로 나섰다. 1941 년 8 월 그는 임전 체제하의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의 실천방안으로 물자 및 노무공출의 철저·강화책, 국민생활의 최저 표준화운동 방책, 전시봉공의 의용화방책 등을 내세워, 이에 대한 협의라는 미명 아래 각계의 유력인사 198 명에게 안내장을 발송 하였다. 이 안내장에 근거하여 8 월 25 일 임전대책협의회가 발족하였다. 그의 발기에 의해 개막된 이 협의회에는 8 월 28 일 제1차 위원총회를 열어 모임의 명칭을 '임전대책협력회'로 고치고 그를 비롯하여 11 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다. 9 월 4 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전대책연설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윤치호, 최린, 신흥우(申興雨) 등과 더불어 '송화강수여 말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매출했던 1 원 짜리 채권을 소화시키기 위해 이 협의회는 채권가두유격대를 결성, 거리로 나섰다. 이광수, 모윤숙, 최린, 방응모(方應謨), 윤치호 등과 함께 종로 화신 앞에 나가 행인들에게 채권을 팔았던 것이다.
김동환이 주동이 되었던 이 협의회는 윤치호 중심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1941 년 9 월 11 일 통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0 월 22 일에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친일단체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 단체야말로 친일분자들이 총망라된 것이라고 하겠는데, 그 강령을 보면 이 단체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첫째, 황도정신의 선양, 둘째, 국민생활의 쇄신, 셋째, 근로보국, 넷째, 국채의 소화, 저축의 여행, 물자의 공출, 생산의 확충, 다섯째, 국방사상의 보급 및 의용 방위 등이 그것이다. 그가 이 임전보국단의 간부(전시생활부원 및 상무이사)로 선임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42 년 10 월 29 일 해산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되기 까지 그는 임전보국단의 핵심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하여](1941. 11)는 임전대책연설회의 개회사에 해당하는 글로서, 김동환은 여기서 일본과 발맞춰 조선에서도 성전에 임해야 할 3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사상전으로, 조선인은 모두 황도정신을 파악한 일본 국민이 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청산하고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과 땀을 나라에 바치자는 것이다. 즉, 물자 헌납과 노력 동원으로 국책에 협력하자는 내용이다. 셋째는 피를 바치는 일, 다시 말해 생명을 전장(戰場)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쳐 일제에 충성하자는 얘기다. 그렇게 하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영혼마저 일제에 바쳤는데, 어찌 '민족을 위한 친일'(이광수)이라는 변명으로 이 엄청난 죄과를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임전보국단은 1941 년 12 월 14 일 전선대회를 열어 전시하 사상통일의 구체적 방침과 군수자재 헌납운동을 결의 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6 시에는 미영타도 강연대회를 가졌다. 이 강연회에서 김동환은 '적이 항복하는 날까지'라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적 장개석 정권을 비롯하여 영·미를 이 지구상에서 격멸치 않고서는 오늘의 배급쌀 까지도 편히 얻어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인 소설가 최정희(崔貞熙)까지도 친일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임전보국단은 1942 년 1 월 5 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발족시켜 군복수리작업 등 근로봉사 운동을 전개하게 하였는데, 부인대의 간부는 김활란, 임영신(任永信), 고황경, 박마리아, 박인덕, 박순천(朴順天), 노천명(盧天命), 모윤숙, 임효정(林孝貞)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그 이전인 1941 년 12 월 27 일에는 결전부인대강연회를 개최하였는바, 여기서 최정희는 '군국의 어머니'({대동아}, 1942. 5)라는 제목으로 연설 하였다. 그 내용은 어린 자식의 "내가 전쟁에 나가 죽으면 울테야"라는 질문을 받고 엄마인 자신이 당황하자 아이가 "엄만 틀렸어"라고 말하며 낙망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강한 어머니가 될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다. 최정희의 친일 작품으로는 소설 [장미의 집]({대동아}, 1942. 7), [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 1942. 11) 등과 수필 [어머니 마음]({국민신보}, 1939. 5. 14), [꿈은 남역으로]({대동아}, 1942. 5), [동아의 새 아침]({매일신보}, 1942. 2. 21) 등이 있다.
이외에도 김동환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친일단체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먼저 '황군위문작가단'부터 보자. 일제에 비행기 2대를 헌납한 바 있는 친일부호 문명기가 1937년 8월 20일 화북지방 장병 위문을 떠난 이래로 위문단 파견은 일대 유행을 이루었는데, 이에 발맞춰 황군위문작가단이 조직되었다. 1939년 3월 14일 최재서*, 임화(林和), 이태준(李泰俊)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한 모임에서 작가단 파견이 논의되었다. 이 때 그는 김동인, 김용제(金龍濟), 박영희, 주요한, 백철*,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위문사 후보로 선출이 되고, 작가단 실행위원으로 뽑힌다. 이 작가단의 위문은 단지 위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전쟁문학 창조의 실천적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작가단의 결의에 따라 1939년 4월 15일 김동인, 박영희, 임학수 세 사람은 화북 장병을 위문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전선기행](박영희)과 [전선시집](임학수)을 각각 남겼다.
또한 그는 이광수, 박영희, 유진오(兪鎭午), 최재서, 김문집(金文輯),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인협회(1939. 10. 29 결성)의 발기인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4월 17일에 조선문인보국회로 바뀌는데, 여기서도 그는 유진오, 최재서, 유치진 등과 함께 상임이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1940년 10월 16일에 발족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그 해 12월에 문화활동의 신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문화부를 독립시켰는데, 여기에 김동환이 빠질 리 있었겠는가. 그는 김안서, 백철, 박영희, 유진오, 정인섭(鄭寅燮), 홍난파 등과 함께 문화위원에 위촉 되었다. 나아가 1943년 1월 24일에는 개편된 총력연맹의 참사로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도쿄에서 제20회 중의원 총선에서 당선된 박춘금이 조직한 단체로 '대화동맹'과 '대의당'이 있었다. 대화동맹은 일제의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서, 1945년 2월 11일에 결성되었다. 또 대의당은 대화동맹의 자매단체로서, 1945년 6월 24일에 결성되었다. 이들 두 단체에 김동환이 위원으로 가담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대의당이 표면적으로는 '평화적으로 사회정책 부면을 담당'하여 일제의 전시체제에 적극 부응하고자 하였다고 하나, 이면적으로는 '항일반전 조선 민중 30만 명을 학살코자 직접적 행동을 위할 폭력살인단체'였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일제가 패망하기 불과 한두 달 전에 대의당이 결성되었음을 볼 때, 위의 언급이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용자가 그 진부를 판별할 수 없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패망 직전에 몰린 일제가 마지막 발악으로 그 앞잡이들을 내세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가당찮은 창씨명 白山靑樹
이상에서 보듯이 그는 친일단체라면 거의 대다수의 모임에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지 않은 적이 도대체 없을 지경이다. 삼천리사를 발판으로 그는 시국관련 좌담회를 여러 번 개최하였는데, [전쟁과 문학과 그 작품을 말하는 좌담회](박영희·김팔봉 참석, {삼천리}, 1931. 1), [신체제하의 조선문학의 진로](이광수·유진오·박영희·정인섭·최정희 등 참석, {삼천리}, 1940. 12), [상하이·경성 양지(兩地) 예술가 교환(交驩) 좌담회](박거영·박계주 등 참석, 1940. 12) 등이 대표적인 좌담기사들이다. 이외에도 여러 친일 내용의 좌담회에 단골손님으로 나섰다.
김동환의 창씨명은 시라야마 아오키(白山靑樹)이다. 참으로 가당찮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백산청수라 하였으니, 삼천리 금수강산의 푸른 나무를 뜻함인가? 비록 친일은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고, 사실은 내심으론 조국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백산청수'라고 하였다고 발뺌이라도 한다면, 그것도 어느 정도 변명 축에 든다고 할 도리밖에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가 운영했던 잡지사가 {삼천리}였으니, 이렇게 우겨도 영 억지는 아닌 셈인 듯싶다.
결국 해방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공민권을 정지당하는 처벌을 받아야 할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김동환의 친일행적을 더듬어 볼 때, 그 정도의 처벌은 응분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민특위가 온전하게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없었음은 잘 알려진 바이며, 우리 역사의 오점임에 틀림없다.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는 새삼 지적할 것도 없으리라.
어쨌든 그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되었던 것이다. 납북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알려진 바가 없다. 많은 부일도배들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양지를 밟아가며 계속 복락을 누린 것에 비하면, 그는 오히려 어쩌면 불행한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윤태(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김동환, [勸君就天命], {매일신보}, 1943. 11. 6.
______, [신윤리의 수립], {매일신보}, 1940. 11. 19.
______, [임전보국단 결성에 際하여], {삼천리}, 194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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