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자 최초로 사형언도받은 친일경찰
16년간 평북 경찰부 주임, 나중에 고등과장 역임
1942년 평북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43년 평남참여관 겸 농상부장
반민재판에 기소된 반민족분자 중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한 명 있었다. 그가 바로 김덕기였다. 그는 1890년 강원도 출생으로 일제하에서 33년 동안 관리로 근무하였는데, 그 중 23년 동안 경찰에 있었다. 김덕기는 23년의 경찰생활 중 16년을 평북 고등계 주임으로 있었으며, 나중에는 고등과장 까지 역임하였고, 일제 40년 동안 20명밖에 받은 사람이 없는 경찰공로기장(功勞記章)을 받았다. 경찰직을 물러난 뒤에는 도이사관을 거쳐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43년 평안남도 참여관 겸 농상부장을 지냈다. 후에는 그의 친일공로가 인정되어 칙임관 훈4등까지 받았다.
독립투사 오동진을 체포 옥사케 해 평북은 만주와 접해 있어서 많은 독립투사와 독립군이 들고나는 관문이었을 뿐마 아니라, 만주 항일투쟁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해 낸 지역이었으며, 만주 독립군의 국내 침공ㆍ침투작전의 주요대상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일제의 충견으로서 평안북도에서 16년 동안이나 고등계에 몸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김덕기의 죄상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덕기의 죄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자백에 의하면 16년간 자기 손을 거쳐 송치한 사상범이 무려 1,000명에 달했으며, 그 중 사형이 1할, 무기징역이 1활, 그리고 10년 이상의 체형을 받은 사람이 1할 정도 되엇다고 한다. 김덕기에 의해 체포ㆍ투옥 또는 사살당한 독립투사는 오동진을 비롯하여 창의단 단장 편강렬, 낭림단 단장 장창헌, 정의부 이진무, 김형출 등 만주 독립운동계의 쟁쟁한 지도자로서, 이들이 체포 또는 사살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 가운데 오동진은 광복군사령부 총영장으로 국내와 만주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여 용명을 떨쳤다. 그리하여 김동삼, 김좌진과 함께 무장독립투쟁계의 3대 명장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진무는 평안도지역에서 압록강을 드나들며 일인순사를 습격하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집했던 ‘애꾸눈’지휘관으로서, 용감무쌍하여 일목장군(一目將軍)이라 불렸으며, 불의를 보면 불같이 노하는 성미이기 때문에 흑선풍(黑旋風)이라 불리기도 하여 그의 별명만 들어도 일경과 밀정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고 한다.
오동진은 평북 고등과의 교묘한 계략에 속아 희생되었다. 당시 평북 고등과장은 이성근(李聖根)이었고, 바로 그 밑에 고등계 주임으로 김덕기가 있었다. 이들은 독립운동단체인 정통단(正統團)에 관련되어 체포된 김종원을 밀정으로 포섭, 오동진을 유인해 오도록 했다. 김종원은 1927년 12월 16일 오동진을 찾아가 국내의 금광재벌 최창학이 군자금을 주기 위해 만나기를 원한다는 거짓말로 그를 장춘(長春)역 부근의 신음하(新蔭河)라는 곳으로 유인해 잠복했던 왜경이 체포토록 했다. 신음하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오동진은 계략에 걸려든 것 같아 지린(吉林)-창춘선의 흥도진(興陶鎭)역에서 내렸으나 대기하고 있던 신의주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장장 6년여의 재판끝에 1932년 6월24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받았으며, 1928년 4월에는 정의부 10중대원인 김여연, 최봉복 등이 총사령관인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오동진은 상고를 포기하여 무기형이 확정되었으며, 1934년 7월 19일에는 20년 형으로 감형되기도 하였으나, 모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친일경찰이 그렇듯이 김덕기도 독립투사를 체포ㆍ검거하는 과정에서 그 잔악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낭림단 단장 장창헌 외 1명을 강계군 도서면 황청동에서 김덕기 자신이 직접 엽총으로 사살하였으며, 정의부 김형출과 그 부원 2명은 김덕기 자신이 직접 무장경찰을 시켜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렸다. 김덕기의 반민족적 죄상을 살펴보면서 깨닫게 되는 점은 친일경찰, 특히 고등계 경찰과 형사들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정도 이상의 범죄를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온갖 비인간적 만행과 고문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일인경찰과 같은 부류의 고양이었으며, 그 이상으로 잔악성을 보인 경우도 많았다.
의열단의 제2차 거사를 좌절시키고 경찰공로기장 받아 의열단은 무력으로 일본과 맞선 독립운동단체의 하나로, 약산 김원봉의 주도로 1919년 10월10일 만주 지린에서 조직되었다. 여러 차례의 파괴ㆍ암살공작을 수행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의열단은 마침내 김원봉의 지휘아래 주도면밀한 대파괴 암살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는 파괴대상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경성전기회사 그리고 경부선ㆍ경의선ㆍ경원선 등 중요 철로간선을 생각하고,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정무총감, 경무총감, 그리고 밀정 가운데 악질적인 자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단재 신체호의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은 바로 이러한 의열단의 암살ㆍ파괴활동에 공감한 신채호가 김원봉의 요청에 의하여 의열단을 사상적ㆍ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었다. 「조선 혁명선언」으로 사상적 무장을 마친 김원봉은 이동화로 하여금 외국인 청년 마자알로부터 폭탄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김시현을 통해 경기도 경찰부 현직 경무인 황옥을 포섭하여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황옥의 주임무는 파괴ㆍ암살에 쓰일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었다. 이 거사가 성공할 경우 일제의 주요적성(敵性)기관들이 박살남과 동시에 독립운동사상 찬연한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김덕기가 이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당시 평북 고등경찰과 현직 경무였던 김덕기는 1922년 가을 무렵 의열단의 거사를 탐지했다. 안동, 봉천 등을 내왕하면서 비밀리에 사찰하던 김덕기는 마침내 김시현, 황옥의 행적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1923년 3월 7일 폭탄 및 권총을 휴대하고 안동역에 내린 황옥 일행은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의 집에 임시 잠복처를 정했다. 그리고 나서 5월 중순으로 예정된 거사날에 맞추기 위해, 그들은 3월 12일 오후 6시 발 남행 열차로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잠입하였다. 그 때 폭탄은 이미 국내에 반입되어서 그 일부가 신의주 한성여관 등지에 은닉되어 있었다. 18개는 황옥이 서울로 가져가고, 나머지 반인 18개는 추후에 옮길 예정이었다. 이러한 행적을 경부 김덕기는 3월13일 오후 11시에 탐지해 낸 것이다. 황옥 일행이 경성으로 떠난지 하루만이었다.
이튿날 경기ㆍ평북경찰부가 출동하자 제보자인 김덕기는 가장 앞장서서 연루자인 조동근, 홍종우, 백영부, 조영자 등을 검거했다. 이어 김시현, 황옥도 경기도 경찰부에 의해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ㆍ파괴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더욱이 같은 동족인 친일 매족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데서 통분을 금할 길이 없다. 김덕기는 이 거사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로 경찰 최고의 포상인 공로기장을 받았다.
반민자 최초로 사형언도 받아 김덕기는 1949년 2월8일 정오 무렵,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 344번지에서 반민특위가 파견한 특경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체포 후 그는 일체 자기 죄상을 자백하지 않다가 25일만에 양회영 조사관 앞에서 자신의 과거 죄상을 자백하기 시작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엄청난 죄상이었다. 김덕기는 1949년 4월 26일의 사실심리로부터 시작하여 7월 1일 사형언도를 받기까지 모두 5회의 공판을 받았다. 범행을 자백한 이후부터 그는 김태석과 달리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재판을 받았다.
김덕기는 제1회(4.26), 제2회(5.6)공판에 걸쳐 사실심문을 받았다. 제1회공판에서 김덕기는 기소사실을 순순히 시인하였다. 또한 장창헌을 엽총으로 사살한 데 대하여, “지금 와서 차마 인도상 못할 일을 하였으며 후회됩니다” 라고 말하고, 오동진을 체포하여 옥사시킨 데 대하여는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진술했다. 또한 제2회 공판에서는, 오동진의 체포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취급하지 않았으나 상부에 있었으니만큼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허다한 반민족 범행을 전적으로 부인함으로써 제1회공판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제4회(6.3) 공판에서 김웅진 검찰관은 약 30분에 걸쳐 진지한 논고와 아울러 “특히 피고는 낭림대사건 관계자를 피고 자신이 직접 엽총으로 총질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연락원을 체포ㆍ투옥케 하는 동시에 오동진 의사를 옥사케 함에 비추어 이는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사형에 처해주기 바란다” 는 준엄한 사형구형을 하였다. 그러자 방청하고 있던 방청객들은 민족정기는 살아있다는 듯이 일제히 우뢰와 같은 박수로 법정 내를 진동케 했다.
제5회(7.1) 공판은 오전 11시부터 노진설 재판장 중심으로 열려 이유문 낭독과 아울러 11시20분 김덕기에 대한 언도가 내려졌다. 노진설 재판장은 피고에 대하여 “피고는 14년간 고등경찰로서 최고지위까지 지냈으며, 재직 중 수많은 애국자들을 검거ㆍ소탕하여 민족정신을 말살케 한 극악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민족정신을 살리고 수많은 선열의 영을 위로하고, 외국으로부터 돌아오신 애국투사들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피고인을 ...... 사형에 처한다” 라고 하며 엄숙한 태도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반민법 실시 이후 최초로 사형언도를 내린 노진설 재판장은 언도 후 “김덕기는 많은 투사를 살상하고 혁명운동을 방해함이 큰 고로 부득이 극형에 처했다. 이로써 민족정기를 살리고 반민법이 엄연하게 운영되기를 믿는다”는 요지의 언도소감을 피력했다. 한편 사형언도를 받고 형무관에 이끌려 나가던 김덕기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무 할 말이 없다” 며 땅만 보고 창백한 얼굴로 재판소 내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사형언도를 받은 김덕기는 7월 4일 옥중에서 “그 억울함이 비길 데 없다”고 변호인을 통해서 특별재판부에 재심신정을 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6ㆍ25직전 감형으로 풀려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첫째 사형언도 이후 거의 1년이 지나도록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 감형으로 사형수가(무기징역이나 몇 년형의 징역이 아니라) 풀려나왔다는 사실이다. 독립투사를 체포ㆍ사살한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적ㆍ반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김덕기가 풀려나왔다는 것은 곧 반민자 처단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웅변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여론의 성원과 국회내의 소장파 의원들의 주도로 추진된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인하여 소장파 의원들이 구속되는 한편, ‘6ㆍ6경찰특위습격사건’으로 특경대가 무력화 된 뒤로는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민자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말일로 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에는 반민자 처단사업은 사실상 무조건 종결의 방향으로 진행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친일파ㆍ민족반역자 척결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덕기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덕기는 천벌을 받았는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독립투사 정이형의 딸 정문경씨의 증언)
이수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주요 참고문헌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
민족정경문화연구소,『친일파 군상』1948.
고원섭 엮음,『반민자 죄상기』 백엽문화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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