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역사 바로알기

이조시대의 참정신

고양도깨비 2007. 3. 22. 12:47

이조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공과부터 따지기 시작해야 함은 옳습니다. 이조 500년의 편향된 역사가 그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이성계를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안티방이나 매국노의 방에서 항변하는 이들을 보며 느낀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성계의 잘못은 무엇인가?

(나름대로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의 행적에 잘못이 훨씬 많기에 거론할 가치가 없습니다.)

 

 

첫째, 이성계는 우리의 영토를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저는 누차에 걸쳐 명나라는 요하 동쪽(요동)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는 역사를 공부한 분들 모두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만주는 주인없이 팽게친 땅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런 땅을 이성계는 방치하여, 결국은 서역오랑캐의 땅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발이 소위 '위화도회군'이니 그 하나만 가지고도 이성계는 욕을 먹어도 쌉니다. 물론 후일 우리와 한 핏줄인 청이 들어서지만 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둘째, 이조의 가장 큰 병폐는 신분을 가르는 일이었습니다.

 

학자입네 하는 이들은 말합니다. '이조는 성리학과, 유교국가'라고......

웃기는 얘기입니다.

 

유교의 창시자나 마찬가지인 공자 이하 맹자, 순자, 노자, 주자의 책을 샅샅이 뒤져 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두고'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고''남녀를 차별하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조에서는 이와같은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악랄한 차별은 서자를 차별한 것입니다. 이는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가진 자의 벌을 죄없는 자식이 받기에 대표적인 이조의 병폐입니다.

 

이성계가 반역을 도모하기 약 500년 전, 신라에는 여왕이 세 분이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어, 오히려 여성의 힘이 남성을 억누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예를 기황후에게서 찾습니다.

모두가 이시다시피 기황후는 여성, 우리와 피를 나눈 이 땅이 낳은 분입니다. 그 분은 실질적으로 원을 지배한 분입니다.

 

후일, 왜곡된 역사만 배운 우리들은 기황후를 '기껏 순제의 후광으로 정치에 관여한 여성'쯤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기황후는 이미 황태자로 책봉된 다나시리를 폐하고 후일 소종(昭宗)이 되는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옹립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는 옹골찬 여성은 남성보다 오히려 힘을 더 발휘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막강한 여성의 힘이 이조에 들어서면 사라집니다. 대신 신사임당처럼 온순, 가련형이 새 여성상으로 자리잡은 때가 바로 이조라는 얘기입니다.

 

여담이지만,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같은 이는 여걸이었지만, 남성위주의 이조에서는 기껏해야 기생으로 전락하거나. 한평생을 불만을 품은 불순세력으로 치부된 채 이승을 하직합니다.

이 모든 과의 시작이 이성계입니다.

 

 

셋째, 그럼, 고려에서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없었습니다."

 

그 증거를 대지요.

우리 역사서를 보면 신돈의 이름 앞에 항상 '노비의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장영실의 경우 또한 '관노의 자식'이라는 말이 따라 다닙니다.

 적어도 세종 때까지는 신분차별이 심하지 않았다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노비의 자식'인 신돈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이조 때에도 가능했습니까?

 

장영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도 신돈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그런 그가 세종의 총애로 벼슬을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이는 세종 때까지는 신분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고도 남습니다.  왕들의 총애 덕분에 그들이 인간 구실을 했다는 논리가 바로 충효(忠孝)를 유독 강조한 이조의 논리입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중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넷째, 그렇다면 언제부터 신분 차별이 심해졌는가?

 

제 생각으로는 성종 때부터 신분 차별이 극심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국대전의 완성이 근거)

본디, 어느 나라나 천민과 귀족은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질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타 나라의 천민은 대체로 '죄인이거나, 전쟁포로입니다.'

그러나 이조의 경우는 이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바로 양반의 씨앗이로되 본 처의 배를 빌지 않은 자 또한 천민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전례가 없는 사례의 첫 피해자를 저는 연산군으로 봅니다.

따져보면 연산군의 입지가 매우 곤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예에서 보듯이 연산군은 '서자'도 아니면서 어머니가 죄인이 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서자'와 비슷한 처지로 전락합니다.

그렇지만 애초 그는 세자였기에 간신히 왕위에 오릅니다만, 결국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 합니다.

연산군 또한 이조의 병폐 중의 하나인 신분 차별의 희생자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심각한 일이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선조 때가 되면 서자는 아예 아들로 취급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 허균 선생의 홍길동전의 일부입니다.

허균선생님은 이조 선조 때 분입니다. 그 분의 글에 이미 적서의 차별이 얼마나 자심했나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폐해가 많은 신분의 차별로 인한 폐해는 이조 영조 때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모두 아시는 내용이지만 잠시 옮긴다면...

 

영조는 숙종과 무술이 사이에 태어난 엄연한 서자입니다. 그런 이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웠겠습니까? 그 결과 영조는 아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 모든 잘못의 시초가 이성계이니, 어찌 그를 탓하지 않으리요.

따라서 이조는 잘못 태어난, 잊고 싶으나 잊어선 안될 우리의 역사의 한 장입니다.

 

(*위 사실에 비하면 이조 초기 수많은 고려 양민을 학살한 이성계 부자의 행동이 오히려 이해되는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원래 고려정신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끝까지 저항하는 민족이거든요.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이...             물론 이성계 부자가 잘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문화와역사 >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한반도설  (0) 2007.03.22
백제의 대륙 진출설  (0) 2007.03.22
진실을 찾아서 / 광개토왕비  (0) 2007.03.22
왕들의 묘호 / 종과조  (0) 2007.03.18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0) 2007.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