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의 비문 박물관

고양도깨비 2007. 3. 14. 18:48
“이념의 생지옥, 잊으면 또 겪어”
中정부 철저한 함구령속 민간 후원금으로 세워

 

 

 

“이것 좀 봐요. 이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노(老) 공산당원 위(余·73)씨는 비문(碑文)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청하이(澄海)현 부서기를 지낸 우런슈(吳仁秀)라는 사람의 비문 끝에는 ‘1968년 8월 17일 난을 당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14개 비문이 모두 그랬다. ‘천환신(陳煥新)~1968년 11월 11일 난을 당하다’ ‘위시취(余錫渠)~1968년 6월 16일 난을 당하다’….

“추모비를 세울 때 ‘쇠꼬챙이에 찔려 죽다’ ‘생매장당하다’라는 표현을 감히 적지 못했습니다. 단지 ‘난을 당하다’라고 썼을 뿐이죠.”

 

중국 유일의 문화대혁명 박물관이 있는 광둥(廣東)성 산터우(汕頭)시 외곽의 청하이(澄海)구 타산(塔山) 유원지. 문화대혁명 40주년(16일)을 앞둔 지난 13일 오후, 박물관은 한산했다.

추모비를 지나 박물관으로 오르는 산비탈에 20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발길을 잡았다. 묘비석에는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뒤에 ‘~지묘(之墓·~의 묘)’라고 적혀 있다.

 

위씨는 “문혁 난동이 극심했던 1968년,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한꺼번에 묻힌 곳”이라고 했다. 청하이구는 문혁의 중대 재난지역이었다고 한다.

 

문혁 주도세력이 장악한 생산대와 기존의 당권파를 지지하는 생산대가 이곳에서 총·칼을 동원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때 총살되거나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맞아 죽은 사람이 381명, 부상을 입은 사람이 4500여명에 달했다.

‘중국의 역사를 수십 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문혁은 ‘전 인민의 의식개조’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당내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를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대약진운동(1958년부터 수년간 마오쩌둥이 주도한 경제생산 배가운동) 실패로 당권에서 배제된 마오는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구호로 어린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동원, 실용주의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당·정 간부와 대학교수 및 지식인들은 어린 학생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문혁 기간(1966~1976년) 중국 전역에서 1000만명이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산터우 청하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300여 차례나 끌려나가 홍위병들 앞에서 공개비판을 받았다는 위씨는 “형벌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파시스트보다 더 파시스트 같았고, 지옥보다 더 지옥 같았다”고 했다.

 

청하이 문혁박물관 벽면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1100장의 사진과 자료가 623개의 검은 석판에 새겨져 있다.

 

홍위병에 둘러싸여 비판 받는 류사오치, 머리에 고깔을 쓴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군중들…, ‘늑골 9개 골절, 머리의 심한 상처로 뇌출혈 사망’이라고 적힌 사망 경위서도 있다.

문혁은 중국에서 아직도 ‘금기의 대상’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역시 청화대(淸華大) 졸업 후 문혁파의 탄압을 받았지만, 그가 이끄는 공산당은 여전히 문혁에 대한 어떤 연구나 토론도 금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 공산당이 이미 마오쩌둥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공적이 7할이고 과오는 3할)’이란 평가를 내린 마당에, 더 이상의 ‘재평가’는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자유아시아방송의 중국문제평론가인 린바오화(林保華)씨는 “문혁 실체에 대한 논의는 공산당의 기본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이징대학의 한 교수도 “문혁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6·4 천안문’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산터우 부시장을 지낸 펑치안(彭啓安)씨 등이 1996년부터 9년 동안 각계의 지원금을 받아 문혁 박물관을 완성했다. 박물관 큰 돌에는 지난해 숨진 문학가 바진(巴金)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혁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문혁박물관을 짓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과거를 잊지 않아야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현실을 도외시한 이념과잉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준 문혁의 과오가 지구촌에서 아직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