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와역사/문화재 및 국보

대한민국 국보 91호에서100호까지

고양도깨비 2007. 2. 1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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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기마인물상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주시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상은 높이 23.4㎝, 길이 29.4㎝이고, 하인상은 높이 21.3㎝, 길이 26.8㎝이다. 경주시에 있는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육지와 물길을 통하여 저세상으로 인도해 주는 주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두 인물상은 두꺼운 직사각형 판(板)위에 다리가 짧은 조랑말을 탄 사람이 올라 앉아있는 모습이다. 말 엉덩이 위에는 아래로 구멍이 뚫린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긴 부리가 돌출되어 있어 비어있는 말의 뱃속을 통해 물을 따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인물상의 모습은 말 장식이 화려한 주인상의 경우 고깔 형태의 띠와 장식이 있는 삼각모(三角帽)를 쓰고 다리위에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하인상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웃옷을 벗은 맨 몸으로 등에 짐을 메고 오른손에 방울같은 것을 들어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인물상은 신라인의 영혼관과 당시의 복식,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工藝意匠) 등에 대한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문화재명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

(1) 말탄 사람의 토우(土偶)는 3각형 관모(冠帽)를 쓰고 정장을 하였으며 마구(馬具)를 갖추고 착장(着裝)한 말을 타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는 잔(盞)모양의 그릇이 얹혀 있어 속으로 통하였고 앞가슴에는 물 같은 것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길게 뻗어 있다. 말꼬리는 손잡이의 구실을 하도록 의장(意匠)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록 실용성은 없으나 토우(土偶) 전체가 일종의 그릇 구실을 하도록 구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의 네 다리는 짧고 말굽의 표현은 서투르지만 말머리와 엉덩이의 표현은 사실적이다. 특히 얼굴과 입, 코의 표현은 말의 특색을 효과적으로 나타낸 부분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공예조각품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가작(佳作)이며 1924년 가을 경주시(慶州市) 노동동(路東洞) 금령총(金鈴塚)에서 순금보관(純金寶冠)과 함께 출토되었다.

(2) 앞의 토우(土偶)와 말 모양이나 그릇으로서의 양식은 모두 같다. 다만 인물은 꼭지 달린 모자를 쓰고 바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흔드는 형상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등에는 전대(錢帶)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1)인물은 주인이라고 생각되며, (2)인물은 (1)의 앞을 인도하는 종자(從者)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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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대표적인 금속 공예품의 하나로 높이 37.5㎝의 정병(淨甁)이다.

어깨와 굽 위에 꽃무늬를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가 우거지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이 있으며, 주위로 오리를 비롯하여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였다. 먼 산에는 줄지어 철새가 날고 있고, 물 위에는 사공이 조각배를 젓고 있다. 이들은 모두 청동 바탕에 은을 박아 장식한 은입사(銀入絲)기법을 썼으며, 은상감무늬이다.

물을 따르는 부리에는 뚜껑이 덮혀 있는데 구멍을 뚫어 장식하는 기법으로 덩굴 무늬를 새기고, 그 옆면에는 연꽃 무늬를 배치하였다. 목 부분에도 뚜껑이 있는데 은판(銀板)을 뚫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이 정병은 형태에 있어서 안정감 있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며, 무늬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려 전기부터 크게 발달된 입사기법(入絲技法), 즉 은을 박아 장식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은입사정병은 여러 점이 알려져 있으나, 이 정병은 잘 조화된 우아한 모습을 보여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명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기신(器身) 굽과 어깨에 1줄씩의 도식화(圖式化)된 여의두문대(如意頭文帶)가 돌려져 있고, 몸통에는 늪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 2그루와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3인물, 그리고 수면에 3쌍의 편주(片舟)가 떠 있고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청동 바탕에 은입사(銀入絲)를 해서 묘사한 은상감(銀象嵌) 문양(文樣)이다.

이 은입사의 풍경표현은 근경(近景)에 그치지 않고, 먼 육지와 하늘을 나는 오리·기러기떼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양들의 상감기법은 매우 세련되고 정교해서 은상감이라는 인상을 잊게 해줄 정도이다. 병면(甁面) 전체에는 청록색의 녹이 고운 배경을 이루어서 문양들이 한층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림은 전체가 거의 회화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늪가의 풍경은 고려청자의 문양 중에는 매우 보편화되어 있다.

어깨의 주둥이에는 역시 은으로 하엽문(荷葉文)이 상감되어 있고, 마개 표면에는 뇌문대(雷文帶)와 그 안에 유려한 초문(草文)이 투각(透刻)된 은(銀)장식을 씌워서 세금공예(細金工藝) 기법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병 목에는 도식화된 뇌문(雷文)이 배치되어 있고, 주구(注口)의 원통부(圓筒部)에는 나뭇잎 같은 문양이 역시 은상감되어 있다. 또한 이 원통형의 긴 주구(注口)와 주둥이와의 접속부에 있는 마디 표면에는 뇌문대 안에 초문을 투각한 은장식을 덮었으며, 굽은 은으로 돌려 마무리하고 있다.

이러한 은상감 동기(銅器)의 장식기법은 고려청자 상감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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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포도문호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로 적당한 높이의 아가리에 어깨부분이 불룩하고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는 모양이다. 크기는 높이 30.8㎝, 입지름 15㎝, 밑지름 16.4㎝이다.

직각으로 올라 선 아가리 둘레에도 무늬를 두르고 몸통에는 능숙한 솜씨로 포도 덩굴을 그려 넣었다.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포도 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표현으로 보아 도공(陶工)들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전문 화가들이 그린 회화성이 짙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몸통 전면에 푸른색이 감도는 유백색의 백자 유약이 고르게 칠해져 있는 이 항아리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백자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이다.


문화재명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유백색(乳白色)의 온아(溫雅)한 유약(釉藥) 밑에 철채(鐵彩)로 포도덩굴을 매우 활발하고 세련된 솜씨로 그려 놓았다. 포도덩굴의 잎과 줄기의 생생한 붓끝의 놀림, 포도덩굴에서 희롱하는 원숭이의 표현 등이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철화사기(鐵畵沙器)는 정부의 사옹원(司甕院)이 해마다 감조관(監造官)을 임명하여, 그가 도화서(圖畵署)의 화가(畵家)들을 거느리고 분원(分院)(사옹원(司甕院)의 분원이라는 뜻)에 나가서 어용사기(御用沙器)나 실용사기(實用沙器)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으므로, 도공(陶工)들이 그린 공예 장식적인 그림이 아니라 전문화가들의 회화적인 작품이었다.

몸체에 그린 이런 회화적인 그림과는 달리, 항아리의 주둥이 언저리에는 방간(方間)의 철채문대(鐵彩文帶)를 돌려서 이 병의 조형 효과를 정돈해 주고 있다. 또한 전아(典雅)한 항아리의 곡선이나 철사(鐵砂)의 발색(發色) 등도 매우 효과적이어서, 조선자기(朝鮮磁器) 중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귀족적 취미의 가작(佳作)이다.

현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수준의 작품은 사옹원(司甕院) 직계 가마의 생산품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이 포도 그림도 틀림없이 어느 저명한 도화서(圖畵署) 재적화가(在籍畵家)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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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소문과형병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고려 인종(仁宗)의 릉에서 ‘황통(皇統)6년(1146)’이란 연도가 표기된 책과 함께 발견된 화병으로, 높이 22.8㎝, 아가리 지름 8.8㎝, 밑지름 8.8㎝ 크기이다.

참외 모양의 몸체에 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작품으로 긴 목에 치마주름 모양의 높은 굽이 받치고 있는 단정하고 세련된 화병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비색 유약이 얇고 고르게 발라져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7·8호 가마터를 중심으로 동일한
청자
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양식은 다른 고려 고분의 출토품에도 보이며 중국의 자주요와 경덕진 가마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병이 발견된다.

고려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과 비색의 은은한 유색이 돋보이는 참외모양 화병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장도면(長道面)의 고려(高麗) 인종(仁宗) 장릉(長陵)에서 황통(皇統) 6년(1146) 기년(紀年)이 들어 있는 인종(仁宗) 시책(諡冊)과 함께 발견된 화병(花甁)이다.

태토(胎土)와 유약(釉藥)이 가장 세련되었던 고려청자 최성기의 작품이며, 과형(瓜形) 몸체에 외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취향의 작품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회청색 유약이 매우 얇고 고르게 씌워져 있으며, 유면(釉面)에 부분적으로 식은테가 나타나 있고, 태토는 더할 수 없이 정선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수준의 작품은 순청자(純靑磁)시대에 가장 뛰어난 작품을 생산했던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가마의 생산품으로 짐작된다.

중국(中國) 당(唐)나라 양식의 과형화병(瓜形花甁)에서 유래된 고려(高麗) 과형 화병은 물론, 한(韓)·일(日) 양국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과형(瓜形) 청자화병으로서는 가장 단정하고 세련된 형태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인종(仁宗) 원년(元年)(1123) 고려(高麗)에 왔던 송(宋)나라 서긍(徐兢)이 그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 속에서 칭송했던 고려(高麗) 비색(翡色)의 아름다움도 이런 것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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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칠보투각향로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대좌지름 11.2㎝의 크기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刑)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문화재명   청자칠보투각향로(靑磁七寶透刻香爐)

3마리의 토끼가 떠받치고 있는 3릉(稜) 화반(花盤) 위에 앙연화판(仰蓮華瓣)으로 겹겹이 싸여 있는, 화사(火舍)가 놓여 있는 형식의 향로이다.

노신부(爐身部)는 나뭇잎형(形) 복엽좌(伏葉座) 받침 위에 경쾌하게 얹혀 있고, 화사(火舍)의 뚜껑은 둥근 윤대(輪臺) 위에 칠보문(七寶文)을 투각(透刻)한 구형(球形)을 얹은 형식이다.

이 구형 투각 칠보문 교차부(交叉部)에는 각각 상감(象嵌)한 흰 점 하나씩이 장식되어 있고, 토끼의 눈은 검은 점을 찍었으며, 화반(花盤) 가장자리에는 초화(草花)를 음각하여 돌려 놓았다. 유약(釉藥)은 회청색이며, 식은테는 개반부(蓋盤部)에 일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 작품도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청자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수다스럽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품의 생산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요지(窯址)에서 이 향로의 토끼발 형상과 흡사한 파편이 발견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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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귀형수병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로, 높이 17㎝, 밑지름 10.3㎝, 굽지름 9.9㎝의 크기이다. 연꽃 위에 앉아있는 거북을 형상화했는데 물을 넣는 수구(水口), 물을 따르는 부리, 몸통,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모습은 거북이라기보다 오히려 용에 가까우며, 이마 위의 뿔과 수염, 갈기, 눈, 이빨, 비늘 등이 모두 정교하면서도 부드럽게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졌다. 두 눈은 검은색 안료를 써서 점을 찍었으며, 아래와 위의 이빨은 가지런하게 표현되어 있다. 목과 앞 가슴의 비늘은 음각했으며, 발톱은 실감나도록 양각해 놓았다.

등에는 거북등 모양을 새겨 그 안에 왕(王)자를 써 넣었고, 등 뒤로 꼬아 붙인 연꽃 줄기는 그대로 손잡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거북등 중앙에는 섬세하게 표현된 작은 연꽃잎을 오므려 그곳에 물을 담도록 되어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윤기가 흐른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된 거북의 모습은 우아한 비취색과 함께, 당시 유행한 동·식물 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재명   청자귀형수병(靑磁龜形水甁)

앙련(仰蓮)받침 위에 꿇어 앉은 거북을 상형(象形)한 수병(水甁)이다.

두 눈은 철사(鐵砂)로 찍었으며, 아래위의 이빨은 정연하게 양각되어 있다. 목과 앞가슴의 비늘은 음각했으며, 발톱은 실감나도록 양각해 놓았다. 등의 귀갑문(龜甲文) 안에는 '왕(王)'자 하나씩을 음각했는데, 거북이 앉은 연화좌(蓮華座) 뒤에서 뒷등으로 꼬아 붙인 연줄기는 그대로 손잡이가 되도록 구상하였다.

거북등 중앙에는 연잎을 오므려 붙여서 장식한 조그마한 병 주둥이가 있고, 이 주둥이를 막는 뚜껑으로 반쯤 핀 연꽃 봉오리를 상형하였다. 작품 전면(全面)에 윤택 있는 회청색 유약(釉藥)을 고르게 씌운 청자 최성기의 상형청자인데, 공예조각의 높은 격조를 자랑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순 청자의 맑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릇 전체를 하나의 동물이나 식물 모양으로 상형해서 만든 상형청자가 성행했다. 일반적으로 불상(佛像) 조각이 퇴조(退潮)를 보이던 그 시대의 풍조에 비하면, 매우 세련된 이 공예조각의 발전은 참으로 기이한 대조(對照)현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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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매병으로, 높이 43.9㎝, 아가리지름 7.2㎝, 밑지름 15.8㎝이다. 원래 매병의 양식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 초기에 전래된 이후 곡선이나 양감에서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고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 매병은 작고 야트막하나 야무진 아가리와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그리고 아래부분이 밖으로 약간 벌어진 곡선에서 전형적인 고려자기 임을 알수 있다. 아가리는 일반적인 매병 양식으로 각이 져 있으며 약간 밖으로 벌어졌다.

몸통에는 연꽃덩굴 무늬가 전면에 힘차고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맑고 투명한 담록의 회청색 청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씌워져 있으며, 표면에 그물 모양의 빙렬(氷裂)이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작품의 모양새를 보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에서 구워 냈을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 고려
순청자 전성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명   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靑磁陰刻蓮花唐草文梅甁)

풍만하면서도 유려(流麗)한 곡선으로 감싸인 동체에 맑은 담록색 계통의 유약(釉藥)이 고르게 씌워져 있다. 유약(釉藥)에 식은테가 성기게 나타나 있으나, 이 식은테는 오히려 유약의 풍아(風雅)한 맛을 돋우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매병 중에서는 아랫도리의 곡선이 비교적 작게 벌어져서 헌칠한 맛이 있으며, 기품있게 오므린 주둥이는 병의 크기에 비하여 매우 작고 두드러져서 이 병의 부푼 곡선의 매무새를 잘 가늠해 주고 있다.

몸체에는 비교적 굵은 선으로 활달하게 음각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이 대범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병의 크기와 곡선미에 잘 어울리는 장식솜씨이다. 굽 둘레에 새긴 간결한 뇌문대(雷文帶)와 아울러 조금도 번잡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매병은 어디까지나 환원염(還元焰) 절대주의로 굽던 당시 도공(陶工)들의 신조(信條)가 역력히 반영되어 있는 듯한데, 유약의 발색(發色)이 맑고 깊이가 있는 데다 이만한 크기의 그릇에 이상발색(異常發色)이나 유약의 흠집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원래 이 매병의 양식은 중국 당(唐)·송(宋)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高麗) 초기에 전래된 이후 곡선이나 양감(量感)에서 중국(中國)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련되기 시작하여, 고려(高麗)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 매병의 유질(釉質)이나 작풍(作風)으로 보아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가마에서 구워 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98

청자상감모란문항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20.1㎝, 아가리지름 20.7㎝, 밑지름 14.8㎝이다.

몸통에는 앞뒤로 모란이 한 줄기씩 장식되어 있다. 모란꽃은 잎맥까지도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몸체의 한 면마다 가득히 큼직한
문양을 넣어 인상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꽃은 흰색으로 잎은 검은색으로 상감하였는데, 꽃을 중심으로 잎을 좌·우·상·하로 대칭되게 배열하였다. 유약은 맑은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으로 매우 얇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항아리의 형태로 보아 12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는 꽃과 잎이 큼직하게 표현됨으로써 흑백의 대비가 강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며, 상감기법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명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

시골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물동이를 축소한 것과 거의 같은 형태이다. 시골에 따라서는 지금도 냉수 방구리(경기(京畿)지방)라고 불리는 질그릇이나 오지그릇 중에 이와 흡사한 규모의 그릇이 남아 있다. 또, 조선(朝鮮)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 질그릇 중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모양을 간혹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의 손잡이가 사자면(獅子面)으로 물리어 있고 굽다리가 따로 야트막하게 세워져 있는 데 반하여, 그것들에는 단순한 흙타래 손잡이가 붙어 있고 너래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담록색이 약간 빗긴 회청색 계통의 얇은 유엽(釉葉)에 식은테가 있으며, 유질(釉質)이나 그릇의 제식(制式)으로 보아 12세기를 크게 내려가지 않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더구나 그릇의 앞뒤 양면에 큰 모란(牡丹) 1가지를 큼직하게 상감해 놓은 의장효과(意匠效果)는 상감기법의 고격(古格)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청자상감 중에서는 드물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수준의 유약과 태토(胎土) 및 세련된 기법의 상감작품은 요지(窯址)에서 발견되는 파편으로 보아,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사당리(沙堂里), 또는 전북(全北)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 가마 등이 생산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9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국보99호 갈항사 삼층석탑
                                                             기단명문
갈항사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동탑(東塔)인 석탑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금릉군(金陵郡)의 갈항사 터(葛項寺址)에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갈항사 금당(金堂)의 남쪽에 동서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대표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동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는데 상륜부만 없어졌을 뿐 완전하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이두(吏讀)로 새겨진 명문(銘文)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문은 영묘사(零妙寺) 언적법사(言寂法師) 3남매에 의하여 신라 경덕왕(景德王) 17년(758)에 쌍탑이 건립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서탑(西塔)인 석탑은 경상북도 금릉군의 갈항사터에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갈항사 금당의 남쪽에 동서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서탑은 3층의
옥개석과 상륜부 등 동탑에 비해 부재가 많이 없어졌다. 동탑의 기단부에는 이두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문은 영묘사 언적법사 3남매에 의하여 신라 경덕왕 17년 (758)에 쌍탑이 건립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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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원칠층석탑 (南溪院七層石塔)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남계원칠층석탑은 원래 경기도 개성(開城) 부근 남계원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웅건한 기풍과 정제한 수법 등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려 석탑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했다. 현재 하층기단
면석과 상층기단 사이의 하층기단 갑석자리에 상·하층 기단 갑석을 놓았는데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이 정연하고 그 치석도 세련된 풍을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으며, 각층 옥신에는 각면에 양쪽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다. 상륜부는 탑신 정상에 한개의 돌로 조성한 노반과 복발뿐이고, 그 이상의 부재는 결실되었다.

이 탑에서 은니사경(銀泥寫經) 7축(七軸)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