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 본분사(本分事)로서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 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본분사로서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 등 다른 종교들은 근본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하니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불교라는 말 자체에서 보면
불교(佛敎)란
불(佛)
즉 부처님의 가르침[敎]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붓다(Buddha)라고 하는데, ‘
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붓다 즉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의 가르침이므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 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인
그 깨친다는 것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서는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란 하든,
이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佛)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敎]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 즉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의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에서 부처님은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불교는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주장하는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성품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祖師)스님들이 자기 성품,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 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하여
마침내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만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것이 화엄종(華嚴宗)입니다.
특히
당(唐)나라 현수(賢首)스님이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祖)가 된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써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안다 하고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 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습니까?
천번 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처럼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 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은 다 그렇게 말씀하니만큼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가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은 남아 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서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써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 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자성, 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써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란
마음을 깨치는 데 근본이 있다는 것을
선종(禪宗)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문자로 근본을 삼는 교가(敎家)에서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강 이해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바른 깨달음,
곧
증지(證智)를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야,
다만
모든 성문(聲聞)들의 둥근 바 경계는
몸과 말과 마음이 모두 끊어졌어도
끝내 저들의 친증(親證)하여 나투는 열반에도 이르지 못하거든
하물며 어찌 생각 있는 마음으로써 능히 여래의 둥근 깨달음 경계를 헤아리겠느냐.
반딧불을 가져 수미산을 사르려 하여도
끝내 불태우지 못하듯,
윤회하는 마음으로써
지견을 내어 여래의 대적멸 바다에 들려 하여도
마침내 이르지 못할 것이니라.
善男子 但諸聲聞 所圓境界 身心語言 皆悉斷滅 彼之親證 所現涅槃 何況能以有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燒須彌山 終不能着 以輪廻心 生輪廻見 入於如來大寂滅海終 不能至. [圓覺經 金剛菩薩章]
이와 같이
불법이란
반드시 깨쳐야 되는 것인데
깨친다는 것은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도 다 떨어진 무심지(無心地)에 이르러서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약
생멸(生滅)하는 심의(心意)를 가지고 불교의 깊은 뜻을 배우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느니라. [洞山良介禪師]
심의식(心意識)이라는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심(心)이란
제8 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며
의(意)란
제7식 말나식(第七識末那識)이며
식(識)이란 전6식(前六識)을 말합니다.
분별의식인 6식이나
무분별인 제8식이거나 간에
심의식을 가지고 불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니
불법은 유심경계(有心境界)로써도 알 수 없고
무심경계(無心境界)로써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아니니
이런 까닭에
선문(禪門)에서는
제8식까지 버리고
남[生]이 없는 지견력(知見力)에 문득 들어가네.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證道歌]
언어문자라는 것은
심의식의 표현입니다.
부처님은 언어문자를 달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셨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누구든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허공에 있는 달을 보아야 할 것인데
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천년 만년 가도 달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펴 보이신 것이니
그 손가락을 물고 빨고 해봤자 결국 달은 보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손가락 저편에 있는 달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에 집착해서
손가락 끝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까닭에
마침내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년 만년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달은 못 보는 것이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하든지
손가락 끝만 보고 있으면서 달 보기를 기다린다면 이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 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난존자가 총명하고 지해(知解)가 뛰어나서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으로만 생명으로 삼고 실지 선정을 닦지 아니하므로
부처님께서 너무나 딱하게 여겨 아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부처님께서 언어문자만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아난에게 타이르신 일이 많습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저 과거 무수겁 동안 같이 발심하여 성불하려고 공부하였다.
그러나 너는 다만 언어문자만 따라가서 그것만 기억하고, 나는 틈만 있으면 선정을 닦았다.
선정을 닦는 것은 밥을 먹는 것이요,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은 밥 얘기만 하는 것이니
어찌 배가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언어문자란 처방전이다.
거기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먹어야 병이 낫는 것이지
처방전만 열심히 외어 보았자
병은 낫지 않는다.
너는 처방전만 기억하고 있으니 중생병이 낫지 않은 것이고
나는 약방문에 의지해서 약을 먹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늘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말고
깊이 선정을 닦으라고 간절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아난은 부처님 생전에는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마음 가운데 깨침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필발라굴[七葉窟]에서 대중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생전에 하신 법문들을 수집, 정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였습니다.
아난존자의 총명․지해는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부을 때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붓듯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던만큼 부처님 법문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수승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께서 생각해 보니 아난의 총명이 뛰어나 부처님 법문을 다 기억은 하고 있으나
마음 가운데 깨치지를 못하였으므로
실지의 부처님 법은 모르니,
그런 사람을 대표로 내세워 결집(結集)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금강산 안내문을 잘 외워 자기가 본 것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하여도
실지로
금강산을 본 사람과 못 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자기가 눈을 뜨고 자기가 법을 보고
자기의 마음을 깨친 후에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소개해야만
부처님 법문이 산 법문이 되는 것이지 그
렇지 않고 녹음기 틀어 놓듯이 말로만 전하는 것만으로는
근본 생명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섭존자가 방편을 써서
아난이 없으면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지 못한다는
대중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같이 마른 지해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하면서 필발라굴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난이 애걸복걸하였습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언어문자에만 탐착되어
마음의 근본을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떠나실 때
지금 누굴 의지하여 공부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너는 내가 떠난 뒤 가섭을 의지해서 대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사형(師兄)이 나를 쫓아내시면
나는 누굴 의지해서 대법(大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래도 가섭존자는
“너는 지해 총명으로 몹쓸 병이 든 여우 새끼니
이 사자굴에는 살 수 없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이 회상에 꼭 참석하려면 깨쳐서 오너라”
하고 기어이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쫓겨났으나
아는 것이 많으니 신도들이 와서 예배하고 큰스님이라고 받드니,
쫓겨난 것도 다 잊어버리고
마른 지해로써 다시 대중들 앞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그때 같은 부처님 제자인 발기(跋耆)비구가 있어
조용한 처소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난존자가 와서 법문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어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습니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마음은 열반에 들어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말 많아 무슨 소용 있는가.
그때서야 아난존자가
술 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아! 큰일났구나.
가섭존자에게 쫓겨나 여기 와 있는 신센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가’ 하고 크게 반성하고는
그때부터 부처님이 생전에 그렇게 부탁해도 하지 않던 선정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선정을 익혔는지
그 기간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앉으나 서나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열심히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너무나 피곤하여 좀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침을 베려는 순간에
확철히 마음을 깨쳤습니다.
거기서 다시 가섭존자를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고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필발라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 ‘이렇게 들었노라’로 시작되는 경전들이 편찬케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 역사상 부처님 법문을 모은 경전은 물론
그 뒤에 성립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개는 아난존자가 구술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난존자같이 부처님 법문을 잘 기억해 아는 사람은
천추만고에 그 누구도 없지만 깨치지 못한 연고로 같은 부처님 제자이면서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으니
이는
곧 불교의 생명이 언어와 문자를 기억하는 총명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는 사실(史實)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근본 생명을 잊어버리지 아니해야 합니다.
생명 없는 사람은 송장입니다.
그러니 송장 불교가 아닌 살아 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부처님 진리를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팔만대장경에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언어문자에 집착되어 그러한 언어문자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을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 자료 출처: 달마넷 사이버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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