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의 전설내용은 전등사 아랫마을에서 주막을 하던 주모가, 전등사를 짓던 도편수를 유혹하여 함께 살게 되었는데, 도편수는 벌어온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겼으나, 주모는 돈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모는 도편수의 순정을 배반하고 그가 믿고 맡긴 돈을 챙겨 달아났고, 뒤늦게 이를 안 도편수는 전등사 대웅보전의 처마밑에 주모가 발가벗은 채로 벌을 받는 형상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
●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나부상(裸婦相)의 전설
새벽예불이 끝난 시간, 지경(志敬) 스님은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대웅전을 짓느라 어수선한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희미한 여명 속 여기저기 목재들이 널려 있었다.
저마다 쓰임에 따라 분류되어 있고 더러는 깍여지고 더러는 원통그대로인 모습들이 보기에 좋았다.
"대목들의 솜씨도 좋지만 도편수의 재주는 하늘이 낸 것임을 의심할 수 없어. 저렇게 나무를 섬세하게 다듬어 내는 솜씨를 지닌 그 가슴에 무슨 번민이 많아 사랑놀이에서 헤어나질 못할꼬...."
총각인 채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도편수.
그는 나무를 떡주무르듯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천성으로 타고난 방랑기질 때문에 어디 한 자리에 살가운 가정을 이루고 푹신하게 살아갈 팔자는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일판이 생기면 그곳을 집삼아 살다가 또 다른 일거리가 생기기까지는 이리저리 방랑을 하는 이른바 떠돌이 목수였다.
몸 붙힐 터전이 없어도 인정이 남다르고 솜씨가 신기에 비기리만치 뛰어나 어느 곳이든 공사판에서는 도편수로서의 대접도 융숭했기에 일과 더불어 사는 푸짐한 나날들을 오히려 즐기는게 그의 사람됨이었던 것이다.
"또 주막에서 쉬셨는가."
도편수가 새벽길을 걸어 절 안에 들어섰을때 지경 스님이 물었다. 뒷머리를 글적이던 도편수는
"네"
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일꾼들이 잠들어 있는 요사채로 달아나듯 가버렸다.
부끄러움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는 듯. 도편수는 바닷가 젊은 주모를 알게 된 뒤부터 처음에는 며칠 사이로 밤길을 내려 갔으나 이제는 아예 하루걸러 혹은 매일 주막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런 도편수를 두고 일꾼들은 "늦바람이 무섭다"느니 "낮밤을 가리지 않고 집을 지으려니 얼마나 힘드는가"라며 농을 걸기 일쑤였지만 그런 놀림에는 아랑곳 않고 주막 찾는 길을 점점 좁혀 왔던 것이다.
전등사는 신라적 아도화상이 창건한 이래 줄곧 그 자리를 지켜 왔다지만 임란과 정묘란을 다 겪으며 황폐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선조대와 광해군대를 거치며 이상하게도 큰 불이 자주 화마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렇게 화마에 피폐해 가는 절을 다시 세우리라는 원력을 세우고 중창을 발원한 스님이었다.
지경스님은 처음 도편수를 만났을때 당부 했었다.
"솜씨만 좋아서는 훌륭한 법당이 설 수 없는 것이오. 솜씨에 정성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모실 집을 짓는 마음은 승려보다 더욱 청결해야 함을 잊지 마시오.
집은 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임을 명심하도록."
마음으로 짓는 집. 적어도 법당은 그래야 했고 도편수는 그런 심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저런 인연이 잘 맞아서인지 법당 불사는 몇해째 별 탈 없이 잘 진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도편수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어느날 목재를 받으러 바닷가로 나갔다가 요기를 하러 들어간 주막에서 젊은 주모를 본 순간부터 그의 마음에는 40평생을 숨겨 온 애욕의 불길이 솟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젊은 주모는 떠꺼머리의 도편수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도편수의 용채였다.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절에서 받는 수고비가 도편수의 주머니에 늘 들어 있었다.
어디 가족이 있어 따로 쓸 일도 없는 총각의 신세이고 보니 돈쓰는 재미란 것도 변변히 모르고 살아 온 것이 도편수의 사정인데 그 젊은 주모는 돈 한푼에 웃음 한조각을 내 놓는 그런 간드러진 자태로 도편수의 마음을 가로채 버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나이든 주모의 음흉한 책략도 한 몫을 거들고 있었다.
지경 스님도 그런 사정을 인부들의 입을 통해 여러차례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밤마다 주막을 향해 달려가는 도편수가 저으기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저 순한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없는 노릇. 제 스스로 애욕의 허망함을 알 날이 있을테지..."
지경 스님은 묵묵히 도편수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도편수가 머리를 깍은 남자도 아닌 바에 지나치게 사생활을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 스님의 입장이었다.
다만 공사를 시작할때 지녔던 그 풋풋한 신심이 사라지고 용챗돈 달라는 요청이 잦아지는 그런 일들이 근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덧없는 사랑놀음에 정신을 온통 빼앗겨서야 불사가 될 수 없는 일.
지경스님은 도편수를 불렀다.
"일은 잘 되십니까?"
"그저 그럭저럭..."
기어들어가는 말꼬리에 도편수의 몸도 따라 오그라 들고 있었다.
왜 스님 앞에 불려 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초발심이 곧 깨달음이란 말이 있소이다.
도편수가 처음 법당공사를 맡을 때는 오롯한 불자더니 요새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나도 귀가 있어 소문을 듣고는 있으되 적잖은 걱정이 앞서는 터라 몇마디 당부를 하려하오.
대저 사랑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악업의 뿌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외다.
애욕의 그늘에서 자라는 악업의 씨앗은 걷잡을 수없이 무성한 법이어서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찾기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들처럼 원대한 사랑의 서원을 몸으로 삼아 일체중생에게 덕화를
베풀어야 진정한 사랑이라 할 것이니 도편수께서 누대를 걸쳐 불자들이 불보살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법당을 짓는 일도 그 보살님들의 사랑에 비길 수 있다 할 것이오.
그 좋은 재주로 복전을 일구는 스스로의 책무를 사랑할지언정, 헛된 여인의 살가운 웃음에 묶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오..."
그러나 도편수는 지경스님의 간곡한 당부를 이행하지 못했다.
공사가 막바지로 다가갈수록 젊은 주모는 화색을 더하며 도편수의 애간장을 녹여내기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은 것이니 도편수는 더욱 거센 불길에 휩쌓이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 것인가. 도편수는 일할때 만큼은 철저한 대목이 되어 나무를 깍아 기둥이면 기둥, 보면 보, 서까래면 서까래 등을 갖추는데 어김이 없었다.
저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적용된 배흘림기둥의 공법을 용케도 받아들였음인지 깍아 둔 기둥들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정면과 측면 모두 세칸내기로 터를 고른 법당 자리에 주축돌이 서고 기둥을 세우는 등 일의 진척이 빨랐다. 지경스님을 비롯 스무명이 넘는 사중 스님들도 새로 짓는 법당에 부처님 가피가 충만하길 기원하고 있었다. 그럴즈음, 기어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가버렸어. 어디로 가버렸어. 나를 두고 그냥 혼자 가버리다니.
에잇, 요망한 계집..... 스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제가 죽일놈입니다. 저는 이제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아요...."
울부짖는 도편수. 그의 터진 가슴에서 쏟아져 나오는 증오와 자괴의 욕설들.
기어이 젊은 주모가 도편수의 순정을 나몰라라 짓밟고 돈만 챙겨 달아나 버린 날의 울부짖음이었다.
지경스님은 도편수를 불렀다.
"애욕의 그늘에서 헤메이면 그대로 지옥이고 그곳을 슬기롭게 벗어나면 용화세계로 오를 수도 있음이니 마음을 다지시오. 힘들겠지만 며칠 참회의 기도로 무명의 땅에 드리워진 애욕의 그늘을
걷어내길 바라오. 그리하면 열반락은 아닐지라도 기쁨의 경지가 보일것이니."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도편수는 며칠간을 기도에 열중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기도였고 떠나버린 여인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길어 올리는 기도였다.
마침내 기도가 끝나고 도편수는 법당불사에 매진했다.
형형한 눈빛으로 나무를 만지는 폼세에 대목들이며 인부들이 혀를 내둘러야 했다.
마침내 그 장쾌한 솜씨가 법당을 완성시켰을때 사람들은 그 빼어난 솜씨 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저건 여인의 나신(裸身)이 아닌가?"
추녀밑 지붕 네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분명 나신의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상을 보고
"도편수가 배신한 여인을 영원히 벌주기 위해 그 젊은 주모의 모습을 저렇게 만들어 둔 것이야"
라는 말을 주고 받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도편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님. 스님의 가르침을 받자와 저는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애욕을 벗어나 진정한 법당을 지을 수 있도록 가르침의 인연을 남기고 간
여인도 법당 지붕을 떠받치는 소임으로 그 죄를 참회하고 청정한 인연을 기약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처마밑에 그 여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부디 용서하옵소서.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로 지혜의 마음을 얻은 이 인연의 법당은 항차 화마도 범접 못할
가피의 도량이 될 것입니다."
공사비도 받지 않고 배를 타고 떠나가는 도편수의 말을 지경스님은 선정삼매의 깊은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옴마니 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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