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 장군의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김좌진 장군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안동 김씨 집안에서 김형규 선생과 오숙근 여사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홍주의병장 김복한 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한 장군은 어려서부터 군사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고향 홍성에 호명학교를 세우고 기호흥학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여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부사령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 장군은 대한독립의군부, 길림군정사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조국의 광복을 위한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주장하며 노령 ·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아울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육성하고 한인동포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기를 확보하는 등 북만주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주로 출병하자 장군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와해된 독립군 단체를 수습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다시 북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목적으로 1925년에 신민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1929년 재만 동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며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동포들의 생활안정 및 무장투쟁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 1월 24일 해림현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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