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
허난설헌(許蘭雪軒)
소슬한 찬 기운 스며드는
가을 밤은 길어
밤은 고요히 깊어만 가는데
이슬 맺는 텅 빈 뜰악
구슬 병풍은 차가와라
연못에 연꽃은 시들어져
이 밤 향기사 흩날려라
우물 가에 오동나무 잎새는 지고
가을은 그림자도 없는데
똑닥똑닥 물 시계 소리만
하늬 바람에 울려 오고
서릿발 치는 발 밖엔
밤 벌레들이 구슬피 울어라
금 가위로 삭둑삭둑
베틀에 감긴 비단 자르고나서
옥문관(玉門關)에 수자리 떠나가신
님 그리는 애뜻한 꿈 깨고 나면
비단 장막은 휑하니
텅비어 쓸쓸해라
멀리 가는 인편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에
님의 겨울 옷 부칠려고 마르노라면
슬픈 등잔불만 어두운 방 벽을
쓸쓸히 밝혀 주어요
울음을 삼키며 눈물로
밤새워 애뜻한 사연들을
얼룩진 편지에 써 놓고 나니
역사(驛使)는 내일 아침
남맥(南陌)을 떠난다해요
옷 다 지어 개고
편지를 정성껏 봉하고 나서
뜰악에 내려가 홀로 거니노라면
흐르는 밝은 은하수는 지새려해요
찬 이불 끌어 안고 딩굴며
님 그려 잠 못이루는 밤
지는 달님은 정다웁게
병풍 두른 새악씨 방을
살며시 엿보아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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