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의 꿈 강원도 명주 땅에 서라벌 세달사의 장사가 있었는데 그
곳 관리인 조신 스님은 20세를 갓 넘긴 젊은 스님이었
다.
어느 날 낙산사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정진하던 조신
스님은 그만 멍청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
어 다시 염불정진을 하려 해도 가슴만 뛸 뿐 마음의 평
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여느 때와 달리 아침 저녁으로 낙산사에 올랐다.
그러나 기도보다는 태수의 딸을 먼발치서나마 바라보는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던 날. 조신 스님은
낙산사에 다시 왔으나 낭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기
도를 마치고 떠난 것이었다.
침식ㅇ르 잃을 정도로 사모의 정에 빠진 조신 스님은 그
날부터 산사 관음보살님께 낭자와 혼인할 수 있기를 간
곡히 기원했다.
『관세음보살님! 소승 출가한 신분으로 욕심을 내었으
므로 다음 생에 축생이 도리지언정 금생에 꼭 김태수의
딸과 연분을 맺고 싶사옵니다. 소승의 소원을 이루게 하
여 주옵소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신 스님이 애태우며 기도하는 가운데 무심한 세월은
수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낭자는 혼인을 약속한
준수하면서도 늠름한 한 청년과 함께 낙산사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왔다.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이 모습을 목격
한 조신 스님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신은 해가 저물도록 관음상 앞에 앉아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면서 하루만이라도
낭자와 좋은 인연이 맺어지길 간곡히 발원했다.
어느덧 밤은 깊어 파도소리와 솔바람소리만 들릴 뿐 주
위는 적막한데, 울며 기도하던 조신은 그만 법당 안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조신은 문득 인기척을 느껴 둘레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
지 꿈 속에서도 그리던 낭자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스
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기도에 방해가 되실 줄 아오나 스
님을 잠시 뵈온 이래 하루도 잊을 길이 없어 몰래 빠져
나왔사오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사모의 정으로 말한다면 소승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러나 아가씨는 이미 정혼한 몸 아닙니까?』
『부모의 명을 거역 못해 억지로 정한 혼사입니다 .이렇
게 밤중에 스님을 찾아왔사오니 속히 이 몸을 데리고 어
디로 가주세요.』
『어디로요?』
『어디로든 스님과 제가 단둘이만 살 수 있는 곳으로
요.』
정녕 애타는 듯 발을 구르는 낭자를 보는 조신은 기뻐
어쩔 줄 몰라 관음보살을 향해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소원을 이렇게 들어
주시다니….』
조신은 낭자와 함께 남의 눈을 피하느라 산 속 길이 걷
고 칡뿌리로 요기를 하며 향리로 돌아갔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비록 벽뿐인 집에서 입에 풀칠하기 바빴으
나 내외의 금실은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40년을 사는
동안 조신 내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아이들이 커
가매 내외는 좀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초야를 두루 돌
아다니게 되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15세된 큰아들이 이름
모를 열병과 배고픔을 못이겨 그만 죽고 말았다. 조신
내외는 통곡을 하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아들을 묻고
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익현에 이르러 이들은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라더니 가난한 조신 내외는 병을 얻
게 돼 열두 살 된 딸아이가 밥을 얻어다 여섯 식구가 연
명해야 하는 눈물겨운 살림에 봉착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마을 개에게 물려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와 몸져 눕게 되자 조신의 아내는 목이 메어 흐느껴
울었다. 슬피 울던 조신의 아내는 무슨 결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여보, 이제 우리 헤어집시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사모의 정이 깊어 어떤
고생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지요. 그로 인해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두터운 인연을 맺게 됐으나 이제 늙고 병
들고 가난에 쪼들려 아이들을 추위와 굶주림에서 구하
지 못하다 보니 지난 세월이 그저 무상하기만 합니다.
형색좋던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위의 이슬처럼 사라지
고 지란(芝蘭)같은 백년가약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날아
간 듯 없어져 버렸으니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롭고, 나도
또한 당신 때문에 근심을 하게 되는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난날의 기쁨이 바로 우환의 터전이었어요. 만나
고 헤어짐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니 제발 지금이
라도 헤어집시다.』
이 말을 들은 조신은 같은 생각이었는지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아이를 둘씩 나누고 헤어졌다.
『저는 고향으로 갈 터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
오.』
부인의 말을 듣고 막 작별을 하려는데 조신은 그만 꿈에
서 깨어났다.
날은 거의 다 밝았는데 법당 안에는 등잔불만 깜빡이고
있었다. 조신은 한 생을 다 살은 듯 세상사가 싫어지고
망연할 뿐이었다. 탐욕의 마음도 그리움도 눈 녹듯 깨끗
이 녹아 버리고 말았다. 앞에 앉아 계신 관세음보살 뵙
기가 면구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날이 밝자 조신은 해현령에 가서 꿈에 아들을 묻었던 곳
을 파 보았다.
그곳에선 돌 미륵불이 출현했다. 조신은 삼배를 한 후
물로 말끔히 씻어 부근의 절에 모셨다. 그 후 조신은 장
사의 소임을 그만두고 서라벌에 돌아가 사재를 털어 정
토사를 세우고 수행에 전념하여 낙산사성중의 한 스님
인 조신대사가 되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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