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뒤떨어졌다고?
1995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 앨 고어는 한 국제회의의 기조 연설에서 한국인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으나, 유럽에서와 달리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한국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고어는 그렇게 된 원인으로 한국의 금속활자가 서적의 대중화 내지는 자본주의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 것을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을 것이다. 사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서적의 폭발적인 간행과 대량 유통을 통해 지식과 정보의 확산을 불러왔고, 이른바 ‘종교 개혁’과 ‘과학 혁명’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가들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유럽 사회가 근대화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고 이해한다.
역사가들이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과 그것을 이용한 서적의 간행을 '인쇄술 혁명'이라 평가하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리라. 그런데 인쇄술이 유럽이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데 기여한 측면뿐 아니라, 근대로 변화하던 과정에 있던 유럽 사회의 그밖의 모든 여건들이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 인쇄술을 촉진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당시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변혁운동이 있었기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성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구텐베르크는 매우 수완이 좋은 자본가였다. 그는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이 담긴 팸플릿과 성경을 아주 싼값에 대량으로 인쇄해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성경을 인쇄하기 전에 처음으로 인쇄해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한 아이템은 가톨릭교회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면죄부였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종교개혁이라는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는 무관하게 철저히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의 금속 활자는 구텐베르크의 것과는 달리 고려와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즉 고려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지닌 역사적 역할은 중세적 권위의 몰락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의 성숙한 유교 문화를 꽃피우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5세기 조선왕조는 민본적인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넓은 문자 해독층인 사대부를 길러내는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럴수록 조선 사회는 학문과 교양 지식을 겸비한 사대부 지식인층이 지배하는 성숙한 유교 문화를 구축해 갔다. 그리고 그 바탕에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있었다.
―「우리역사 과학기행」 길잡이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에 처음 알려진 「직지심체요절」
▼ 바로 요기, “선광 7년 7월에 청주목 교외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다”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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