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1906~1967)가 일생동안 가장 사랑했다는 세번째 부인 탄위링(譚玉齡 1920~1942)과 합장된다고 홍콩 원후이보(文匯報)가 지난 9월 27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푸이 황제의 유족은 창춘(長春)의 만주국 황궁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푸이 황제의 세번째 부인 탄위링의 유골을 되돌려받아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의 푸이 황제 능에 합장할 예정이라는 것.
마지막 황제 푸이가 가장 사랑했다는 세번째 부인 탄위링. 강한 반일감정으로 관동군의 음모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2차대전 종전후 열린 도쿄전범재판에서 푸이는 타타르 귀인(貴人)으로 불렸던 탄위링의 죽음에 대해 그녀가 관동군(關東軍) 장교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에게 살해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 처는 무척 나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나이는 젊어 23살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나의 귀인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녀는 중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인은 늘 내게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인내합시다. 앞으로 때가 오면 잃었던 만주국의 땅을 중국이 되찾을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귀인은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살해한 자가 누구냐하면 하수인은 요시오카 중장입니다. 먼저 중국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그 후엔 요시오카 중장이 일본 의사를 소개해줬습니다. 그때 증상은 상당히 심했지만 죽을 정도의 증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 의사가 진찰하던 중 요시오카는 의사와 약 3시간에 걸쳐 뭔가 비밀스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날 밤 의사가 왔고 그 다음날 아침 나의 귀인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던 겁니다. 원래 한 시간마다 포도당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 일본인 의사가 와서 다음날 까지 한두 차례밖에 주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요시오카는 그날 밤 궁안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일본 헌병과 간호부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이틀째 돼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물러갔습니다.”
생전에 푸이는 다섯명의 부인을 맞이했으나 이들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 푸이의 한 살아래 동생 푸취(溥傑 1907~1994)의 부인 사가 히로(嵯峨浩 1914~1987)는 자서전『流轉の王妃の昭和史』에서 푸이 황제는 동성연애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녀가 생길 까닭이 없었다. 세 살의 어린 나이에 淸왕조 최후의 宣統帝로 등극한 후 그의 일생은 시련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인이자 정실 황후가 완룽(婉容 1906 ~ 1946)이다. 완룽은 친정의 姓에서 郭布爾 황후로도 불린다.
완룽은 만주 기인(満洲旗人) 郭布爾(郭布羅또는 郭博勒)栄源의 딸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서기 3세기 시인 차오치(曹植192~232, 魏武帝 曹操의 셋째 왕자)이 쓴 『洛神賦』에서 완룽이라는 이름을 따왔고 마찬가지로 『洛神賦』에서 「慕鴻」이란 자(字)를 붙였다. 17세때 宣統帝(愛新覚羅溥儀)의 황후가 됐다.
영어식 이름은 Elizabeth. 푸이의 임포텐스와 동성애로 인해 부부사이는 좋지 않았고 우울함을 풀기 위해 아편에 손을 대 중독상태에 빠졌다. 푸이가 괴뢰 만주국의 황제가 되자 완룽도 다시 황후가 됐지만 아편중독과 일본인 혐오로 공식 행사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편중독에 따른 건강상실, 정신착란상태에 빠져 부부관계는 사실상 절연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후 푸이가 도주한 후 사가 히로(嵯峨浩) 등 소수 친족과 시종들과 함께 각지를 전전하다가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의 감옥에서 아편중독으로 인한 금단증상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한다
완룽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푸이는 3년후 소련의 억류지에서 받았다. 푸이는 자서전 『나의 전반적 인생(我的前半生)』에서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편 습관에 빠졌다는 점, 용서할 수 없는 행위가 있었다는 점 정도”(완룽에게는 두 사람의 애인이 있었으며 딸을 출산했다고 전해진다. 푸이 자서전에 있는 그녀의 ‘용서할 수 없는 행위’란 애인과의 일로 추정된다. 여아는 태어나자 마자 그녀앞에서 사라졌다. 사산, 약물에 의한 살해, 푸이의 명령을 받은 시종이 살해했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2004년 孝恪愍 황후의 칭호가 추증됐다.
두 번째 부인이 원슈(文繍)로 1922년 완룽과 함께 온 측실이었다. 원슈는 궁정에서 도망쳐 1931년 푸이와 이혼했다. 세 번째가 탄위링이다. 만주족 귀족의 딸인 탄위링은 베이징의 고교에 다니고 있던 1937년 만주국 황궁에 입궁했다. 탄위링 사망 후에 네번째 부인으로 맞은 복(福)귀인 리위친(李玉琴 당시 15세)은 패전후 피신생활을 하다 58년 이혼했다.
1959년 당시 류샤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이 내린 특별사면령에 의해 푸이는 모범수로 석방됐다. 잠시 자금성의 정원사로 일하다가 베이징문사자료연구위원회(北京文史資料研究委員会)에서 활동했다. 1962년 간호사 리수셴(李淑賢 1924~1996)을 만나 마지막 결혼생활을 했다 그후 쩌우언라이(周恩来) 수상의 후원을 받아 1964년에는 정치협상회의전국위원(政治協商会議全国委員)에 선출됐다.
이렇듯 그의 인생은 죽을 때 까지 역경의 연속이었다. 어지간히 풀리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의 파도가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치명적인 신장암을 앓고 있었으나 전 황제였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1967년 사망했다.
시신은 베이징 교회 바바오산(八宝山) 묘지에 매장됐다. 개혁개방의 시대와 맞물려 1995년에는 황제의 예우로 다시 장례가 치러져 현재 묘소는 베이징 교외 이현에 있는 청조 역대 황제의 묘소인 청서릉(清西陵) 근처 「華龍皇園」에 새롭게 「献陵」이란 능묘로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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