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태조실록》의 편찬 및 개수 경위
《태조실록(太祖實錄)》은 태조 원년(1392)부터 7년(1398)까지 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모두 15권 3책이며,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후에 활자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태조는 재위 7년 만에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태종(太宗) 8년(1408) 5월에 승하하였다. 그 이듬해(1409) 8월 28일에 태종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유관(柳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변계량 (卞季良)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멀지 아니하고 또 당시에 활동하던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으므로, 실록 찬수가 시기상조라 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史草)를 각 사관(史官)에게 제출하도록 명하는 동시에, 하륜 등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였다. 태종 10년(1410) 정월부터 하륜·유관·정이오·변계량이 주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조말생(趙末生)·권훈(權壎)·윤회(尹淮), 기사관(記事官) 신장(申檣), 외사관(外史官) 우승범(禹承範)·이심(李審)과 함께 《태조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13년(1413) 3월에 15권을 완성하였다. | |
그러나, 정부에서는 새로 편찬된 실록 가운데 번잡하고 중복된 기사가 많다 하여 개수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세종(世宗) 20년(1438) 9월에 이르러 헌릉(獻陵:태종 릉) 비문의 오서 사건(誤書事件)으로 인하여 다시 《태조실록》을 개수하게 되었다. 헌릉의 비문은 변계량이 지은 것인데, 태조 말년에 일어난 정도전(鄭道傳)의 난과 정종 2년(1400)에 일어난 박포(朴苞)의 난에 대하여 사실과 어긋난 점을 기록하였으므로, 세종은 비문을 개수하게 하는 동시에, 《태조실록》과 이때에 이미 편찬을 완료한 《정종실록》 및 《태종실록》도 개수하게 하였다. 개수가 완료된 것은 세종 24년(1442) 9월이며, 개수 담당자는 신개 ·권제 ·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 등이었다. 그 뒤 세종 30년(1448)에 정인지(鄭麟趾)가 다시 증수(增修)하고, 문종(文宗) 원년(1451)에 고려 우왕(禑王)을 신우(辛禑)로 고치는 간단한 개수가 있은 후 현재에 이르렀다. 《태조실록》은 여러 차례의 개수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내용의 정확성이 의심스러운 기사가 많다. 무엇보다도 정도전의 난에 관한 기사와 우왕의 부자를 신씨(辛氏)로 단정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태조실록》 15권이 처음 완료된 것은 태종 13년 3월이며, 《정종실록》(전 6권)은 세종 8년 (1426) 8월에 되었고, 《태종실록》(전 36권)은 세종 13년(1431) 3월에 완성되었다. 세종 27년 (1445)에 이들 3대(태조·정종·태종) 실록을 각기 네 질(4본)씩 필사하여, 한 질은 서울 춘추관에, 기타 세 질은 충주·성주 및 전주 사고에 각각 보관하도록 하였다. 실록을 활자로써 인출한 것은 《세종실록》때 부터였다.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춘추관·충주·성주의 세 사고의 책은 모두 인멸되고, 오직 전주 사고만이 온전하였다. 난후인 선조 36년(1606)에 이르러 실록 복간의 의논이 일어나, 유일 원본인 묘향산 사고본을 도로 강화도로 이치(移置)하고, 인쇄에 착수하여 《태조실록》으로부터 《명종 실록》에 이르는 선대 실록을 세 질씩 복간하였다. 완료된 해가 선조 39년(1606) 4년 월이었다. 신구(新舊) 4본의 실록을 각 사고에 배치하되, 원본(구본)은 그대로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사고에 두고, 재인본은 서울의 춘추관과 평안도 묘향산 사고, 경상도 태백산(太白山) 사고에 나누어 두고, 초본(교정본)은 강원도 오대산) 사고에 비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 난에 서울 춘추관 소장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어 다른 사고만이 남게 되었고, 묘향산의 실록도 얼마 후에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어 근세에 이르렀다.
2.《태조실록》의 내용 《태조실록》 제1권 첫머리에는 태조의 가계 내력 및 고려말 왕조 개창 이전까지의 약사(略史) 와 태조의 활동을 수록한 총서(總序)가 있다. 1392년 7월 17일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일반적인 실록의 체제에 따라 연월일순으로 기사를 수록하였다. 태조 는 1398년 9월 5일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지만, 정종 즉위년인 그해 12월 말일까지의 기사는 《태조실록》 제15권에 그대로 수록하였다. 그 《태조실록》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태조(1335~1408)의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 으나, 조선 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른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고려말 동북면의 신흥 군벌이었던 자춘(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태조의 고조인 이안사(李安社: 穆祖)는 전주(全州)의 토호였으나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방관 들과 갈등을 빚은 일로 삼척으로 이주하였다가, 후에 해로로 동북면 덕원부(德源府: 宜州)로 옮 겼다. 이 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의 민호 170여 호 등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는 이들을 중 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동(斡東: 간도 지역) 지역의 여진족을 지배하고 원의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翼祖)와 손자 춘(椿: 度祖), 증손자 이자춘(李子春: 桓祖)도 대 를 이어 두만강 지역을 지배하며 원으로부터 천호(千戶)의 벼슬을 받았다. 태조의 아버지 이자 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그는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다. 1361년 10월에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죽이고,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이를 탈환하는데 앞장섰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의 대군을 함흥평야에서 격퇴하였다. 또 동북면에 침범하여 기세를 올린 여진족을 쳐서 평온 을 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후 에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에 임명되었다. 1377년(우왕 3) 에 는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의 왜구를 대파하고,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 阿只拔都)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했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 질하던 여진족 호바투(胡拔都) 군을 궤멸시켰다. 1384년에는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고, 1388년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 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최영이 요동 정벌에 나서자 태조는 우군도통사가 되 어 위화도까지 종군하였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 립했다. 그리고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 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흥 정치세력인 급진 사대부 계층과 손을 잡고 새 왕 조 개창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고 전제개혁 (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익년 1392년 7월에 공양왕을 강압 하여 선양을 받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즉위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에 고려(高麗)의 국호를 잇고 의장(儀章)과 제도를 모두 고려의 것에 따랐다. 그 러나 차츰 구 제도를 개혁하여 새 왕조의 체제를 정비하여 나갔다. 1393년(태조 2) 3월부터 국 호를‘조선(朝鮮)으로 개칭하고 다음 해에는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였다. 1394년에는 정도전 (鄭道傳)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조정에서는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하여 서울에 성균관을 세우고 지방에는 많은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였다. 1398년 8월 태조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제5자인 방원(芳遠)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南誾) 등 개국공신들을 살해하고 이복 형제들이었던 세자 방석(芳碩)과 방번(芳蕃)을 죽였다. 이에 태조는 방원의 요청으로 둘째 아들이었던 방과(芳果)를 세 자로 결정하였다. 이에 상심한 태조는 다음 달 왕위를 세자에게 선양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강헌(康獻), 존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至仁啓運聖文神武) ,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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